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이책이 없다. 갖고 있는 책은 전부 전자책이다. 


물론 한때는 종이책이 꽤 많았다. 나중에 커서 서재방을 갖는 게 꿈이라고 할 정도로 종이책 모으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물건과 소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고 2016년부터 2020년 사이에 걸쳐 서서히 종이책을 처분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종이책을 처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책을 처분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책이 쌓이기 때문에 찔끔찔끔 정리하는 건 티도 안 난다. 한꺼번에 미친 사람처럼 정리해야지만 변화가 생긴다.


나 같은 경우는 2016년에 '정리의 축제'라고 부를만한 이벤트를 가졌다. 친언니랑 같이 살 때였는데 언니가 잠시 휴직을 했다. 나는 그때 퇴직을 결심하면서 우리 자매에게는 인생의 변화가 필요했다. <인생이 두근 거리는 정리의 마법>이라는 일본 드라마를 보고서 언니한테 우리도 이거 해보자고 제안했고 언니가 오케이 했다.













도서관에서 곤도 마리에의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과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를 빌려와서 읽고 바로 실행에 돌입했다.


언니와 둘이서 온집안을 다 뒤졌다. 둘이 살던 자취방이었는데 무슨 물건이 그렇게 많은지 충격을 받았다. 주변에 고물상이 있었는데 거기 사장님과 번호를 교환했다. 우리가 옷과 신발 같은 걸 집밖에 내어놓은 후 연락을 드리면 그 분이 리어카를 끌고 오셔서 수거해가셨다. 우리가 굉장히 많은 물건을 내놔서 상당히 흡족해하시는 것 같았다.


그 정리의 끝에는 책이 있었다. 이미 정리 가속도가 붙은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 고민 없이 안 읽는 책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알라딘 중고매입 서비스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깨끗한 건 알라딘에 팔았고 매입불가 판정이 뜬 건 고물상 사장님께 연락드려서 한꺼번에 수거해가실 수 있게 했다.


그렇게 해서 2016년에 1차 정리가 끝났다. 2차 정리는 코로나 시기였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한국에 있는 부모님 집에 와보니 나를 맞이하는 건 보관을 잘못해서 누렇게 변해버린 책들이었다. 책 주인이 해외에 있으니 관리가 안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미니멀 본성이 되살아나면서 남아있는 책을 전부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제일 힘들었던 게 바로 이 2차 정리였다. 1차 정리 때는 사놓고 안 읽은 책들만 정리를 했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이 없었다. 2차 정리 때는 좋아하고 아끼던 책들도 정리해야 했다. 내가 세운 원칙은 이러했다.


1. 전자책이 있으면 처분한다. 나중에 다시 보고 싶으면 전자책으로 사면 된다.

2. 종이책만 있다 하더라도 도서관에 있으면 처분한다. 나중에 보고 싶으면 빌려서 보면 된다.

3. 정말 아끼는 책이라면 북스캔 업체에 가져가서 스캔한 후에 PDF로 보관한다.


이 3번 과정이 사실 결정적이었다. 한 번 해보니까 너무 힘들었다. 책이 든 캐리어를 끌고 서울 지하철역을 오고 가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다가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구간을 만나면 지옥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서는 처분 속도가 더 빨라졌다. 이 책은 절대 못 판다고 생각했던 것도 다 팔았다. 그 무거운 책을 들고가서 내 돈 주고 스캔하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택배로 처분하고 돈까지 받는 일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해서 책장 두 개에 꽉 차 있던 책을 처분하고 책장도 버렸다.


물론 그렇게 해서 책 정리가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책에 대한 집착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종이로 된 아주 작은 책꽂이를 샀다. 딱 거기에 들어가는 만큼만 책을 보관하겠다고 맹세했는데 어느 순간에 그 책장도 보기가 싫어졌다. 책을 다 꺼내놓고 책장부터 처분했다.(당근으로 무료나눔) 그렇게 책장을 없애고 나니까 자연스럽게 또 책을 정리했다.


그 다음에는 북엔드를 놓고 거기에 놓을 수 있는 정도로만 보관하기로 마음 먹었다가 또 처분. 그런 식으로 아주 여러 번에 걸쳐서 책 정리를 했고 결국에는 2022년 무렵에 종이책 제로 상태에 도달했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전자책의 세계로 넘어왔다. 


예전에는 뭘 사려고 검색해봐도 전자책으로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전자책으로 나오고 있어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도대체 전자책이 왜 안 나오지, 했던 책들도 하나둘씩 전자책을 내고 있어서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재미도 있다.


트루먼 커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는 진짜 전자책으로 안 나올 줄 알고 전자책 알림 신청을 걸어두고도 까먹고 있었는데 이거 전자책 출간되었다는 푸시 알림 받고 끼야악 소리를 질렀다. <둔황>은 오랫동안 전자책 출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감감무소식이다. 문학동네 세문전 웬만한 책들은 거의 전자책이 있던데 왜 이 책은 없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기다려본다.



세상의 모든 책이 전자책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나는 이북리더기로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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