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 시인선 28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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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_ '강' 전문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털어 놓고 싶은 나날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모르는 누군가가 간절했다.

그러던 어느 밤, 전 세계인의 노천 카페, 트위터에 나만의 공간을 또하나 만들었다. 아무도 모르게...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이지만, 또한 아무도 볼 수 없는 곳. 그곳에다 140자로 나를 쏟아냈다.

 

누구에게든 토로하고 싶은 내 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그가 읽어준 이 시를 만난 뒤였다.

내 가슴이 얼마나 울렸는지는, 차라리 강에 가서, 나의 비밀 트윗에 가서 말해야지...

그래서인지, 나의 비밀 트윗에 140자로 내 심장을 꾹꾹 눌러 쓰고 있노라면, 강물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저기 어디쯤에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누군가가, 그의 이야기를 질러내고 있을 것만 같고.

 

 

애초 이 시집과의 만남을 조금쯤 특별하게 열었던 까닭인지, 시 한 편 한 편, 조금 더 정성들여, 조금 더 공들여 읽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시집 속의 많은 시들이, 내 마음속 온갖 길을 두리번거리고 살펴보고 쿵쾅거리고 살금거리며, 걸었다.

내 안 어딘가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수많은 감정의 작은 골목길들을, 이 시들이 걸어감으로써, 나도 발견할 수 있었다.

시집과 함께 한, 내 마음속 산책.

좋은 시집 만나게 해 준, 그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전하며...

 

 


너는 종종 네 청년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나는 알지

네가 켜켜이 응축된 시간이라는 것을

네 초상들이 꽉꽉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지나온 풍경들을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 지니고 날아다니는 바람이

너라는 것을

 

_ '방금 젊지 않은 이에게' 부분

 

 

나는 감정의 서민

웬만한 감정은 내게 사치다

연애는 가장 호사스러운 사치

처량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적개심은 싸구려이니

실컷 취할 수 있다

 

(...)

 

나는 이미 흔적일 뿐

내가 나의 흔적인데

나는 흔적의 서민

흔적 없이 살아가다가

흔적 없이 사라리리라.

 

_ '노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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