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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뱀이 깨어나는 마을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1월
평점 :
이 책을 어디서 알게 됐더라. 김혜리 기자가 진행하는 팟빵에서 정세랑 작가가 책 세 권을 추천한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이 그 중 한 권이었다. 배명훈의 <화성과 나>, 타야리 존스의 <미국식 결혼>, 그리고 이 책이었다. 그때 이 책을 보관함에 담아두었다가 이북 적립금을 모아모아 구매했다.
주인공은 수의사인 클래라 베닝이다. 수의사 하면 동물병원에 앉아서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고치는 사람을 떠올리기 쉬운데 클래라는 야생동물 전문병원에서 일하는 수의사여서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오던 동물병원 수의사랑은 활동 범위가 완전히 달랐다. 야생 올빼미 새끼들을 집으로 데려가서 돌보기도 하고, 야생 토끼나 오소리를 수술하기도 한다. 게다가 뱀까지 잡아야 한다. 극한직업이 따로 없다.
클래라가 사는 마을 곳곳에서 갑자기 뱀이 출몰한다. 근처에 살던 여성이 어느날 갑자기 클래라에게 전화를 걸어 아기 방에 뱀이 있으니 빨리 좀 와달라고 말한다. '뱀 모양 인형인데 착각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그 집에 도착했는데 진짜 자고 있는 아기 위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다. 게다가 아기가 꿈틀꿈틀 하면서 잠에서 깨려고 한다. 이대로 아기가 일어나서 울기 시작하면 놀란 뱀이 아기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클래라는 가죽 장갑을 끼고 뱀을 생포하고 아기를 무사히 구출해낸다. 다행히 클래라는 뱀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다. 한때 도마뱀을 공부하면서 뱀도 같이 공부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 더 많은 뱀들이 출몰하면서 클래라가 가진 파충류 지식이 빛을 발한다. 누군가가 클래라에게 동물원 같은 곳에서 일하는 게 낫지 않겠냐면서, 왜 파충류 전문가가 야생동물 전문병원에 있는 거냐고 묻는다. 클래라가 야생동물 병원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 그녀의 얼굴 한쪽에는 흉터가 있다. 그래서 클래라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고 이웃의 식사 초대를 모두 쳐낸다. 하지만 마을에 나타나는 뱀 때문에 클래라는 어쩔 수 없이 동네 사람들과 계속 엮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내가 고슴도치, 토끼를 돌보는 일을 선택한 이유가 정말 궁금할까? 야생동물들에게는 뻔뻔하거나 호의를 품은 주인이 없으며, 수많은 방문객이 야생동물을 멍하니 구경하러 오지 않았다. 내게는 야생동물들을 돌보는 일이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도록 보장해주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이렇듯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척 서투르니까.】
【내가 아는 사실은 이 영국 마을의 자연 질서가 완전히 어긋나버렸다는 점이었다. 조용한 영국 마을에서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는 경우는 없었다. 잠에서 깼을 때 열대 지역의 독사를 발견하는 일도 있을 수 없는 경우였다.】
솔직히 이웃에 뱀이 나타나거나 말거나 신경 끄고 살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클래라는 관심을 쏟는다. 직업적인 소명일 수도 있는데, 사실 나타나는 뱀들이 너무나도 범상치 않아서 신경 끄고 살기가 어렵다. 가끔씩 출몰하는 영국 풀뱀들이라면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맹독을 가진 타이판 뱀까지 출몰하는 지경에 이르자 도저히 신경을 끄고 살 수가 없다. 타이판은 파푸아뉴기니나 호주 같은 더운 지역에서 서식하는 뱀인데 그게 어떻게 영국 가정집에 나타나는지 클래라는 이해할 수 없다.
사건은 뱀에서 시작하여 더 큰 스토리로 이어진다. 클래라는 처음엔 이 뱀들이 어떻게 영국에 들어왔는지, 누가 도대체 이 뱀들을 가정집에 풀어놓는지 궁금해서 조사를 벌이다가 이 사건에 아주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주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던 이 마을들의 비밀이 밝혀진다.
처음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수의사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신선했다. 경찰이나 탐정이 아닌데도 사건 해결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뱀에 대해서라면 경찰도 형사도 무쓸모다. 뱀을 다루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서 훈련된 파충류 전문가가 아니라면 함부로 나설 수 없다. 클래라는 자신이 대단한 파충류 전문가는 아니라고 말하며 겸손을 부리지만, 무시무시한 독사를 만났는데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지녔다. 맹독을 가진 타이판을 보고서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나서는 장면에서 클래라에게 반했다. 함께 있던 남성이 다른 전문가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클래라를 설득하는데, 클래라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 사이에 이 뱀이 집 안의 어떤 구멍들을 통해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면서 지금 자신이 잡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진짜 멋져.
그렇게 멋지게 타이판 뱀을 생포해놓고서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뱀 전문가에게 자신이 잡은 것을 보여주러 가는 길에는 또 소심해진다.
【노스는 덮개를 살짝 열어 틈을 벌렸다. 나는 숨을 멈췄다. 만약 저 뱀이 전혀 위험하지 않은 뱀이라면 어떡하지? 무려 숀 노스가 전혀 위험하지 않은 애완용 뱀 한 마리를 보려고 지친 몸을 이끌고 시차에 시달리며 브리스톨까지 온 것이라면, 멍청한 나는 무슨 낯으로 그를 본단 말인가?】
주인공이 이렇게 멋짐과 소심함을 오가는 캐릭터여서 이 소설이 한층 더 재밌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 흉터를 보고 외모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한 거라고 말할 때, '외모에 결함이 있으면 내면이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는 거냐고' 반문하는 장면은 정말 통쾌했다.
【많은 사람들은 평범한 미래를 이야기하며 나를 격려하려 했다. '사람들이 전부 외모에만 집착하지는 않는단다, 클래라. 너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거야' 마치 볼썽사나운 외모를 가진 사람은 저절로 더 좋은 내면을 지니게 된다는 듯, 아니면 외모의 결함을 내면의 뭔가로 당연히 보충해야 한다는 듯이 말했다.】
주변 인간들에게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은둔형 캐릭터가 프로페셔널하게 활약하는 이야기가 정말 좋았고 뱀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들(?)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뱀은 무조건 징그럽다고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뱀을 추종하고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어서 깜놀했다. 그리고 뱀은 끈적거리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실크처럼 부드럽다고. 으아아아악, 상상하지 말자. 상상하지 말자. 살면서 읽게 될 뱀 이야기는 이 책에서 다 읽은 것 같다. 더이상 뱀은 그만(ㅠㅠ) 샤론 볼턴의 다른 작품들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