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천재들 - 물리학의 한계에 도전하는 바다 생물의 놀라운 생존 기술
빌 프랑수아 지음, 발랑틴 플레시 그림,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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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천재들] 빌 프랑수아


한줄평 : 바닷속 비밀에 한층 더 깊이 내려간 천재적인 책.
식믈, 동물, 자연, 환경에 관심이 많아 뒤늦게 관련 도서를 읽으며 지적 유희를 즐기고 있다. 이번에는 바다다. 그것도 지금까지 내가 읽어왔던 그 어떤 바다에 관한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신선한 이야기로 가득한.

빌 프랑수아의 <바다의 천재들>은 나름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나의 바닷속 자연에 대한 지식을 모두 허물어뜨렸다. 단 하나, 심해 깊은 곳의 열수분출공에 사는 생물 이야기는 이미 다른 책에서 알고 있던 정보였는데 여기에도 소개되고 있어서 반가웠다.

문어의 자연스런 마술적 변모 이야기도 일반인에게 많이 공개되어 교양 과학에 속한 지 꽤 되었다. 하지만 여기 <바다의 천재들>에서 색깔 부분에 소개되는 것만큼 다양하고 자세하며 신비스럽게 표현한 책은 없었다. 단순히 문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색깔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는 것인데, 문어는 그 중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이었다.

저자는 바닷속 생물의 삶을 총 9개의 주제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헤엄, 수중 환경, 경계면, 에너지, 빛의 존재, 온갖 종류의 색, 지각, 건축가, 불굴의 생명.

모든 주제가 다 신선하고 놀라웠지만 가장 내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바다와 공기의 경계면에 사는 수표동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불사조처럼 계속 젊어져 마음만 먹으면 영원히 생존할 수 있는 해양 생물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가장 먼저, '물'이라는 물질에 대해 물고기들이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는지 설명한다.

작은 물고기의 관점에서 볼 때 물은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유체가 아니라,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분자들의 집단이고, 그것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작은 물고기일수록 '공'들을 밀어내기가 더 힘들기 때문에 나아가는 속도가 느려진다. 게다가 알에서 막 나와 몸길이가 수 밀리미터에 불과한 물고기에게 물은 점성이 매우 높은 물질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물고기라면 마치 끈적끈적한 꿀 속에서 헤엄치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25)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헤엄치는 것은 우리가 공기 속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자유롭고 당연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끈적끈적한 꿀 속에서 헤엄치는 느낌이 들 정도의 점성을 느낀다니. 나는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을 받았다. 정신을 단단히 붙들고 이 책을 읽어야겠구나.

저자는 처음부터 나에게 감성을 요구하며 물고기의 독립성을 안타깝게 바라보도록 한다. 물고기는 알로 태어나는데 대부분 부모 없이 홀로 생존해야 한다. 그 고독함, 그 두려움, 그 외로움, 그 떨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갑자기 아득해졌다. 물고기 한 마리 한 마리가 위대하게 다가왔다.

대부분의 물고기 알은 물속 깊은 곳에서 산란되어 물결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며 이동한다. ... 깊은 바닷속에서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은 채 태어난 새끼 물고기들은 장차 자신이 살아갈 서식지를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 그 길을 알려주는 선천적 지식이 새끼 물고기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29)

특히 해표면에서 살아가는 수표동물의 이야기는 내 관심을 크게 끌었다. 물 위를 걷는 생물로는 소금쟁이가 있고 표면장력을 이용해 물 위를 걷는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던 내게 바다 소금쟁이는 물론이고, 날치가 해수면을 뚫고, 표면장력을 뚫고 날아가는 그 힘의 법칙이나, 날치보다 8배나 더 빠르게 날아가는 빨강오징어, 그리고 하늘에서 물속으로 먹이를 잡으러 중력의 23배에 이르는 충격을 머리에 받으면서 뛰어드는 북방가넷 새 이야기는 실로 놀라웠다.

