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문학과지성 시인선 156
장석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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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_ '옛 노트에서' 전문

 

얼마전에 새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를 낸 장석남 시인의 낭독회가 있었다.

요즘 시 읽기에 빠진 지인이 낭독회에 함께 가자기에, 마침 집에 한 권 있던 시인의 시집이 생각나 펼쳐보았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 사두고는 여태 읽지 않고 있었더랬다.(사실은, 앞에 몇 장 읽고 덮었었다...)

그리고 그 밤, 이 시집 한 권을 다 읽고 나서 지인에게 바로 낭독회 참석 의사를 밝히고,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 시인의 다른 시집들을 구입했다.

우리의 '시절 인연'이 닿은 거다. 그 언젠가는 읽다가 덮어두었지만, 이번에는 그의 다른 시집들까지 나를 온통 끌어당겨버렸으니!

 

시를 읽을 때의 내 감정 상태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걸 거다.

시집 제목과 달리, 나는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과는 거리가 멀었고, 매일밤 누군가가 그리워 '무장무장' 타는 가슴으로 밤을 지새우거나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거나 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시를 읽을 때도, 꼭 그런 감정 상태를 톡톡 건드리는 시구들에 마음을 담그곤 했다.

장석남 시인의 시집에는, 그런 시들이, 많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런 시,로 읽은 건지도. 내게는 별의 소리도, 바람의 소리도, 나무의 소리도, 물의 소리도, 다, 그리움의 언어로 읽혔다.

'내 마음에 지금 어떤 그리움이 흥건해져' 있었던 탓.

 

점차로 소슬해지는 바람을 느끼며 쓸쓸 또는 씁쓸할 가을의 들머리에서, 장석남 시인의 수많은 시들이, 내 가슴의 온기를 지켜주었다.

꼭 그만큼의 따듯함을 안고, 이 가을의 끝까지, 긴긴 겨울까지, 버텨낼 수 있었으면...

지금이야말로,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니까...

 

 


보푸라기 이는 숨을 쉬고 있어

오늘은

郊外에 나갔다가

한 송이만 남은 장미꽃을 보고 왔어

아무도 보지 않은 자국

선명했어

숨결에 그 꽃이 자꾸 걸리데

 

보푸라기가 자꾸만 일어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가슴 뜀일까

아스라한 맥박들이 자꾸 목에 걸리데

 

어머니,

"얘야, 네 사랑이 힘에 겨웁구나"

"예 어머니. 자루가 너무 큰걸요"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힘겨움일까

 

_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힘겨움일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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