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의 시민들 슬로북 Slow Book 1
백민석 글.사진 / 작가정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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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이 참 좋다. 마치 여행지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가이드북 없이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맞닥뜨리고, 사물과 조우하고, 경치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는 그런 일기 같은 여행기. 게다가 쿠바라니. 이보다 더 신선한 여행기가 어디 있을까,

 

백민석 작가는 소설가로서 여러 책을 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책은 내가 알만큼 유명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그의 작품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 첫 여행기를 냈다. 그것도 쿠바를 다녀와서,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들을 묶어 여행 사진 에세이로 펴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첫 여행기 <아바나의 서민들>은 신선했고 풋풋했다.

 

자기 자신을 당신이라는 이인칭 아니 삼인칭으로 지칭하며 자기가 자기에게 대화를 하듯 풀어내는 기록들은 살아 움직이는 예술체로 책 전체를 쿠바색으로 가득 채웠다. 쿠바색은 석양의 붉은빛이었다가 해변의 푸른빛이었다. 흑인들의 까만색이었다가 골목의 흐릿한 색이 되고, 강렬한 태양의 노란 색이었다가 활짝 웃는 여고생들의 흰 색이 되었다.

 

저자가 줄곧 감탄한 것은 쿠바의 아바나 전체가 하나의 살아 움직이는 예술체가 된다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의 걸음걸이,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노인 등 우연히 대중매체가 시원찮은 아바나에 태어나는 바람에 필연적으로 문화의 소비자가 아니라, 문화의 생산 주체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여행자들에게 축복이었다. 물론 34일 아바나에 머물렀던 다른 여행객들은 아바나에서 도무지 볼 게 없었다고 한다. 아바나에는 마추픽추, 이구아수 폭포, 팜파스 소 떼 같은 것들은 없다. 하지만 저자가 푹 빠져버린 아바나에 대한 찬가를 들어보자.

 

아바나 어때?” “멋져, 정말 멋져.” 쓸데없는 대화다. 아바나에 대해서라면 당신의 언어는 무력하고, 백 마디의 말보다 사진 몇 장이 더 효과적이다. (160)

 

좀더 들어보자.

 

쿠바에서는 스펙터클한 대자연의 장관이 언제나, 다양하게 펼쳐진다. 당신이 알던 그 태양이 아니고, 그 구름이 아니고, 그 파도가 아니고, 당신이 알던 그 하늘이 아니다. ... 누군가의 말처럼 셔터만 눌러도 사진이 되어 나온다.” (155)

 

아바나의 진정한 볼거리는 자연경관이나 유적보다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아바나의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를 향해가는 시민들인데.” (136)

 

쿠바는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나라다. 원래는 인디오 원주민이 있었지만, 스페인이 정복하면서 대부분 죽어 버렸고, 지금은 백인과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흑인, 그리고 그들의 혼혈인이 함께 살고 있다. 쿠바에는 4000여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1514년 원주민 인디오들이 스페인으로 주인이 바뀌게 되고, 식민지 경영을 둘러싸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1899년 미국이 새로운 주인이 된다. 이때 그 유명한 관타나모 미국 해군기지가 건설된다. 친미 독재정권이 계속 집권하다가 1959년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이 쿠바인의 정부를 세우게 된다.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이다. 그런데 작가도 놀란 것처럼 그가 만난 사람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환상을 모두 깨뜨려버린다. 사방에서 라틴 댄스 음악이 울려퍼지고 춤을 춘다. 젊은이들은 서로를 껴안고 키스하며 정열을 불태운다. 밤이 되면 헤비메탈 그룹들이 굉음을 쏟아내며 젊음을 끄집어낸다. 담배를 피우는 십대들은 치렁치렁한 머리에 검은 아이섀도, 검은 매니큐어, 검은 셔츠와 검은 레깅스, 입술과 귓불을 피어싱을 장식하고 나타난다.

