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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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정리(소설 속 지명=현재 지명)]


흥경부(興慶府=兴庆府) = 닝샤후이족자치구 인촨(은천, 银川). 

양주(涼州) = 감숙성 우웨이(무위, 武威). 

감주(甘州) = 감숙성 장예(장액, 张掖). 

숙주(肃州) = 감숙성 주취안(주천, 酒泉). 

우전국(于阗国) = 신장위구르자치주 허티엔(和田). 

사주(沙州) = 감숙성 둔황(돈황, 敦煌).


[인물 정리]

조행덕 : 진사 시험을 보러 송나라 수도 개봉에 왔다가 알 수 없는 운명에 이끌려 사주(=둔황)까지 가게 되는 인물.

주왕례 : 서하군 한족 부대를 이끄는 대장.

이원호 : 서하왕 이덕명의 장남이자 서하군의 통솔자.

위지광 : 우전국 위지 왕조 출신. 현재는 상단 통솔자. 

조연혜 : 과주 태수.

조현순 : 사주 태수. 조연혜의 형.


천성(天聖) 4년(1026년) 봄 조행덕은 진사시험을 치르기 위해 송나라 수도 개봉(카이펑)으로 상경한다. 그런데 깜빡하고 잠이 들어 자신의 차례를 놓쳐버린다. 인생의 너무나 중요한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조행덕. 그는 터덜터덜 걷다가 우연히 한 여인을 알게 된다. 그 여인이 준 천 조각으로 인해 행덕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조행덕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지금의 자신이 예전의 자신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이 마음 속으로 소중하다고 여기던 것이 다른 것과 통째로 바뀌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행덕은 바로 조금 전까지 진사시험에 집착하고 있던 자신이 몹시 하찮게 여겨졌다. 하물며 그로 인해 절망에 빠져 있던 자신이 우습기까지 했다. 얼마 전에 그가 목격한 사건은 학문과도 그리고 서책과도 전혀 무관한 별개의 것이었다. 적어도 지금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아울러 조행덕이 지금까지 고수해온 사고방식이나 인생의 대처방법 등을 근본부터 흔들어대는 강렬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행덕은 그 여인이 준 천 조각에 쓰인 문자를 연구하기 위해 서하의 수도 흥경으로 가기로 마음 먹는다.(나는 책이 끝날 때까지 서하의 수도가 '홍경'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흥경'이다. 어쩐지...아무리 검색해도 정보가 없더라니ㅠㅠ내가 잘못 친 거였다.) 어쨌든 조행덕은 영주를 거쳐 양주로 출발한다. 양주에 가면 어떻게는 흥경으로 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행덕은 양주로 가는 길에 알 수 없는 무리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일행과 뿔뿔이 흩어진다. 아주 맹한 조행덕은 어느 성에 들어가서 '여기가 어디냐?'고 묻고 그로 인해 병사들한테 얻어터진다. 그리고는 갑자기 군부대의 일원이 되고 전투에 투입된다. 이 모든 게 진짜 말도 안 되게 갑작스럽게 벌어진다. 알고 보니 조행덕이 도착한 성이 원래 가려고 했던 양주 성이었고, 그 성은 서하 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한족인 조행덕이 서하 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 가서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으니 안 죽은 게 천만다행ㅠㅠ.


서하군 내에는 한족(汉族) 부대가 있었다. 조행덕은 이 한족 부대의 일원이 되어 갑자기 서하 편에서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송나라 수도에서 한족 최고 관리가 되기 위해 진사 시험을 준비하면 인물이었는데 갑자기 서하 군인이라니...! 이 소설은 이런 식으로 갑작스러운 전개들이 많다. 하지만 조행덕 본인이 이런 전개를 놀라워하지 않는다. 그는 이 모든 걸 운명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조행덕은 주왕례의 부대에 배치되어 감주 공격에 나선다. 여기에서 또 운명 같은 왕족 여인을 만난다. 설마 이 여인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려나? 그 여인은 처음에는 사랑을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이 모든 것이 운명이라면서 모든 걸 받아들이고? 이런 예상이 한치도 빗나가지 않고 들어 맞는다. <둔황>은 내가 너무 좋아하는 소설이지만 이런 지점 때문에 솔직히 올드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모든 게 운명처럼 진행된다. 하지만 진짜로 오래된 소설이니까 일단 눈 감아주고 넘어가본다.(1959년 문예지에 연재한 소설이라고 한다.)


