뒷모습이 말했다
오춘옥 지음 / 모아드림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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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맞은 자리마다 벌레 드는 시간,

나무들은 상처 어디에 감춰 두었을까

덧난 시간까지 매달려 열매가 되는

새빨간 거짓말 캐보고 싶어

그 언덕 다시 올라 묻고 졸랐을 때,

한마디 대꾸도 없이 묵묵히 익어만 가는

가을 햇살 야단에 낙과로 주저앉아

나는 옆구리부터 짓물러가고 싶었네 _ '사과나무 아래서' 부분

 

시집이 도착하던 날, 나는 '얻어맞은 자리마다 벌레' 들었던가 보다.

밤중에 잠이 안 와 머리맡에 올려두었던 시집을 집어들었다.

내가 시집을 읽는 밤은 대개가 그랬다. '옆구리부터 짓물러가고 싶었'던 그런 밤들.

밤이 아주 많이 깊었으니까 몇 편만 읽다가 자야지 하다가, 몇 편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결국 시집을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그 밤, 내 곁을 지켜준 그 뒷모습의 속삭임은 참 은밀하고도 따스하고도 포근했다.

 

봄을 잃은 봄리스족, 세상에 뜨겁게 전할 말 있는 단풍들, 외동딸 앞장 세워 핏국 세 그릇을 먹는 가족, 파지수집 할아버지가 너무 추워보여 가지고 있는 돈을 드리고 싶은 어린 딸아이, 보름날마다 살아 돌아오시는 삼십 년 전에 떠나신 아버지, 텃밭이 가꾸는 정년 넘은 오빠, 날마다 아침 열 시면 요가원에 가는 엄마, 오랫동안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반란을 일으키는 눈, ……

이네들의 이야기가 예쁜 운율에 담긴 시편들을 읽고 있노라니 마음이 잔잔해져왔다.

역시, 격랑이 이는 마음을 달래는 데는 '노래'가 최고다. 귀로 듣는 노래이거나, 눈으로 읽는 노래이거나. 아름다운 뒷모습의 노래들.

 

시인이 등단 24년만에 펴내는 첫 시집이라는데, 늘 누군가의 '첫'을 함께 한다는 것은 조금쯤 특별한 떨림이 간직된다.

이 시집 역시, 그 떨림 함께 간직하며,

그 밤, 내 귓가에 속삭여주어 고마웠어요.

 

 

안구건조증 눈은 네 살배가 어린 아이다

자주 밖으로 나가자며 눈 가지고 생떼다

책의 재미에 빠져 그의 말 듣지 않으면

감았다 뜰 때마다

물의 번짐

  잔 물결

    파도

      너울성 파도

응석을 더해간다

그래도 고집을 들어주지 않으면

기미년을 그년이라 우기고

구부렸다는 꼬불쳤다로 읽어주며

떼를 쓴다

 

한 시간에 한 번씩 먼 곳을 바라보라던

안과의사 말을 눈이 먼저 엿들은 거다. _ '안구건조증' 전문

 

 

내가 그대 되어보기로 했습니다

거짓이 가르쳐준 참을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마른 가슴 적시고 스미고 그대에게 물길 내려 합니다

 

돌아가 물구나무로 서겠습니다

이미 수천 년 된, 들어오면 다시 밟아나가야 하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거꾸로 그대가 되어보니 참 알겠습니다

내가 그대를 가둔 동굴이었음을

그대는 나만 모르는 눈물이었음을

 

쓰디 쓴 소금꽃 거꾸로 서서 피우겠습니다. _ '종유석'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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