 

아바나를 여행한다면, 당신은 여행객이면서 동시에 사색가가 된다. 작가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아바나에 푹 빠지게 된다. 길거리 하나, 곧 무너질 것 같은 돌담이 사랑스럽고, 길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언젠가 본 것처럼 낯이 익는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화려한 유적지가 아니라, 골목, 사람, 사람들이다. 쿠바 아바나에서 단 두 곳에만 팔았다는 싸구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약간은 질이 낮은 것처럼 뿌옇게 보이는 사진들이 우리를 낯선 곳으로 이끈다. 이국적인 사람들과 이국적인 거리는 독자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진짜로 그는 가이드북 없이 돌아다니다 길을 여러 번 잃었으며, 그때마다 가이드북에서 소개해주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장면들을 만난다. 같은 장소에 여러 번 가도 그곳에서는 늘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나는 언제 쿠바를 가볼 수 있을 수 있을까, 그런 불가능한 상상의 고통은 이 책을 통해 치유된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혼재된 곳, 과거의 현재가 혼재된 곳, 백인과 흑인이 혼재된 곳, 일상이 예술처럼 펼쳐지는 곳. 우리가 살아서 쿠바에 가볼 수 있다면 그 또한 축복이 되리라.

 

천천히 읽으라고, 마음의 속도로 읽는 슬로북이라는데, 미안하게도 이틀만에 다 읽어 버렸다. 물론 다시 천천히 사진을 마음으로 읽고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 이 책은 마음으로 읽는 책이다. 마음으로 아바나의 도시를 끝없이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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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에서 - 맛, 공간, 사람
크리스토프 리바트 지음, 이수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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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레스토랑에서>

레스토랑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담론

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다시금 책의 장르에 대해 생각해본다. 표지에 있는 제목 “레스토랑에서(맛, 공간, 사람)”이라는 표현은 정확했다. 저자는 독일 보훔 대학교에서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며, 미국에서 미국 문학과 문화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주 관심사는 문화사로 역사와 문학을 합친 퓨전 영역이다. 저자의 이런 배경을 이해한다면 이 책 <레시토랑에서>가 어떤 책인지 짐작을 할 수 있으리라. 제목과 표지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맛깔스럽고 향기롭고 은은한 어떤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자칫 낭패를 볼 수 있다.

이 책은 레스토랑의 역사를 사회학적으로 바라본 사회학 도서이다. 그래서 표지처럼 낭만적이고 우아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레스토랑의 배경에 깔려 있는 웨이터, 웨이트리스, 주방장, 식기청소부, 주방요리부들의 노동과 노동환경(사회학적 환경과 직업 환경인 주방을 모두 아우르는)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서이며 비평서이고 시계열 축을 따라 레스토랑의 변화를 이여기는 역사서이다.

이 책의 첫 세 장은 개인적인 인간에 초점을 맞춘 듯 이야기가 정신없이 흘러간다. 이것은 저자가 의도한 것으로, 레스토랑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삶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중요하게 본 것은 레스토랑에서 주방과 식당 홀을 구분하는 하나의 문이다. 이 문 하나로 인해 노동현장의 폐쇄된 공간과, 레스토랑이라는 개방된 공간이 분리된다. 문 하나에서 이편과 저편이 나뉘고 여유와 힘듦이 나뉜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비지땀을 흘리며 육체노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밀공간과 미식가임을 자처하며 시간을 음미하며 맛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열린공간이 나뉜다. 저자가 주장하듯 레스토랑은 칼 포퍼가 말한 <열린 사회>의 전형적인 영역이다. 이제 사람들은 레스토랑에서 함께 먹고, 함께 마시며 함께 이야기한다. 레스토랑은 이제 일상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열린 공간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맥도널드가 레스토랑인가 아닌가는 별도의 이야기이다. 그건 사회가 규정하는 것이지 레스토랑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1990년대 영국에서는 조선업과 제철업에 종사하는 사람보다 인도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만큼 레스토랑은 주된 산업의 영역이었다.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같이 수행하는 독톡한 곳이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끌고, 식품을 잘게 자르고, 접시와 냄비를 청소하며 쉴 틉 없이 땀을 흘리는 사람들이다. 그건 우리나라 식당에서 일을 하는 분들의 모습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음식점이든 고급 레스토랑 주방이든 별반 다를 게 없다. 레스토랑은 한 마디로 말해 육체적인 영역의 공간이다. 홀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주방에서는 쥐꼬리만한 임금이 지급되고, 육체적 폭력이 가해지고, 불법 이주자들이 고용주의 기분에 무방비로 내맡겨진 곳이다. 결국 “레스토랑”이라는 육체적 공간은 소비 자본주의가 일으킨 사회적 불평등의 현장의 일부이다.