조행덕은 왕족 여인을 지켜주고 싶지만 어쨌든 그에게도 할일이 있다. 독자인 나조차도 잊고 있었지만 그는 서하 문자를 공부하기 위해 개봉을 떠난 것이었다. 그는 왕족 여인을 주왕례에게 부탁하고는 천성 6년(1028년) 흥경으로 떠난다. 거기에서 조행덕은 서하 문자를 익힌다. 그러고는 감주에 돌아가지 말고 이대로 개봉으로 돌아갈까 고민한다. 감주성에서 만났던 왕족 여인은 주왕례에서 부탁했으니 어떻게든 살고 있을 것이고 이대로 사라진다고 해도 누구도 조행덕을 찾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또다시 운명적인 예감과 맞닥뜨린 조행덕은 감주성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다. 천성 8년(1030년) 감주성 근처 주왕례의 부대가 있는 곳으로 간 조행덕에게 주왕례는 왕족 여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그 왕족 여인은 정말 죽은 것일까? 이 부분은 스포일 수 있으니 리뷰에는 쓰지 않도록 하겠다. 어쨌든 왕족 여인의 존재는 주왕례에게도 조행덕에게도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들은 나름대로 고통스러워 하지만 나는 왕족 여인이 제일 불쌍하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여러 남자들에게 치이는 걸까. 어쨌든 옛날 소설이니 참고 넘어가자.


그 후 주왕례와 조행덕이 있는 군대는 전투를 위해 감주에서 숙주(肃州)로 이동한다.(중국의 감숙성이라는 지명은 감주와 숙주의 지명에서 한 자씩 따와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소설의 절반 정도가 전부 이런 내용이다. 어디로 이동해서 싸우고 또 저기로 이동해서 싸운다. 아니 도대체 이 소설은 뭔 재미로 읽는 것이냐 의아할 수 있는데 조행덕이 속한 부대가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아주 큰 재미다. 중국 서북부 지도를 보면서 이들이 모래 바람 휘날리며 이동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린다. 풍경 묘사가 기가 막힌다.


【부대는 감주에 인접한 위구르인들의 도읍인 숙주(肃州)를 향해 전진을 계속했다. 감주에서 숙주까지는 5백 리 길로, 약 열흘간의 행군이었다. 물이 말라버린 강가에서 야영을 한 다음 날부터 부대는 자갈이 깔린 벌판에 접어들었다. 벌판은 한동안 계속되다가 점차 모래밭으로 변하더니, 나중에는 완전한 사막지대가 나타났다. 가도 가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모래의 바다가 아득히 하늘과 맞닿아 지평선을 이룰 때까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모래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말발굽에 나무덮개를 씌우고, 낙타의 발바닥을 야크 가죽으로 감싸야 했다.

사막 행군을 시작한 지 사흘 정도 지났을 무렵,  처음으로 큰 강줄기가 나타나고 초원이 보였다. 그러나 강을 건너자 또다시 사막이 나왔다. 사막을 따라 행군을 계속한 지 사흘 후, 이번에는 염호(鹽湖)가 나타났다. 호수의 넓이는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가장 자리를 따라 나 있는 길만 40리에 달하는 큰 규모로, 소금기로 인해 온통 서리가 내린 듯 하얀 호수 주변에는 갈대숲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염호가 끝이 나고 한동안 황량한 황무지가 계속되다가, 저 멀리 남서쪽으로 봉우리에 눈이 덮인 높은 산들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군데군데 수목과 민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들은 대다수가 살구나무로, 살을 에는 찬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 길을 따라서 걷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문장들이다. 정작 이노우에 야스시는 이 소설을 쓰기 전에 둔황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둔황>을 쓰고 나서 20년 후에 처음 가봤다고 한다. 소설가의 상상력이란 정말 대단하다. 이런 문장들 때문에 조행덕이 여기 가서 전투하고 저기 가서 전투하는 내용들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전투에 푹 빠져 지내던 조행덕에게 변화가 생긴다. 그는 원래 유교 서책만 읽어온 뼛속까지 유교 보이였다. 그런데 계속해서 전투에 참가하며, 또 자신의 운명을 뒤흔든 왕족 여인을 생각하면서 자꾸만 인생의 허망함을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의 교리에 마음이 끌렸다.


