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닷되
한승원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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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닷 되'는커녕 그와 비슷한 삶의 추억도 없으며, 문학소녀였던 적도, 습작기를 거쳐 작가가 되고자 한 적도 없는 내게,

이 책은 어째서 이리도 큰 울림과 감동을 주어, 결국 꼬박 밤을 새우게 만들었는지...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지난해 여름, 계간지 <문학동네>에서 읽은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자 인터뷰의 어느 한 부분이 떠올랐다.

인터뷰어는 정한아 작가였고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연인들의 키스 장면만 모아놓은 영화가 있는 것처럼, 당선 연락을 받는 작가 지망생들의 모습만 모아놓은 필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도 이 대목에서는 늘 짜릿함에 몸이 부르르 떨리거든요."

나도 그런 장면들만 모아놓은 책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초에는 부러 신춘문예를 검색해서 당선자들의 소감을 읽어보고(정작 당선작은 읽지 않으면서!), 어느어느 작가들이 '운명을 바꿔놓은 그 날', 당선소식을 듣던 그 날의 이야기를 어딘가에 풀어놓으면 괜히 더 눈빛을 빛내며 읽곤 했다. 그런 이야기는 비록 남의 이야기, 딴세상 이야기이지만, 읽을 때마다 짜릿하다. 글에도 어떤 기운이 담겨 있다는 걸, 그때는 유난히 더 진하게 체험하곤 한다. 그런 글들을 읽노라면, 나도 괜히 무언가 될 것만 같다. 긍정의 기운을 가득 담고 있는 글은, 읽는 이에게도 그런 에너지를 잔뜩 나누어주나보다.

이 책이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밤을 새워 읽고 벅찬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며 나를 어찌할 줄 모르게 만들어 버린 책.

 

<보리 닷 되>는 시인 소설가를 꿈꾸던 중고교 시절과 청년기의 한승원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내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꽃시절의 / 자취방은 잉크가 얼도록 추웠고 배가 고팠다. / 그랬을지라도, 그 시절 앞집의 처녀가 밤에 몰래 그윽이 건네준 김치 한 포기, / 쌀 한 바가지로 황홀했는데 / 그때 나는 몰랐었다. 그 자리에 더 오래 머무르면서 / 향 맑은 꿀과 꽃가루를 더 많이 모았어야 했는데, / 그 시공을 한시라도 빨리 졸업하고 떠나 새 세상에서 얼른 / 어른이 되어 살아가려고 덤비었다. / 덤벙덤벙 흘러간 세월의 풍화로 말미암은 / 깊은 주름살과 희끗희끗한 머리털인 채로 만난 / 연초록의 새싹 세상, 나의 언덕에 바야흐로 샛노란 / 수선화 산난초꽃 천리향꽃 들이 흐드러졌는데, / 그 향기 속에서 그 꽃시절을 되돌아보니, / 아물아물 안개 속의 음화 한 폭이네. / 아, 누가 다시 가져다줄 것인가. / 한 굽이 한 굽이, / 그 처녀가 남몰래 가져다준 김치 한 포기 쌀 한 바가지 같은. 그 슬프면서도 설레던 시의 편린들을. (9~10)

 

'아, 누가 다시 가져다줄 것인가' 하고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불러볼 수밖에 없는 꽃시절이, 작가 자신에 의해 이 한 권의 책으로 다시 불러내어졌다.

보리 닷 되, 쌀 닷 되와, 한 달간 먹을 반찬 단지와 책가방을 짊어지고 얼마간의 용돈을 받아 팔십 리 길을 걸어 자췻집으로 가야 했던, 용돈이 모자라 쌀 닷 되는 팔아 돈으로 바꾸고 누런 꽁보리밥을 해 먹을 수밖에 없었던, 연모하는 이웃집 소녀에게 그런 사정을 들켜 밤에 그녀가 그윽이 건네준 김치와 쌀을 받아야 했던, 그 배고픈 시절, 하지만 꽃.시.절.

돌아보면 꽃시절이건만 그때는 어린 문학소년을 괴롭히는 일들이 배고픔 말고도 참 많았다.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양지에 눈 녹듯이 스멀스멀 찾아오는 오금의 환장할 듯한 가려움, 수업 시작 전 비우고 온 방광을 다시 긴장하게 만들어 요의를 참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던 공포의 교련 시간, 한 집안의 장손으로서 동생인 '나'를 머슴 부려먹듯 부려먹으며 권위를 내세우는 형, 거기에 더해, 검지와 중지 사이로 빠져버려 시인도 소설가도 될 수 없게 만들어버린 손바닥의 운명선까지.

 

장차 대작가가 될 소년은 클라리넷과 책 읽기에 몰두함으로써 이런 현실들을 잊거나 이겨냈다. 아무리 너는 감수성이 예민하지 못 해 작가가 못 된다는 말을 들어도, 운명선 머리가 검지로 솟아오르지 않고 검지와 중지 사이로 빠져버려 소설가가 될 운명이 아니라는 말을 들어도, 설령 그런 말들에 크게 낙심했더라도,  마음 한 켠에는 반드시 작가가 되리라는 꿈을 간직한 채, 남의 눈에는 '실패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간들을 견뎌냈다.

견디고 이겨내고 버티고 끊임없이 일어섰던 그 시절들을 지나 드디어 소설 「목선」의 당선 소설이 들려오는 즈음, 이야기는 이제 슬슬 막을 내린다.

이야기는 막을 내리지만, 내 심장의 고동은 그때쯤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당신의 소설 「목선」이 본사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되었습니다."

새해 초하룻날 소설 「목선」이 발표된 신문 한 장을 어머니는 아버지의 영정 밑에 걸었다. 영정을 향해 절을 하는데, 내 속의 시꺼먼 놈이 말했다. 아버지, 제 고집이 이겼습니다. 나는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면서 울었다. (262)

 

그리고 책 밖의 나도 괜히 덩달아 울었다.

비록 내게는 보리 닷 되의 슬픈 추억도, 작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습작기의 애절한 사연도 없지만,

내게는 내 몫의 도전과 좌절과 고통이 있기에, 내게도 마치 작가 지망생들이 당선 소식을 듣는 것처럼 내 생에 꼭 이루어보고 싶은 장면이 있기에,

그래서 내 마음속에 보리 닷 되를 짊어지고 이 이야기의 희노애락을 고스란히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손금을 바늘로 한 땀 한 땀 찔러 운명선의 방향을 바꾸어 운명을 바꾸겠다는 의지, 또한 그런 의지를 불사를 만큼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나의 꿈.

그런 생각으로 오늘도 쉬이 잠들 수 없을 것 같은 밤이다.

 

"그래, 무엇을 하든지 한사코 열심히, 남들보다 더 잘하기만 해라."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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