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커포티 선집 3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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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커포티 선집의 세 번째 책이다. 앞선 두 책에 비해 확연하게 대중적인 색채가 묻어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커포티의 소설보다 동명의 영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영화를 보지 않은 나조차도, 검은 드레스를 입은 오드리 헵번의 모습이 눈 앞에 촤라락 펼쳐질 정도이니 얼마나 유명한 영화였는지 알 법하다. 오히려 이 영화가 원작 소설이 있으며, 작가가 <인 콜드 블러드>의 트루먼 커포티라는 걸 알고서 놀랐을 정도였다. <인 콜드 블러드>와 <티파니에서 아침을>...? 잘 매칭이 되지 않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주인공은 십여 년 전 홀리 골라이틀리라는 여인을 알고 지냈다. 그녀와 연락이 끊긴지 오래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그녀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커포티의 인물 묘사이다. 주인공 ‘나’가 홀리를 처음 봤을 때 나오는 이런 문장들이 너무 좋다.


【여름에 가까운 따뜻한 저녁이었고, 여자는 날씬하고 시원한 검은 드레스에 검은 샌들을 신었으며, 진주 초커를 걸고 있었다. 세련되게 마른 몸매였지만 아침 식사용 시리얼처럼 건강하고 비누와 레몬처럼 청결한 분위기를 풍겼으며, 거친 분홍빛이 뺨을 짙게 물들였다. 커다란 입에 위로 들린 코. 검은 선글라스가 눈을 가렸다. 유아기를 넘어선 얼굴이었지만 아직 어른 여성의 이편으로 넘어왔다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여자가 열여섯에서 서른 사이 어디쯤이리라고 짐작했다.】


시리얼처럼 건강하고, 비누와 레몬처럼 청결한 분위기를 가졌다니. 영화에서는 오드리 헵번이 홀리를 연기했지만 소설 속 홀리는 오드리 헵번과는 약간 이미지가 다르다. 내 상상 속 홀리는 좀더 야생마 느낌이다.


【여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뒤에 따라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여자의 엉덩이를 움켜쥔 통통한 손은 약간 부적절해 보였다. 도덕적인 면이 아니라, 미적인 면에서. 그는 키가 작고 몸통이 거대했으며 햇볕에 탔고 포마드를 발랐다. 몸을 감싼 핀스트라이프 정장 옷깃에 꽃은 카네이션은 시들시들했다.】


홀리의 엉덩이에 어떤 남자가 손을 얹는 것을 보고서 도덕적인 면이 아니라 미적인 면에서 부적절해 보였다는 문장 보고 빵 터졌다ㅋㅋㅋㅋㅋ. 주인공은 홀리를 좋아하는 것일까 아닐까 헷갈리는 부분들이 많다. 여러가지 정황을 봤을 때 홀리를 여자로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홀리를 보지 못하는 나날 동안 분개심까지 느꼈다는 걸 보니 도대체 홀리라는 사람의 매력이 어디까지인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하루하루 지나면서는 그녀에게 어떤 얼토당토않은 분개심까지 느꼈다. 절친한 친구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심란한 외로움이 내 삶에 들어왔지만 더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제 그들은 소금도 없고, 설탕도 치지 않은 음식처럼 맹맹하게 느껴졌다. 수요일쯤 되자 홀리에 대한 생각, 싱싱 교도소와 샐리 토마토, 화장실 갔다 오라고 남자들이 50달러를 찔러주는 세계에 대한 생각이 계속 달라붙어 일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소설을 읽다가 또 빵 터진 부분이 있다. 주인공 ‘나’의 직업은 소설가인데 이제 막 잡지에 소설을 싣기 시작한 단계다. 홀리는 헐리우드에서 스타 대리인으로 일하는 오제이 버먼과도 인연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나’의 소설을 보냈다. 그 소설을 받아본 오제이는 ‘길을 잘못 들었다’면서 ‘흑인과 아이들 이야기라니, 그걸 누가 좋아하겠느냐’고 평한다. 홀리 역시 이렇게 덧붙인다.


【"뭐, 나도 그 사람 생각이랑 같아요. 그 소설 두 번 읽어봤는데. 짜증 나는 애들이랑 흑인이랑. 떨리는 이파리. 게다가 묘사뿐이고. 아무 의미도 없잖아요"】


이 대사를 보자마다 트루먼 커포티의 초기 소설인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이 떠올라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짜증 나는 애들'은 조엘과 아이다벨, '흑인'은 미주리 피버, 게다가 '떨리는 이파리'까지.(그 소설에는 자연 묘사가 엄청 많이 나온다.) 커포티가 자신의 전작을 의식하고 쓴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래서 주인공의 직업이 작가인 소설을 좋아한다. 주인공의 삶에 작가 자신의 삶이 그대로 투영되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머싯 몸이 쓴 <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도 재미있게 읽었다. 여기서는 주인공이 작가이자 스파이다. 


다시 커포티의 책으로 돌아와서, 홀리는 자기 자신을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소위 말하는 방랑벽과 역마살의 끝판왕인 캐릭터다.


【"하늘을 바라보는 편이 하늘에 사는 것보다는 더 좋답니다. 무척 공허한 곳이에요. 무척 흐릿하고. 천둥이 치면 다들 사라지는 그런 나라일 뿐이야."】


방랑벽이라는 것은 참 묘해서, 어떤 장소에도 정착하지 못할 뿐더러 어떤 사람에게도 쉽사리 정착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홀리도 그것을 깨닫고 하늘에 사는 것은 무척 공허하다고 말한다. 홀리가 처음 만나는 '나'에게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것도 전부 공허함 때문일까. 겁이 없고 당찬 캐릭터인데도 이런 쓸쓸한 면모까지 있어서 홀리가 더욱 매력적인 인물이 된 것 같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티빙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오드리 헵번이 티파니 진열장을 바라다보며 시작하는 그 유명한 영화. 그런데 확실히 소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영화는 홀리의 장면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홀리의 시점에 이입하여 보게 된다. 그래서 홀리가 쉴새없이 말을 쏟아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저 캐릭터는 왜 저러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나’의 일인칭 시점이라 어차피 홀리를 백 퍼센트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전제로 깔고 들어가서 그런지 '홀리는 왜 저럴까'와 같은 생각은 아예 들지 않았다. 홀리를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커포티의 유려한 문장까지 더해지니 더욱 좋았다.


책 맨 뒤에 실린 옮긴이 해설을 보면 커포티가 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트루먼 커포티 선집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정성스러운 옮긴이 해설이 있다는 것이다. 소설 뒤에 해설이 있으면 꼭 챙겨 보는 편인데 어떤 해설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청탁 받았으니까 썼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시리즈에 실린 옮긴이 해설에서는 작품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서 그런 게 참 좋았다. 


【우리가 이 세속적인 도시에서 살아야만 한다면 물질적인 욕망이 순수하게 종교적이 되는 순간이 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그런 속물성까지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도시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안내서, 기도서 같은 책이다. 모두 홀리 골라이틀리와 함께 언제나 여행 중이지만, 언젠가는 환한 창가의 고양이처럼 자기 자리를 찾기를 바라며.(옮긴이 해설)】


캬, 해설도 문학적이다. 


이 책을 다 읽었으니 이제 다음 책인 <인 콜드 블러드>로 넘어가야 한다. <인 콜드 블러드>는 몇 년 전에 이미 읽었던터라 건너뛸까 말까 고민이 들기는 했지만, 워낙 좋아하는 책이니 이참에 재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커포티를 알게된 것도 <인 콜드 블러드> 덕분이었으니까 말이다. 트루먼 커포티 선집 읽기는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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