풍선 표면처럼 늘 팽팽한 바다 표면은 지구에서 가장 큰 생태계이자 가장 덜 알려진 생태계 중 하나이다. (89)

위대한 항해가가 아니더라도, 공기와 바다의 경계면이 특별한 환경이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아챌 수 있는데, 해수면은 항상 움직이고 거의 항상 밝은 햇빛이 내리쬔다. 이곳 동물들은 두 세계 사이의 경계면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들은 극단적인 법칙과 힘의 지배를 받는데, 그 법칙과 힘은 우리처럼 한 번에 한 세계에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경험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91)

날치는 바닷속에서 해수면을 뚫고 공기 중으로 나가 공중으로 날아가는데,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날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특히 아직 덜 자란 날치 새끼라면 그것은 온몸을 부딪쳐 벽을 깨는 것처럼 힘든 일이라는 것도.

물고기처럼 공기보다 무거운 동물이 하늘을 날려면, 위쪽으로 향하는 힘이 중력을 극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날치는 비행기와 동일한 원리를 이용하는데, 그것은 바로 양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날치가 하늘을 날 때 날개 위쪽을 지나가는 공기는 아래쪽을 지나가는 공기보다 속도가 더 빠르다. 그러면 날개 윗면의 압력이 낮아져 날개를 위로 밀어올리는 힘, 즉 양력이 생기고, 그래서 날치가 공중으로 떠오르게 된다. 강한 바람이 우산 위로 지나갈 때 우산이 위쪽으로 '빨려 올라가는' 느낌이 드는 것도 바로 이 양력 때문이다. (105)

너무 어린 날치는 힘이 모자라 물 밖으로 날아오르지 못한다. 표면장력으로 팽팽한 수면은 어린 날치에게는 마치 벽과도 같아서 달려와 부딪치는 날치를 튕겨낸다. 날치는 몸길이가 수 센티미터에 이르러야만 이 벽을 뚫고 나갈 수 있다. 이 단계의 작고 파란 날치를 별명으로 '스머프'라고 부른다. (107)


지느러미발도요가 요각류를 먹기 위해 긴 부리로 물방울을 삼키는 장면을 보라. 무심코 보았던 이들의 행동들 하나하나가 놀라운 과학 법칙과 맞닿아 있다. 생존을 위해 기존의 물리법칙들을 깨부수고 새로운 법칙들로 채우는 그들의 놀라운 행위 앞에 나는 경탄에 찬 눈을 한 채 깊은 책 바다속을 헤엄쳤다.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는 것은 먹이를 삼키는 순간이다. 찻잔 표면으로 올라온 찻잎 하나를 젓가락으로 한 번에 집으려고 시도해본 사람은 길이가 1cm도 채 안 되는 요각류를 부리로 붙잡으려고 하는 지느러미발도요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먹이는 미끄러지고, 부리에서 빠져나가 도망간다. 따라서 지느러미발도요는 매번 그 속에 요각류가 갇혀 있는 큰 물방울을 덥석 머금고 전체를 꿀꺽 삼키는 수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115)

색과 무늬 패턴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똑같은 무늬를 한 동물은 하나도 없는데 피식자와 포식자 사이의 무늬가 서로 일정한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러한 무늬들이 어떤 패턴 법칙에 따라 수학적 공식으로 계산된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그리고 아래 그림처럼 새끼 때 무늬와 성체의 무늬가 완전히 달라 학자들조차 전혀 다른 물고기로 알았다는 이야기는 책읽는 재미의 깊이를 앰프를 통해 스피커로 음악을 증폭시켜 듣는 것만큼이나 나를 지적으로 흥분하게 만들어주었다.

사람들은 예쁜 조개를 수집하기 시작했고, 조개들을 거래하기 시작하면서 마커스 새뮤엘의 대수집가가 나타났고, 마커스 새뮤얼이 조개라는 이름을 붙여 만든 회사 쉘(Shell)이 지금의 거대한 기업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또 하나의 덤이다.

