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르망 가마슈 시리즈에 폭 빠져서 지내고 있다.
시리즈 1권 <스틸 라이프>는 읽고서 리뷰 썼고 그후로 2, 3권 읽었다. 문제는 2권을 스포를 당한 채로 읽었다는 것이다. 왓챠에 올라온 드라마 <쓰리 파인즈>가 바로 이 아르망 가마슈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길래 에피소드 제목을 자세히 봤다. 1,2화 에피소드 제목이 '화이트 아웃'인데 소설 어디에도 그런 제목은 없다. 이 에피소드는 소설과 관계없는 오리지널 에피소드인가보다, 하면서 봤는데 그게 바로 <치명적인 은총>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치명적인 은총> 읽기 시작했을 때 드라마에서 이미 본 내용들이 나오길래 얼마나 당황했던지ㅋㅋㅋㅋ. 다행히도 나는 스포에 민감한 사람은 아니다. 진짜 재미있는 컨텐츠는 결말을 알고 봐도 재미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약 30초 좌절하고 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드라마 에피소드 1,2화를 보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왓챠에서 <쓰리 파인즈>가 사라져버렸다. 너무 당황해서 어버버 했는데 찾아보니까 다행히 티빙에 존재한다. 얼른 소설 다 보고 드라마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언제 OTT에서 내려갈지 모른다.(내 기준 드라마보다 소설이 천 배쯤 더 재미있다. 소설이 짱이다.)
<치명적인 은총>은 스포를 다 보고 봤는데도 재밌었다. 나한테는 아르망 가마슈 시리즈는 범인 찾으려고 보는 소설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 보는 재미로 이 소설을 본다. 수사 할 때마다 팀호튼 더블더블 커피와 초코 도넛을 먹고 겨울이 되면 마을 사람들 전부 얼굴을 내놓지 않고 꽁꽁 싸매기 때문에 서로의 모자 색깔을 보고 누군지 알아본다는, 이런 문장들이 너무 좋다. 새 모자 꺼내서 쓰는 날에는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고 한다. 너무 귀엽다. 팀호튼 더블더블은 도대체 무슨 커피인가 찾아봤더니 커피에 설탕2 크림2 넣은 거라고 한다. 달달한 커피는 좋아하지 않는데 팀호튼 더블더블은 먹어보고 싶다. 한국에 들어왔다는데 가격이 사악할 게 뻔하니 언젠가 캐나다에 가게 된다면 꼭 사먹어봐야지.
이 사람들이 먹는 음식들도 궁금하다.
" 사울 페트로프는 녹인 스틸턴 치즈를 얹은 바게트에 아루굴라를 넣어 만든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맥주를 마셨다. 접시에 쌓여 있던 슈스트링 감자튀김은 상당히 줄어 있었다. "
나도 치즈 좋아하는데, 도대체 저 스틸턴 치즈라는 건 뭘까. 아루굴라도 궁금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북미로 여행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봤다. 미국이랑 캐나다는 아주 아주 오래 전에 무슨 일 때문에 며칠 들린 게 전부다. 왜인지는 몰라도 북미는 끌리지 않았는데 이 소설 보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퀘백에 가보고 싶다. 그것도 겨울에!! 미친 짓인 건 아는데 퀘백의 혹독한 추위를 겪어보고 싶다. 올리비에 비스트로에 앉아서 화로에 장작 몇 개 던져두고 카푸치노와 크로와상 먹는 상상을 해본다.
이 소설 읽을 때 유튜브에서 모닥불 asmr 검색해서 틀어놓으면 좋다. 엄청 잘 어울린다. 나는 8시간 짜리 틀어놓고 읽었다.
