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토의 지붕
한수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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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의 독서 습관이랄까, 그런 게 조금 바뀌었다.

전에는 '아는 작가', 그러니까 읽어본 작가, 읽어보고 마음에 든 작가 위주로 읽었는데,

요즘은 '모르는 작가', 그러니까 이름은 익히 알지만 정작 읽어본 작품은 없거나, 이름조차 생소한 작가들의 책에 관심이 많이 간다.

그러다 보니, 소설 읽기의 범위가 좀 더 넓어졌고, 좋은 작품, 좋은 작가를 만날 기회도 더 많아졌다.

그 덕분에, 이 작품, 이 작가도 만나게 된 거다.

 

「나비」로 2002년 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소설집 『그녀의 나무 핑궈리』와 장편소설 『공허의 1/4』을 낸 작가 한수영.

이 책을 소개해 준 사람이, 다른 설명 일절 없이 딱 한 마디, 그녀의 소설을 아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볼 거라고 했다.

오옷. '그녀의 소설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진가를 알 것이란 얘기?

어떤 작가일까, 나도 이 작가의 진가를 아는 독자가 되고 싶어, 얼른 이 책을 만나보았다.

읽는 내내 행복했고, 또 새로운 한 작가의 이름을 마음에 새겼다. 한수영.

 

이야기는 철거 예정지역인 '천왕시 해왕구 명왕3동'에서 펼쳐진다.

주인공은 필리핀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피를 닮아 지붕에 올라가 앉아있기를 좋아하는 민수이다. 어린 소년의 눈으로, 점점 허물어져가는 명왕3동에서 펼쳐지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미 많은 마을 사람들이 떠난 뒤이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에도 마을에는 빈집들이 늘어가지만, 그래도 끝까지 명왕3동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고 사랑스럽고 따뜻하게 펼쳐지는지. 책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비록 이야기의 중심에는 꼬마 주인공이 있긴 하지만, 명왕3동의 주민 하나하나가 모두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지붕 위의 소년, 소년의 엄마 '데릴라', 약국의 김약사와 삼촌, 우포순댓국집 '샌드백' 아줌마와 '깔따구' 아저씨, 고물 모으는 팽할머니, 겨울잠 자는 성신설비의 녹두장군, 바람둥이 세탁소 남자, 택시 모는 용만 아저씨, 비보이 소년... 어느 등장인물 하나 허투루 지나쳐지질 않는다.

이들 한 명 한 명이 모여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명왕3동을 위태롭게 지켜나가며, 끝까지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사랑 이야기도 함께.

 

약국 삼촌과 '데릴라'의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연애 이야기로 읽어나가다보면, 가슴속이 참 달달해진다.

천당이 지옥이고 지옥이 천당인 짝사랑의 세계에 빠진 삼촌의 마음이 가슴속에 짠하게 와 닿기도 하고, 중간중간 사랑에 대한 묘사가 어찌나 감칠맛나던지. 사랑에 대한 글귀를 따로 모아 블로그에 올려두기도 했다. 괜히 내 마음도 분홍빛.

 

용만 아저씨의 걸쭉한 입담에, 아파 누워있던 처지(?)도 있고 혼자 깔깔거리기도 하며, 참 재미나게, 맛나게 읽었다!

용만 아저씨의 어록을 모아보며, 이 재미난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길 바라본다.

 

_ 실컷 엔조이할 걸 다 하고는 뭐 그렇게 내숭을 떨고 앉아 있는 거냐구유. 인생 어차피 엔조이 아녀유? 아주 똥구멍에다 탈곡기 한 대를 달고 있더구만유. 호박씨 까느라구. (98)

 

_ 약사님,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인간이 누군지 알아유? 공부 잘허는 놈? 안 부러워. 잘생긴 놈? 안 부러워. 부잣집에서 태어난 놈? 조금 부러워. 그래도 제일 부러운 건 재수 좋은 놈이어유. 공부 잘헌 놈, 잘생긴 놈, 부잣집 아들놈, 한꺼번에 덤벼도 재수 좋은 놈한티는 못 당해유. (98)

 

_ 언젠가는 열릴 껴. 열리라고 만들었은게 문이여. 안 열리면 문이간? 벽이지. (172)

 

_ 삼촌은 너어무 맑은 게 탈이여. 1급 청정수에 고기가 꼬여? 사랑도 마찬가진 겨. 그렇게 기다리고만 있으믄 어느 세월에 꼬여. 이젠 머리를 써야지. 귀가 안경 걸치라고 있는 겨? 들으라고 있지. 머리는? 모자 쓰라고 만들어놨어? 아니지. 굴리라고 있는 겨. (227)

 

_ 인생은 엔조이여. 엔조이 할 시간도 없는디 뭘 그렇게 뜸을 들이시는 겨.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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