게다가 또 사람처럼 온갖 것을 수집하는 해양생물의 이야기는 얼마나 놀랍고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그것도 자기 취향이 확실해서 한 가지 수집물만 고집하다니.

컬렉션의 이름에 걸맞은 수집품은 특정 품목에 한정되는데, 비단무늬고둥의 컬렉션도 예외가 아니다. 각각의 종이나 아종 또는 개체군은 특정 종류의 물체만 수집한다. 완전한 껍데기를 수집하는 집단, 특정 형태의 조각만 수집하는 집단도 있다. 또 홍합을 수집하는 집단, 송곳고둥만 수집하는 집단, 둥근 모양의 작은 화산암 조약돌만 수집하는 집단도 있다. 요컨대 각자 선호하는 게 다르고, 각자 나름의 취향이 있다. (274)

이렇게 다양한 해양생물과 바닷속 이야기를 읽다보니 저자의 문학적, 과학적 수준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 깨달아진다. 같은 이야기를 전달하더라도 그는 문학적인 접근법을 알고 있었다. 하나의 문장도 지식 전달용으로만 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좋았다. 교양 과학 도서이면서도 문학적 품위를 가진 책.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든 요소를 담고 있다.

비록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읽고 쓰는 리뷰지만, 반드시 그렇게 읽지 않았더라도 나는 스스로 이 책을 사서 소장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궁금해하는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것. 당신의 바닷속 지식과 교양은 바다 깊이 만큼이나 깊어지고 충분히 넘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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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파도를 분별하라 - 인공지능 시대 기독교인의 미래를 보다
신국원 외 지음 / 익투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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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파도를 분별하라]


한줄평 : 생성형 오픈AI를 신학적 관점으로 균형있게 잘 분석하고 비평한 책

챗GPT의 열풍이 거세다. 몇 년 전 회사에 있을 때 챗GPT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표는 기업 CEO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챗GPT를 아침 회의 시간에 소개하면서 자신은 그것으로 영어 회화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영어 원어민과 대화하는 것처럼 대화가 가능하다면서 직원들에게도 사용을 적극 권장했다. 그러다 정부 과제 제안서를 작성할 때 챗GPT의 도움을 받아 기존에는 하루 종일 걸리던 것을 30분 만에 완성했다며 다시 한번 챗GPT의 사용을 독려했다.

하지만 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있었다. 당시 무료버전은 2년 전 자료까지만 기계학습한 상태여서 최신 자료를 사용해야 하는 나로서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졌고, 몇 번 질문을 해 본 결과 답변이 신통치 않았다. 그렇게 어물쩍하다 나는 퇴사가 아닌 퇴직을 했고 챗GPT와는 담을 쌓고 살게 되었다.

그러다 8개월만에 다시 취직을 하게 되어 내가 근무하게 될 회사의 대표와 면접을 하게 되었다. 그때 챗GPT의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내가 거친 세상의 경쟁에서 잠시 물러나 있는 동안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상태였다. 이제는 업무에서 인공지능을 얼마나 잘 쓰느냐에 따라 업무의 속도와 질이 달라지는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 모 출판사의 <AI혁신>이라는 책 서평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생성형 AI의 모든 것을 매뉴얼처럼 알려주는 책이었고, 곧 취직하여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하는 나에게는 단비와 같은 책이었다. 나는 어떤 필터링 없이 순수하게 인공지능의 사용에만 열심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잘 활용해서 내 업무를 좀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생각을 했다.