【변방에 있는 한 죽음은 항상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실제로 행덕은 거의 매일 죽은 사람을 목격했다. 사람들은 하룻밤 앓다가 허망하게 죽어갔다. 성 안을 걷다 보면 어김없이 한두 명씩 죽어가는 사람을 볼 수 있었고, 성을 한 발짝만 벗어나도 모래 위로 삐져나온 사람 뼈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날이 갈수록 행덕에게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고, 또한 그들의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인간의 무력함과 생명의 무의미함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종교가 흥미로웠다. 】


명도(明道) 원년(1032년) 서하국 왕 이덕명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이원호가 왕이 되었다. 조행덕과 주왕례 부대에게는 숙주에서 과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과주 태수 연혜는 불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연혜가 가지고 있는 불교 경전은 한족 언어로 쓰인 것들이었다.(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을 한어로 번역한 것이다.) 조행덕은 그 경전을 서하어로 번역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조행덕은 함께 불교 경전을 번역할 인재들을 모집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흥경으로 출발한다. 이때 상단을 이끄는 위지광이라는 사람을 처음 만난다. ('위지'가 성씨, '광'이 이름이다.) 위지광이 이끄는 상단을 따라 흥경에 다녀온 조행덕은 학자들과 함께 과주에 머물면서 명도 2년(1033년) 여름부터 이듬해 경우(景祐) 원년(1034년)까지 한어 경전을 서하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전념한다. 


이때부터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간다. 서하는 토번(=티베트)과의 싸움에서 이겼고 이제 그 다음 타깃은 사주(=둔황)가 될 거라는 건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과주 태수는 서하의 힘을 알아보고 일찌감치 서하에 항복했으나, 사주 태수는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아 서하가 사주를 침략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사주(=둔황)는 과주보다 훨씬 발달한 지역이었고 일찍이 불교가 꽃피운 지역이었다. 과주 태수 연혜는 만약 사주가 공격 당한다면 그곳에 있는 수많은 불교 경전과 불탑들이 파괴될 거라면서 좌절한다. 그 얘기를 듣자 조행덕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던 중 위지광이 행덕 앞에 나타나 보물을 숨길 수 있는 장소에 대해 말한다. 행덕은 예전에 왕족 여인이 준 목걸이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걸 본 위지광은 어떻게 해서든 그 목걸이를 손에 넣고 싶었다. 조행덕에게 보물을 숨길 장소를 알려줄테니 일단 거기에 그 귀한 목걸이를 숨기고, 나중에 서하 군대가 지나가고 나면 같이 찾으러 가자고 꼬신다. 조행덕은 그 이야기를 듣다가 거기에 목걸이 대신 경전을 숨기면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순간 어떤 생각이 행덕의 뇌리를 스쳤다. 다름 아닌, 경전만은 이곳에 닥칠 운명으로부터 구해낼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경전만은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재물과 목숨, 권력은 한결같이 그것을 소유하는 자의 것이었으나, 경전은 달랐다. 경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불에 타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무도 경전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었다. 타지 않고 지금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조행덕은 위지광이 알려준 천불동 안 은밀한 장소에 어마어마한 경전을 숨기고 입구를 봉한다. 그 다음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그 문서는 1900년대 초 왕원록이라는 이름의 도사에 의해 발견된다. 그 소식을 들은 서양인 탐험가들이 와서 헐값에 그 진귀한 문서들을 사들였고, 중국 정부는 나중에서야 그 문서들의 가치를 알게 된다. 그 문서들은 현재는 '둔황 문서'라고 불리며 '둔황학'이라는 학문까지 탄생시킬 정도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누가 왜 돈황문서를 숨겼을까? 왜 그렇게 많은 문서를 숨기고 입구를 봉해야만 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아무도 모른다. 둔황의 천불동은 우리에게 어떤 것도 얘기해주지 않는다. 이노우에 야스시는 한 권의 소설을 써서 거기에 대한 답변을 내놓았다. 조행덕의 운명이 바로 그 경전을 둔황 천불동으로 이끌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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