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서교동에서 죽다 GD 시리즈
고영범 지음, 리덕수 그림 / 알마 출판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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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읽는 즐거움을 거의 모르고 살았다.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달까. 그런데 얼마 전에 카렐 카페크가 쓴 <로봇>이라는 희곡을 우연히 읽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었다. 인물들의 대사로만 이야기가 진행이 되니까 몰입도가 높았다. 그래서 다른 희곡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알마 출판사의 GD시리즈가 생각이 났다. 민음사 유튜브에서 어떤 편집자님이 GD시리즈로 나온 책을 소개해줘서 기억에 남아있었다.(이때 소개된 책은 <소프루>였다.) 그래서 이 시리즈를 살펴보다가 <서교동에서 죽다>를 읽어보게 되었다.


주인공은 현재 59세인 '진영'이다. 미국에서 지내다가 누나 때문에 잠깐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누나는 암에 걸려 항암 치료 중이다. 누나인 '진희'는 '진영'을 보자 이렇게 부탁한다. 자신의 딸인 '도연'을 만나서 글 같은 거 때려치우고 정신을 차리도록 설득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 '도연'은 사범대를 졸업하고 나서 임용고시를 보지 않고 대학에 다시 들어갔다. '도연'의 전공은 그 이름도 거창한 디지털서사콘텐츠창작학과. '도연'은 편의점에서 일을 하면서도 짬을 내어 글을 쓴다.


엄마인 '진희'의 눈에는 자신의 딸이 임용고시도 보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이 인생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희'뿐 아니라 '진영' 역시 처음에는 '도연'에게 그거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한다. 누나인 '진희'의 부탁도 있었겠지만 '진영'의 눈에도 멀쩡하게 사범대학까지 나와놓고는 선생님을 하지 않고 글을 쓰겠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도연 : 그럼 삼촌 생각엔 제가 뭘 해야 돼요?  // 진영 : 그 디지털창조학과인지 뭔지 당장 때려치우고, 미국 올 생각도 하지 말고, 임용고시 준비해야지.  // 도연 : 그럼 사는 게 나아져요?  // 진영 : 그거랑은 별개의 문제지  //도연 : 예?  // 진영 : 내가 지금 얘기한 건 생계 대책의 문제고, 네가 말하는 건 삶의 의미의 문제잖아. 하나는 야구고, 하나는 축구야. 룰이 달라.】


그런데 그런 '진영'도 글을 쓴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어떠한 장면이 계속 떠오르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한다.


【도연 : 뭐 쓰세요?  //진영 : 비행기 타고 오는데, 앞줄이 텅 비었더라고. 그걸 둘러싼 몇 사람의 신경전과 허탈한 결말...아무것도 아닌데, 자꾸 그 장면이 떠오르네. 그래서 써서 없애려고.】


이것이야말로 '도연'이 글을 쓰려고 했던 이유다. '도연' 역시 계속해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기에 그것을 최대한 자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해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왜 써야 하는지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안 할수는 없기에 '도연'과 '진영'은 모두 글을 쓴다. 그리고 내가 리뷰를 쓰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읽은 모든 책을 리뷰로 남기지 않는다. 책을 읽고 나서 바로 쓰지도 않는다. 한 책 끝내고 다른 책을 읽다가 전에 읽은 책이 계속 머리에 떠다니면 리뷰로 쓰는 편이다. 그래서 '진영'이 말한 '써서 없애려고 글을 쓴다'는 말이 굉장히 공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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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는 자신의 딸이 하라는 선생님은 안 하고 디지털무슨창작학과를 다니는 바람에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딸 때문이 아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느라 고등학교도 못 간 자신의 처지가 불쌍하고 억울해서 병이 난 것이다. 이루지 못 했던 자신의 욕망을 죄다 딸에게 투사했는데 그런 딸마저,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대학도 나오고 더이상 남부러울 것이 없는 처지인데도, 사회가 정의하는 성공을 거머쥐지 못하자 딸에게 분노를 쏟아 낸다. 내가 봤을 때, 등장인물 중에서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은 바로 '진희'다. 그녀는 가슴 속에 맺힌 울분을 어떻게든 풀어냈어야 했다. 


1974년, 이들 남매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가 망하고 이들은 서교동을 떠나 도망치듯이 화곡동으로 이사를 간다. 거기에서 이들 남매의 어머니는 과일 가게를 하나 맡았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밖에서 일을 하고 아버지는 쓰러져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 하고 있으니 나머지 모든 집안 일은 남매들의 차지였다. 나중에는 어머니가 식구들의 간병을 해야했기에 '진희'가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어머니의 과일 가게를 온전히 떠맡았다.


이래서 희곡이든 소설이든 한국 문학을 잘 읽지 못하는 편이다. 외국 문학은 나와 일정한 거리감이 있어서 그렇게 아프지 않다. 아프긴 아픈데 그래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나의 위치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문학은 읽을 때 너무 힘들다. 이 희곡은 현재와 1970년대를 오가는데 그게 우리 엄마, 이모,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아서 쉽사리 책장이 넘어가지를 않는다. 문학이 다루는 대상과 나의 거리가 너무 가까울 때 그것은 감상이 아니라 체험이 된다. 그래서 괴롭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진희' 때문에 괴로웠고 '도연' 때문에 괴로웠고 1970년대를 살아갔던 그 시절 사람들의 어려움 때문에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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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남매의 어머니는 기억이 오락가락 하신다. 그래서 '도연'을 보고도 다른 자식들의 이름을 불러댄다. '도연'은 그때마다 상황에 맞춰서 연기를 해주는데 어느 날은 자신의 엄마인 '진희'의 입장에서 연기를 해야만 했다. '도연'이 자신의 엄마가 되어, 외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너무 슬펐다. 도연은 자신의 엄마를 연기하면서 어느새 엄마의 삶을 이해했다. 마음 속으로 공감하는 그런 거 말고, 진짜로 그 사람이 되어서 말을 해보면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구나. 자신을 그렇게 구박하던 엄마인데도 '도연'은 '진희'의 삶을 변론하고 있었다.


'도연'이라는 캐릭터를 보며 배운 것 하나가 있다면, 자신의 삶을 위로하려면 글을 써야 하고,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말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글 쓰기는 기본적으로 내 감정과 거리두기를 하는 행위이고, 타인의 삶을 연기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굉장히 가까워지는 행위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너무 가까이 들러붙어 있기 때문에 타인의 삶과 자연적으로 멀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글 쓰기를 통해 나 자신과는 거리를 두고 타인과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가 정말정말 싫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을 한다는 건...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로 싫다ㅠ그 사람의 입장에서 연기까지 했다가는 정말로 그 사람을 이해해버릴까봐 너무 싫다. '이해해야 해, 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아'의 반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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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희곡의 제목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남매는 서교동에 살다가 화곡동으로 이사 왔는데 서교동에서 죽은 건 누구였을까. 희곡 안에 이에 대한 힌트가 있다. 그래서 제목을 생각할수록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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