그러다 이번에 익투스에서 펴낸 네 명의 신학자들이 각 분야별로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룬 <AI의 파도를 분별하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아, 내가 인공지능의 유용성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그것의 신학적 관점,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입장에서 무한히 증식하듯 성장하는 인공지능의 위험성은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AI의 파도를 분별하라>는 책은 기존에 매뉴얼처럼 읽었던 <AI 혁신>에 비해 크기나 분량 면에서 반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아서 금방 읽을 수 있을 것처럼 만만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첫 장을 여는 순간부터 그것은 나의 교만이요 오만임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총신대 교수님 네 명이 각자의 전문분야에서 AI를 바라보는 신학적 접근은 내가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나라 교육부는 2024년까지 인공지능 교과서를 개발하고 2025년부터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2025년에는 수학, 과학, 정보, 특수 국어 교과부터 도입한 후 점차적으로 다른 교과목도 도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이제 아이들도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공부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24)

내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나라 교육도 202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교육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렇게 된다면 이제 세상은 인공지능을 잘 사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으로 양분되는, 디지털 빈부격차가 아닌 인공지능 격차가 발생하는 세상이 될 것이었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자라날 때부터 인공지능과 함께 자라고 공부하겠구나. 생각하니 뭔가 착잡하면서도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김수한 기독교교육학 교수가 설명하는 <인공지능의 개념과 발전 현황>은 인공지능에 대한 깊이가 있었고 매우 실제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인공지능을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짚어주고 있었다. 특히 인공지능은 영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인간과 같을 수 없다는 지적은 인공지능이 과연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하는 근래의 염려를 상당 부분 해소시켜주었다.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적용된 분야보다 적용되지 않은 분야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가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고 인공지능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어야 할까요? 인공지능이 사회 곳곳에 스며들게 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25)

인공지능은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는 진정한 의미의 인식과 감정을 갖지 못합니다. 특히 크리스천인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영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분명하게 사람과 인공지능에 차이가 있습니다. 나아가 인공지능은 스스로 목적과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 인공지능은 내적 의지가 아닌 외부의 자극(프로그래밍, 센서의 감지)에 의해 지각과 행위가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과 인공지능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27)

기독교인인 우리 삶의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이 원하시는가'입니다. 개신교 장로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 모든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아무리 성공확률이 높은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멀지 않은 시기인 2036년이 되면 우리가 양육하는 아이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세상이 본격화될 것입니다. (45)

저자는 인공지능이 센서의 감지에 의해 지각과 행위가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과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지난 해 정부과제(첨단로봇)을 6개월 동안 수행하면서 느낀 것은 센서의 감지 수준이 거의 사람에 근접하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과 다른 점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은 오감의 부족이다. 촉각, 시각, 청각, 후각, 미각에 대한 기술이 인간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시각은 상당 부분 능력이 개발되어 딥러닝을 통해 사물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후각 역시 로봇코의 개발이 계속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지 결코 이르지 못할 단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더 큰 염려는 여기서 다루는 인공지능만의 문제가 아니라 줄기세포를 이용한 복제인간이 나타나고 여기에 인공지능이 탑재될 경우, 영성의 문제는 또 다른 관점에서 복잡한 양상을 띌 것이다.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앞지르는 시대를 '특이점'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자신의 책이나 인터뷰에서 특이점이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2035~2045년 사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특이점이 오면 사람이 무언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35)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 레이 즈와일의 말처럼 기술이 인간을 추월하는 시점이 곧 닥친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우리 자녀 세대에 대한 암울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이제 우리 자녀들은 기계와 경쟁을 하는 세대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기계와 경쟁을 해야 하는 시대. 수많은 직업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람보다 더 똑똑한 기계가 앉아있는 시대를 그리다보면 참으로 우울해진다.

책에서도 여러 교수님이 언급했지만 튜링테스트가 있다. 인간과 대화해서 인간이 대화하는 상대방이 로봇임을 인지하지 못할 때 기술이 사람을 능가하는 때라고 한다. 수많은 의학자료를 딥러닝한 인공지능 의사 왓슨과 수십 년 사람을 직접 진료한 의사 중에서 당신은 누구에게 자녀의 병 진단을 맡길 것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로봇 왓슨을 지목했다는 신문기사는 그저 웃어 넘길 사안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사람보다 로봇을 더 믿는 시대가 되었다.