몇 년 전에 1984로 유명한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라는 체험 문학 작품을 읽은 적이 있었다. 작가 조지 오웰이 직접 탄광에 들어가 함께 일하며 그들의 생활상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그때가 1936년이었다. 놀랍게도 조지 오웰의 첫 작품은 레스토랑 주방에서 직접 접시를 닦으면서 체험한 르포르타주 작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라는 작품이다. 오웰의 관찰에 따르면 웨이터는 요리사나 접시닦이와 달리 자신을 레스토랑에 손님으로 오는 부자들과 동일시하며 자신의 비굴함을 즐긴다고 하였다.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식당에 대한 이야기가 여과없이 펼쳐진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하다. 어떤 낭만이나 감정적 호소 없이 투명하지만 건조하게 레스토랑의 이야기를 시계열적으로 훑어낸다. 1917년 논문을 쓰기 위해 웨이트리스 면접을 보고 식당에 들어간 프랜시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2013년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호위 인력 없이 단 두 사람만 대동한 채 <칭펑 만두>라는 소박한 가게에 들러 만두를 시켜 먹음으로써 가게가 단번에 유명세를 타게 돈 사건까지 다양하고 숨겨진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다소 건조한 책이지만, 레스토랑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고 싶다면 단연코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레스토랑을 주제로 역사, 문화, 인간에 대한 참으로 진솔한 이야기를 잘 엮어냈다. 작가의 놀라운 자료 수집과 그것들을 한 데 그러모아 이렇게 멋진 이야기를 펼쳐준 것에 감사한다. 총 351개의 주석이 299쪽부터 342쪽까지 빼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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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독서 - 마음이 바닥에 떨어질 때, 곁에 다가온 문장들
가시라기 히로키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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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절망독서>
한 줄 평 : 절망할 땐 더욱 절망하라.

‘절망’은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까, 매우 자기주도적인 상황이다. 물론 주도적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방이 꽉 막힌 상황, 설상가상으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든 희망이 끊어져 버린 상황.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그건 절망적인 상황,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모든 희망을 포기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될까.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고 하는데, 눈물 젖은 빵을 먹는 게 인생의 참 맛은 물론 아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눈물 젖은 빵맛을 모를 뿐이다. 결코 알 수 없다. 그래서, 절망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절망에 처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해서, 이 책은 세 부류의 독자를 가지게 된다. 첫째는 현재 절망에 처한 상태에 있어서 사실상 모든 희망의 문이 닫힌 상태지만, 책으로라도 무슨 위안을 받을까 하여 이 책을 집어든 독자. 둘째는 과거에 절망 속에 빠져 힘들었던 경험이 있어 책 속 저자의 말에 공감을 크게 할 수 있는 사람, 셋째는 아직 한 번도 절망다운 절망을 경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살면서 이런저런 상처를 받기도 했고, 어쩌면 남은 삶 동안 절망을 크게 경험할 가능성이 높은 독자. 그러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절망도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하나의 통과의례인 것이다. 다만 독자들은 자신이 경험한 절망의 횟수와 강도에 따라 책을 받아들이는 깊이와 반응이 다를 뿐이다.

이 책의 독자인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위의 세 부류 가운데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 하겠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시시콜콜 털어놓을 순 없으나 욥과 같이 엄청난 수준의 불행이 몰아닥쳤고,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의 파도가 나를 덮어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절망적인 때가 있었다. 그 죽음의 늪을 빠져나와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고 있으니 감개무량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의 글들은 더욱 깊이있게 내 속으로 들어와 체화되었다.

저자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길고 긴 절망의 기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더 중요하다며, 이때 더욱 절망적인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그는 13년간 절망의 나락에서 바깥 세상과 단절된 채 병원에서 보낸 사람이므로 그의 말은 일단 신뢰감이 있다. 물론 반평생을 힘들게 어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13년의 절망 세월 역시 짧은 기간이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절망의 순간이 아니라, 절망 시기에 대한 고뇌를 한다. 절망의 기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부터 이 책은 만들어졌다. 일어서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힘을 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그건 결코 위로의 말이 아님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알고 있다. “다 잘 될 거야” 역시 허무맹랑한 위로라는 사실도.

이 책은, 절망에 빠졌을 때 당장 이런 책을 읽으시오, 하고 처방을 내려주는 책이 아니다. 물론 2부에 저자가 읽은 책들이 소개되긴 하지만 일본에서 출판된 책이 많고 지극히 개인 취향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약 처방처럼 동일하게 접근하는 것이 꼭 맞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크게 1부, “절망의 시기, 어떻게 보내야 할까?”와 2부, “다양한 절망과 마주하기”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절망에 따른 책들이 소개되어 있다. 번외편으로 절망할 때 읽으면 안 되는 책,이라는 재미있는 소제목도 있다.

