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잃어버린 지평선 - 문예 세계문학선 033 문예 세계문학선 33
제임스 힐튼 지음, 이경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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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힐턴의 <잃어버린 지평선>을 드디어 다 읽었다. 예전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는데 못 읽고 시간만 보내고 있다가 전자책이 있는 걸 알고는 냉큼 완독.


나는 이 책을 읽기도 전에 먼저 중국의 샹그리라(香格里拉)를 다녀왔다. 2012년이었다. 나는 혼자 중국을 여행하고 있었고 운남성 샹그리라까지 갔다. 도대체 중국의 마을 이름이 왜 ‘샹그리라‘냐 궁금했었는데,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중디엔‘이었다. 몇몇 중국 마을들이 서로 자신들이 소설 속 ‘샹그리라‘라고 주장하는 와중에 ‘중디엔‘은 아예 지역 이름을 ‘샹그리라‘라고 공식 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운남성의 ‘중디엔‘은 ‘샹그리라‘가 되었다.


소설 속 콘웨이는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샹그리라‘라고 불리는 곳에 불시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어떤 노승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샹그리라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지만 콘웨이와 함께 불시착한 동료들은 그와 의견이 달라서 이러쿵 저러쿵 하게 된다. 누군가는 ‘남아 있자‘, 누군가는 ‘탈출하자‘, 누군가는 ‘선교하자‘고 주장하는 대환장 파티가 벌어진다.


솔직히 내용은 대단히 감탄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서구 지식인이 자신들의 문명에 환멸을 느끼고 동양의 지상 낙원을 갈망하며 쓴 소설 같았다. 그래서 샹그리라는 완전히 동양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서구적이지도 않다. 딱 서구인이 좋아할만큼 신비로우면서 살기에 불편하지는 않을만큼 서구화가 진행되어 있다.


【 “보시다시피” 하고 장노인은 말했다. “여러분이 생각하던 것처럼 우리는 야만인이 아닙니다…….”

(...)티베트 사원에 중앙 난방식의 설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라싸에 전화가 가설되어 있는 시대이므로 놀랄 것이 못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서양적인 위생 지식을 동양적이고, 전통적인 것과 크게 융합시키고 있다는 것이 아주 특이하게 느껴졌다. 예를 들자면 그가 조금 전에 마음껏 즐겼던 욕조(浴槽)는 녹색의 자기(瓷器)로 되어 있었으며, 그 상표에 의하면 오하이오 주 에이크런 회사의 제품이었다. 그러나 원주민 하인은 모두 중국식으로 시중을 들었고 귀와 콧속까지도 닦아내주고 아랫눈까풀 언저리까지 엷은 명주 가제로 닦아주는 것이었다.】


지도에도 없는 지상낙원인데 욕조도 있고 하인도 있다...? 제임스 힐튼이 그 시대에 상상했던 지상 낙원이 어떤 모습인지 왠지 알 것만 같았다. 요즘 식으로 하면 시골 가서 살면서 힐링은 하고 싶은데 벌레는 없어야 하고 동네 주민들의 오지랖도 없어야 하고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랄까.


워낙 오래 전에 나온 소설이고 자신들이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해 그런 환상을 품는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도 충분히 알기에 사실 이런 부분은 휙휙 넘겨가면서 읽었다.


나를 잡아끈 것은 내용보다도 문장이었다. 좋은 곳에 다녀와도 ‘좋았다, 예뻤다‘밖에 쓰지 못하는 단순한 인간인 나는 자연을 묘사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보면 내 걸로 만들고 싶어진다. 이 책에는 그런 문장들이 꽤 많았다. 콘웨이가 비행기 안에서 바깥 풍경을 보면서 감탄하는 장면들은 내가 다 보면서 두근두근 했다.


【그는 얼굴을 창 쪽으로 돌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주위의 하늘은 완전히 쾌청하였다. 그리고 늦은 오후의 태양 광선 속에서 한 광경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일순간 그의 폐 속에 남아 있던 숨을 깡그리 앗아가버렸다. 먼 아득한 곳, 시계의 끄트머리에 빙하로 장식이 된, 눈 덮인 산맥들이 연면히 가로놓여 있었으며, 광대한 구름 바다 위에 떠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들 산맥들은 커다란 반원을 그리면서 대기권 전체에 걸쳐 있었으며 반쯤 미쳐버린 천재의 붓으로 그려진 인상파 그림의 배경을 방불케 하는, 험악하기 짝이 없고 야한 색조를 나타내는 서쪽 지평선과 융합하고 있었다. 그동안에도 비행기는 단조로운 엔진 소리를 내면서 이 경이적인 무대 위를 날고 태양이 비쳤을 때까지는 하늘의 일부라고 생각되던 하얀 절벽을 앞에다 두고 있는 가물가물한 심연을 넘었다. 바로 그때 뮈렌에서 바라본 융프라우를 몇 겹으로 겹친 듯한, 순백색의 절벽이 장려하고 눈이 부실 정도의 백열로 타올랐다.】


이런 멋진 문장들이 있어서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시대가 많이 지났지만 그래도 이 소설이 읽힌다면 이런 장점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또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운남성의 중디엔은 샹그리라가 아닌 것 같다. 설산이 있는 아름다운 동네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경탄을 자아내는 곳은 아니었다. 물론 너무 관광지화 되어 있어서 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제임스 힐튼은 중국이나 티베트 쪽에 가본 적이 없고 상상으로 샹그리라를 만들어냈다고 한다.(티베트 부근을 탐험했던 식물학자 조셉 록의 사진 자료를 참고했다는 얘기는 있다.) 작가가 만들어낸 상상 속의 낙원을 현실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도대체 누가 시작한 걸까. 신비로움은 신비로움으로 남았을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 대놓고 ‘우리가 샹그리라다!‘라고 외치는 동네가 이 소설 속 ‘샹그리라‘일 수는 없다.(소설 속 샹그리라 사람들은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있다.) 하물며 지역명을 대놓고 ‘샹그리라‘라고 개명한 지역이 어떻게 샹그리라일 수 있을까.


소설의 제목은 <잃어버린 지평선>인데 잃어버린 건 지평선만이 아니다. '샹그리라'라는 지상낙원의 아우라마저도 이미 잃어버린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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