그나저나 퀘백 경찰청 워라밸 너무 퍼펙트 하다ㅋㅋㅋ. 오후 5시반에서 6시면 퇴근한다. 가마슈랑 보부아르는 수사하는 동안에는 스리파인즈에 있는 B&B에서 머물기 때문에 집에 안 들어가기는 하는데 그래도 절대 야근은 안 한다. 다른 형사들한테는 외근 나갔다가 다섯시 반이면 거기서 퇴근하라고 지시한다. 우리나라 형사 영화 보면 형사들 전부 경찰서에서 먹고 자고 거지꼴로 짜장면 시켜 먹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가마슈는 정반대다. 비스트로에서 식사와 와인을 즐기면서 수사 상황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I Traveled to the Most Depressed Country in the World"라는 제목의 한국 여행 영상을 봤는데 그거 보고 나서 아르망 가마슈 소설까지 읽으니까 우리나라가 얼마나 워커홀릭 국가인지 더욱 절절하게 와닿았다. 그런데 나도 뼛속까지 한국인이라 캐나다 속도에 적응할 자신은 없다. 저런 나라에서는 인터넷이 고장 나면 한 달 후에 고치러 온다는데 나는 그렇게는 못 살아...적당히 빠르게 사는 게 나랑 맞기는 하다.
이 소설에 개의 죽음과 관련된 장면이 나온다. 보다가 눈물이 흘렀다. 부모님이 개를 키우시는데 이제 노견이다. 그래서 개의 죽음과 관련된 내용은 되도록 안 보려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피해갈 수가 없다. 그래도 마냥 슬프지 않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사람 죽는 추리소설 보면서 개가 죽는 내용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는 내 감정선에 문제가 있나 싶은데...그런데 정말 개가 아프거나 죽는 장면을 접하면 수도꼭지 튼 것처럼 자동적으로 눈물이 난다. 큰일이다.
시리즈 3편인 <가장 잔인한 달>에서는 가마슈 경감과 관련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이 소설은 메인 스토리와 별개로 가마슈 경감이 겪고 있는 문제를 보여주는데 생각보다 오래 안 끌고 3편에서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다. 물론 절대 여기서 끝이 아니겠지만 어쨌든 뿌려놓은 떡밥들은 <가장 잔인한 달>에서 제대로 회수를 한다. 루즈할 틈이 없다.
루이즈 페니의 개그 코드는 나랑 너무 잘 맞는다. 이번 소설에는 유령과 대화를 나누는 영매가 나온다. 스리 파인즈 주민들이 부활절을 맞이해서 귀신을 부르는 교령회 모임을 갖게 된다. 손을 맞잡고 귀신을 부르다가 갑자기 무서워지니까 클라라가 식전 기도문을 외운다ㅋㅋㅋㅋㅋ. 여기서 완전 뒤집어졌다. 무서울 때 주기도문, 십계명, 나무관세음보살 외우는 사람들은 봤는데 냅다 식전기도문 외우는 사람은 소설 속 클라라가 처음이었다. 아 너무 웃겼다.
또 이런 문장들은 너무 아름답다.
[ 그는 대부분의 집이 봄이 되면 슬퍼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밝고 유쾌한 눈송이가 사라지고 꽃과 나무는 아직 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슬픔은 때때로 천천히 찾아온다. 누군가가 살해된 첫날, 살해된 사람의 친척들이나 가까운 친구들은 다행스럽게도 마비 상태가 된다. 그들은 무심한 제삼자가 자신들에게 닥친 재앙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거의 항상 뭉쳐 지내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척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옛 해들리 저택처럼 조금씩 무너져 간다. ]
이 소설에는 상당히 많은 캐릭터가 나오는데 버릴 캐릭터가 하나도 없다. 클라라와 피터, 올리비에와 가브라, 머나, 루스 자도 같은 사람들이 오래 알고 지낸 친구 같다. 가마슈랑 보부아르랑 이자벨 라코스트 형사랑은 이미 식사 몇 번 한 것 같다.
주말 동안에 시리즈 4,5권 보고 잠깐 쉬었다가 9권까지 달려야겠다. 스리 파인즈라는 마을을 떠나고 싶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