200쪽 가까운 분량의 작은 책인데, 그 중에서 절망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로 1부를 몽땅 써 버렸다. 그래서, 당장 어떤 책을 읽으라고, 하며 분노를 터트리는 다혈질 절망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1부를 읽으면서, 도대체 진짜 책 얘기는 언제 나오는 거야? 하며 꿍시렁댔으니까. 게다가 2부에 들어가서도 책 처방보다 드라마, 영화 처방이 더 많다. 결국 한국 독자 입장에서는 책 처방으로만 본다면 그다지 건지는 책이 많지가 않다. 그래서 혹자는 이 책을 읽고, 더 절망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장점을 꼽는다면, 이 책 자체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읽을 하나의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가식적인 위로나 가식적인 희망의 끈을 던지지 않는다. 저자가 경험한 13년의 절망 내공은 그런 가짜를 몽땅 없애 버렸다. 그래서 진짜 절망자만 느낄 수 있는 깊이 있는 절망 내공으로, 절망 초짜들에게 한 마디 던진다. 절망에 빠졌을 땐 더 절망스러운 책을 읽어라.

이 이론은,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다가가, 같이 울어주는 것으로 치유를 경험케 하는 것과 같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1%의 가능성도 없는 ‘희망’ 공수표를 받아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함께 앉아 같이 울어주는 것처럼, 더 절망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가치유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놀랍게도 희망 하나가 민들레 홀씨처럼 가슴에서 피어나 살며시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절망에 빠진 독자여. 이제 진짜 절망하자. 긴긴 절망의 겨울, 견디는 삶을 살자. 서둘러 절망을 극복하려 하지 말자. 무릎을 질질 끌며 그 시간을 견뎌내자. 끝내 역경을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세상은 절망에서 빠져나온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저자의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세상에 역경과 절망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가득하다면, 여전히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주홍글씨가, 노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스티그마가 낙인으로 찍힐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10년, 20년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에, 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필요하기 때문에.

다만, 한 가지 기억할 것은

행복도
절망도
그대로 멈춰 있는 일은 없습니다. (216쪽)
라는 말이다.

영원한 불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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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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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평 : 다리를 건넌다는 뜻을 다시 생각하게 해 준 인생 철학에 관한 소설. 나 하나의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연약한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이야기.



묘했다. 이런 소설일 줄은 미처 몰랐다. 결론 같은 4장을 위해 힘든 1장, 2장, 3장(각각 봄, 여름, 가을로 제목이 붙여져 있다)의 다리를 건넜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1장부터 3장까지의 이야기는 조금 지루했다. 작가가 도대체 무얼 얘기하려고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은 유일하게 <원숭이와 게의 전쟁>을 읽어보았는데, 그때도 참 잔잔하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읽었었다. 유명한 다른 작품들의 제목과 평을 보면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유독 내가 읽은 두 책이 좀 얌전했다. 그렇지만 이번 책은 3장까지가 그렇다는 얘기지 4장으로 들어서면 너무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당황하게 된다. 이 책은 4장만으로 본다면, SF 소설이다. 전체적으로 장르를 굳이 정한다면, 미스터리 SF소설이다. 하지만 이 역시 50퍼센트 정도만 맞다. 이 소설은 장르 자체가 미스터리다.

요시다 슈이치의 <다리를 건너다>는 “다리를 건넌다”는 뜻의 숨겨진 의미를 의식하고 책을 읽으면 그 재미가 훨씬 배가 된다. 물론 나는 그 사실을 책을 다 읽고 나서 깨달았다. ‘다리’는 현재와 미래의 다리가 될 수도 있고, 억압과 자유의 다리, 보수와 진보의 다리,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다리가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너와 나의 다리까지. 물론 이때 “나와 너의 다리”라고 쓰지 않은 것에 유의해 보길. 이 책을 다 읽고서도 “나와 너의 다리”라고 말한다면 그건 책을 헛 읽은 것이다. 내 삶이지만, 이 삶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너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리를 건널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다.

“다리를 건너다”는 다리를 건널지 말지 고민하는 세 이야기가 1장부터 3장까지 큰 테마로 나뉘어져 독립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어떤 결과론적인 끝을 제시하지 않고 2장으로 3장으로 그리고 마지막 4장으로 넘어간다.

