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광기와 우연의 역사 (최신 완역판)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츠바이크 선집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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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라는 책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정신의학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혹은 과학사에 족적을 남긴 우연한 발견에 대한 내용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은 커다란 역사의 사건 뒤에 숨겨진 어떤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를테면 워털루 전투에 대해 쓰면서 나폴레옹이 아닌 그루쉬를 주인공으로 삼고,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인 잔혹한 행위에 대해 쓰면서 피사로가 아닌 발보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아는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도 전혀 모르는 인물들이 튀어나오고, 전혀 모르는 이야기인 듯 싶다가도 모두가 아는 결말로 끝나게 된다. 그런 글이 열네 편 실려있다. 거의 모든 문장이 현재형으로 적혀 있어서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살아숨쉬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글은 '황금의 땅 엘도라도의 저주'와 '봉인 열차'다. '황금의 땅' 이야기는 서터라는 사람과 캘리포니아, 그리고 골드러시에 얽힌 이야기인데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가 실화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 정도로 다이내믹할 수가 있을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더 이상은 스포가 될 수 있어서 쓸 수 없다.)


'봉인 열차'는 누구나 다 아는 레닌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혁명 시기의 레닌이 아니라 혁명 이전 스위스에서 구두 수선공 세입자로 살던 시기의 레닌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가 읽어본 다른 역사책에는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자 당시 국외 망명 생활 중이었던 레닌이 독일이 마련해준 특별 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핀란드역으로 귀국했다고만 쓰여있었다. 혁명 이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다. 다른 에피소드들은 거의 다 어떤 사건 혹은 인물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데 레닌의 경우 제일 재미있는 지점에서 서술을 끝내버린다. '여기서 끝내면 어떡해!!제발 좀더 써주세요!!'를 외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괴테, 헨델에 관한 내용은 쪼오끔 재미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호불호의 문제이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발은 책 전반적으로 고르게 훌륭하다. 심지어 톨스토이에 관한 챕터는, 톨스토이의 미완성 희곡 작품에 덧붙여 슈테판 츠바이크가 짧은 희곡 하나를 쓴 것인데, '뭐야, 희곡? 재미 없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다가 완전히 빠져들어버렸다. 그리고 유럽이랑 미국 사이에 전신 연결한 이야기, 이것도 정말 재미있다.


이 책에서 특히 좋은 점은 지도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동로마 제국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장소의 지도, 발보아가 이동한 경로의 지도가 있어서 좋았다. 이거 없었으면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다.


번역도 좋았다. 책을 읽으면서 막히거나 갸웃거리는 부분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이 번역가가 츠바이크 선집을 쭉 번역하신다면 계속 따라가면서 읽을 생각이다. 역자 해설도 읽으면 도움이 된다. 키케로와 츠바이크를 엮어서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해설을 읽고 나니 키케로 챕터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글을 너무 잘 쓴다는 것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이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읽어볼 생각인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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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색하는 인간은 책임감의 무게에 짓눌리기 때문에 결정적 순간에 행동하는 경우가 드물다. 역사에서 이런 비극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울려 나온 소리는 차곡차곡 벽돌처럼 쌓이며 보이지 않는 탑이 되어갔다. 천재가 짓는 투명한 건물은 그림자 하나 없이 찬란하게 위로 쑥쑥 솟아올랐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를 끌어 올려서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명징한 감각의 세계로 데려가더니 이제 그를 내동댕이쳐 버렸다. 몽롱한 피로감이 그를 덮친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깊이 잠든다. 그러는 동안 그의 내면에 깃들었던 창조자, 시인, 천재는 다시 죽어버린다."


"이 진지한 사람들이 그 와중에 겨울의 정점인 6월에 멋진 성탄절 파티를 했으며 「사우스 폴라 타임스South Polar Times」라는 익살스러운 신문을 펴내며 즐거워했다는 기록을 읽으면 뭉클해진다. 예를 들어 고래가 나타난 일, 조랑말이 넘어진 일과 같은 자잘한 일들이 엄청난 사건이 되고, 작열하는 오로라, 끔찍한 혹한, 상상을 초월하는 고독감 같은 대단한 일들이 익숙한 일상이 된 삶은 묘한 감동을 준다." 


"우연한 성공과 손쉬운 성취를 보고 고무되는 것은 명예욕에 불과하다. 한 인간이 막강한 운명을 상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이다가 몰락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우리의 마음을 드높이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느 시대에나 가장 위대한 비극이다. 시인은 몇 차례 그런 비극을 만들어 내지만 삶은 수도 없이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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