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 채플린
염승숙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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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별점을 낮게 준 어떤 리뷰를 보고서였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를 낯선 우리말들이 잔뜩 나와 있어서 불편했다는, 그런 리뷰였는데, 거기에 예로 들어준 문장을 보며 나는 "오호~! 횡재라!!"를 외쳤다. 이 책, 꼭 만나봐야지! 하면서.

 

나는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헐겁게 매달린 눈밭의 엷은 막을 조심스레 헤쳤다. 그와 동시에 나의 시야는 믿을 수 없는 광경으로 뒤섞이고 얼크러졌다. 검실검실한 광경에 입이 딱 벌어졌다. 작은, 그러나 무수한 공룡들이 옹긋옹긋 모여앉아 눈을 뭉쳐 허겁지겁 입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나는 얼먹은 표정으로 옴짝달싹 못한 채 하염없이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102~103쪽)

 

이 책에는 이런 문장들이 가득하다. 요즘 매일같이 사전을 들여다보며 예쁘고 독특한 부사어들에 관심이 많이 갔는데, 이 책에는 그런 부사어가 특히나 많이 쓰이고 있다. '검실검실(사람이나 물건, 빛 따위가 먼 곳에서 어렴풋이 자꾸 움직이는 모양)', '옹긋옹긋(키가 비슷한 사람이나 크기가 비슷한 사물들이 모여 솟아 있거나 볼가져 있는 모양)', '어빡자빡(여럿이 서로 고르지 아니하게 포개져 있거나 자빠져 있는 모양)', '생게망게(하는 행동이나 말이 갑작스럽고 터무니없는 모양)' 등과 같이 말이다. 사전을 통해서만 본 낱말들을 이 책에서 발견하거나, 낯설지만 재미있는 낱말들을 만났을 때의 행복감이 참 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옆에 준비해 둔 접착용 메모지에 부지런히 예쁜 우리말들을 옮겨 적느라 드바빴다. 그렇게 따로 적어 놓은 단어가 꽤 되어 신난다.

 

통통 튀어 다니는 것 같은 문장에 빠져서 아름다운 낱말들을 건져올리느라 이야기 자체에는 집중을 하지 못한 면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독특하고 흥미로워서 낱말 풍선에 매달려 날아가는 내 마음을 거머당겨주었다. 온 몸에 숫자를 가지고 태어난 '수의 세계'나, 갑자기 지도에서,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1-173번지 이야기 '지도에 없는'이나, '여봇씨요'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채플린으로 변하고마는 '채플린, 채플린', 우산을 들고 하늘로 날아가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이 나오는 '피에로 행진곡' 등 젊은 감성이 돋보이는 이야기들이 달근달근하다.

 

이제 사전을 뒤적여 이 책 속에서 건져올린 단어들의 뜻을 찾아 본 뒤, 이 책을 되읽어 봐야겠다. 글맛이 두 배가 되지 않을까? 언젠가 모 작가가 '소설 읽으며 사전 뒤져야 하느냐!'는 항의를 많이 받아서 이제는 글 쓸 때, 우리말 사용을 자제하려 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염승숙 작가의 글에서는 앞으로도 예쁜 우리말 행진이 이엄이엄 계속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만나게 될 그녀의 글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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