책은 봄-아키라, 여름-아쓰코, 가을-겐이치로, 그리고 겨울의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봄-아키라는 다시 다리를 건너다, 변두리에 내리는 소나기, 여름을 밟다의 소제목으로 구성된다. 봄-아키라는 아키라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약간의 변주가 평화롭게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묘사된다. 어쨌든 일반 추리소설 같은 격정적인 긴장감 없이 책을 편안하게 읽어나갈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긴장을 놓고 읽으면 작가가 세밀하게 배치해 놓은 깨알 같은 장치들을 놓칠 수 있다. 가령, <봄-아키라> 마지막 “여름을 밟다”라는 소제목 이야기에서 <여름-아쓰코>의 국회의원 성희롱 사건이 스쳐 지나가는 뉴스처럼 슬쩍 비치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제목이 “여름을 밟다”인지도 모르겠다.


<여름-아쓰코>의 이야기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작가가 대부분 작품에서 즐겨 화두로 던지는 “인간 심리의 부조리”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남편이 저지른 것이라고 계속 생각하는 성희롱 사건과 군수물품 납품을 위해 받은 5백만엔이라는 뇌물에 대하여 아내 아쓰코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우리 사회가 그렇다.) 아내만 애가 탄다. 그래서 <여름-아스코>의 마지막 소제목은 “불감의 탕에 몸을 담그다”이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는, 인간의 신체 온도와 가장 비슷하다는 불감탕. 갑자기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성경은 사도 요한의 입을 빌어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였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요시다 슈이치가 묘사한 “불감의 탕”은 정확히 이 세대를 성경에서 지적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와 동일하게 보고 있다.

그러다 <가을-겐이치로>로 넘어가면서 하나의 큰 사건이 일어난다.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자신에게서 등을 올린 애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만들어 버린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버린다.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마지막 <그리고 겨울>은 제목에 어울리는 70년 후의 디스토피아 세계가 그려진다. 예상치 못한 반전은 바로 이 70년 후의 디스토피아 세계에 있다. 물론 그 원인은 70년 전 한 교수의 놀라운 연구 결과가 성공을 해서 얻게 된 것이지만, 이미 세상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 버렸다. 물론 작가는 그렇게 끝내버리기가 너무 아쉬워, 또 놀라운 반전 사건을 만들어, 한 번의 기회를 준다. 사람에게 그리고 인간에게. 미래를 아는 단 한 사람의 귀환을 통해 사회는 바뀔 수 있을까. 그는 결국 손에 수갑을 찬 채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신세에 다시 갇히지만, 70년 뒤 줄기세포로 탄생한 사인이라는 독특한 존재들은 자유를 쟁취한다. 한국의 세월호 사건도 나오고, 총칼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브라질의 16세 소녀가 부르짖은 한 권의 펜,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그 외침은 결국, 다리를 건너버린 이 세상이, 다시 다리를 건너 원시의 자유, 민주,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힘들고 어려운 길이다. 이 시대는 불감의 늪에 빠져 있고, 다리를 건넜지만, 그 다리가 끊어져 가고 있지만 그것도 모른 체 계속 앞으로만 가고 있기 때문이다. 표지를 보라. 다리는 이어져 있지 않다.

이 책은, 결국 장르만 미스터리, SF 옷을 입고 있을 뿐이지, 이 시대를 향한 철학적 외침을 외롭게 외치는 책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식으로 포장해서 소설을 쓴 작가의 천재성에 경의를 표한다. 다만 봄부터 가을까지, 조금만 더 긴장감이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도 좋다. 마지막 겨울에서 그 모든 것을 회복했으니까. 겨울의 여주인공 “린”처럼, 나는 당신 소유가 아니라고, 이제는 자유를 찾겠다고 선언하며 다리를 되돌아간 그 용기를 품을 수 있었으니까. 책 한 권으로 세상을 바꿀 희망을 품을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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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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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은 찰스 로버트 다윈이 155년 전에 쓴 과학서적이며, 인류학적인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은 거대한 책이다. 그런데 이제 네이버로, “종의 기원”을 입력하면 다윈의 책보다 정유정 작가의 책이 더 위에 놓인다. 절묘한 책 제목 같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제목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진화론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한 100퍼센트 수용 여부를 떠나, “모든 종은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한다”라는 하나의 명제를 최종 목적지로 달려가는 그의 이론이, 숨겨졌던 한 사이코패스의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풀어내는 정유정 작가의 이야기와 어떻게 서로 닿는가를 이해하기에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정유정 작가가 악의 정점으로 불리는 사이코패스의 이야기를 펼치면서, 자연선택을 거쳐 진화하는 “종의 기원”을 제목으로 삼은 저의는 무엇인가. 책을 읽기 전부터, 책을 읽어나가면서,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이 질문은 계속 머리에 남았다. 우리는 여러 지식과 정보를 통해, 한 인간이 독특한 환경에 처해지면, 자신의 자라온 환경 또는 성품과 관계없이 악을 자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악은, 자의적인 문제가 아니라, 타의적인 문제가 되고, 그렇다면, 악은 과연 악인가, 하는 원론적인 문제에 부딪치고 만다.

읽기 싫었던 책이었다. 피 튀기는 것을 워낙 싫어해서, 영화도 호러물은 쳐다보지도 않고, 책도 잔인한 장면이 포함된 책일 것으로 예상되는 것들은 읽기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스티븐 킹 같은 작가의 작품은 딱 하나를 빼고 손에 잡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딱 하나의 책은 그가 쓴 “유혹하는 글쓰기”라는 책인데, 동화 공부를 하면서 읽었던 책이다. 스티븐 킹은 그 책에서 몇 개의 사례를 들어 글쓰기 기법을 설명했는데, 자신의 책에서 추려낸 그 이야기들은, 잠깐 빌려온 것들인데도 끔찍했다. 창의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훌륭했지만, 이야기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정유정 작가의 책은 절대로 읽지 않을 거라 다짐했었는데, 무더운 여름철을 맞아 회사 독서동아리 7월도서로 정해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근데 정작 그 책을 후보로 올린 친구는 무서워서 읽지 않았다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나.)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머리로 그 장면을 영상화하여 상상하며 읽곤 한다. 문자를 자신의 이미지로 상상하는 것은 창의성 발달에 매우 좋은 영향을 미친다. 영화는 감독이 연출한 이미지를 여과없이 주입하기 때문에 책을 통해 자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창의성적인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그런데, 이 책은 절대로 머리로 장면을 상상하며 읽어서는 안 된다. 며칠을 자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매우 매우 끔찍한 장면은 초반에 잠시 나오고, 그 다음부터는 심리묘사, 등장인물들간의 팽팽한 기싸움 같은 것들이 이어진다. 이미 우리는 많은 영화에서 그런 설정을 보아왔기에 어떻게 보면 예상했던 것보다 끔찍함이 덜 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 생각보다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찌보면 우리가 그만큼 악에 무감각해졌다고 봐야 할까, 아니, 악이 아니라, 끔찍한 장면들에 대해서)

끔찍했던 살인이 일어난 뒤, 몇 번의 사건이 더 일어난다. 이 책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사이코패스의 1인칭 서술로 진행되는 이 책은 철저하게 사이코패스의 입장에서 사건과 사물을 이해하고 진단한다. 만약, 자신의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부모님에 의해 태어났는데, 자기가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악한 사람일까?

주인공은 자기가 사이코패스인지 몰랐다. 사건이 일어나고 어머니의 일기장을 통해 기억을 되살리면서 자신의 정체를 알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이전 행동들이 그런 것에 기인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 명문대 학생이 자신의 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토막내어 버린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사건은 살인자를 면담한 심리학자에 의해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라는 책으로 소개되었는데, 이후 친지 가족들의 고인의 명예훼손에 따른 판매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져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그 사건과 종의 기원에서 다루는 남자 주인공의 환경은 다르다. 종의 기원에서는 주인공의 어머니가 아들의 상태를 알고서 그를 살리기 위해 강박적으로 모질게 대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어머니와 계속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된다.

처음에는 “종의 기원”에 대해, 살인자의 성향이 사실은 부모로부터 기인하지 않았나 하는 유전적인 요소를 생각했으나, 뒤에는 범죄라는 것이, 점점 진화해간다는 것으로 적용점을 바꾸었다. 책 전반을 통해 주인공의 사이코패스 경향도 점점 더 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종의 기원의 이론을 수용한다면, 조기 발견과 사회적 네트웍을 통해 무언가 다른 결론을 사회적으로 이끌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이코패스가 옆집에 살고 있어요. 그러니 이웃을 조심하세요, 라는 관점보다,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불편하고 읽기 힘든 책이었지만,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그렇지만 정유정의 다른 책들은 결코 읽고 싶지 않다.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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