정말 로봇, 인공지능이 설교하는 시대가 올까? 사람보다 더 성경을 잘 해석하고 설교도 더 잘하는 인공지능 로봇 시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

기독교계에서도 챗GPT에 대한 열풍이 일어나고 있고 교회나 노회, 총회의 각종 모임이나 세미나에서 챗GPT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은 필수 능력이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계에서도 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인공지능 활용 방안에 대해서 신학적, 성경적, 교육적으로 조망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53)


2장에서 신국원 교수는 <인공지능 시대의 영적 분별력>이라는 제목으로 인공지능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분별력으로 'Yes, But' 원칙을 따를 것을 제안하였다. 컴퓨터, 스마트폰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역시 하나님이 주신 선한 선물임을 지각하고 이를 수용하되 '그러나' 무엇을 위해, 왜, 얼마나,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를 꼼꼼히 따져 봐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기술도 과도하게 빠져들면 중독을 초래하고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뎃와일러는 오늘날 "기술은 세상이 더 빠르고 더 스마트하며 더 효율적으로 발전한다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드러나는 일종의 종교"가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91)

저자는 기술 진보에 대한 믿음이 드러나면 그것은 일종의 종교가 된 것이라며 인공지능의 우상화를 우려했다. 8개월만의 공백을 깨고 다시 세상으로 진출한 나는 날마다 인공지능을 이용해 업무를 수행한다. 챗GPT가 없었으면 이 일들을 어떻게다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마다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제는 인공지능에게 어떤 질문을 어떻게 잘 던지느냐에 따라 업무의 질이 달라진다.

그러나 신국원 교수는 분명하게 말한다. 인공지능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당연히 인간처럼 독립적인 의지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 없기 때문에 도덕적 책임 역시 지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지능도 인간의 것을 따라하기 어렵습니다. 이른바 '다중지능' 중에서 극히 일부를 구현할 뿐입니다. 인공지능은 자의식도 없습니다. 당연히 독립적인 의지와 감정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양심도 없기 때문에 도덕적 책임은 더더욱 질 수 없습니다. 시와 그림을 생성해내고 번역도 척척 해내지만 창작의 고뇌나 즐거움은 느끼지 못합니다. 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 분별력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98)

나 역시 지금까지 많은 그림을 챗GPT를 통해 생성해내며 내 글의 수준을 좀더 있어보이게 만들었다. 나는 할 수 없는 것을 인공지능을 1분도 걸리지 않아 완성시켜 준다. 인공지능은 고민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자유의자가 있으며 하나님의 성품으로 창조되었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인격적인 피조물입니다. 인격적 존재인 인간은 응답하고 책임을 지는 존재입니다. (103)

인공지능과 같이 강력한 기술을 반성 없이 따라잡기에 급급해서는 안 됩니다. 기술의 활용은 영적 분별력에 입각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술적 판단이 기준이 되거나 기술이 가진 매력 때문에 사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지 기술과 장비가 아닙니다. (115)

거의 날마다 인공지능을 사용하다 보면 내 인생의 주인이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공지능이 주인이 되고 내가 그 하수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이 개념이 무너질 때 우리는 또 다른 우상숭배의 영역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저자가 성경을 통해 통찰한 부분, 기술 발전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지적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

성경은 가인, 라멕, 바벨탑, 느부갓네살의 경우처럼 인간이 기술 발전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것을 경고합니다. (121)

기술에 대한 우상숭배를 끊어야 합니다. 과학기술은 선한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것만을 삶의 토대로 절대시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대신 공동의 삶과 모든 구성원을 돌보는 방안을 제시하는 진정한 '예언자적 시각을 발전'시킬 때 문화 회복의 길이 열립니다. (131)


3장에서는 김희석 교수가 <성경해석과 설교를 위한 AI의 유용성>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과 위험을 이야기한다. 내가 설교자가 아니어서 이 부분을 깊이 있게 읽지는 않았지만, 실제 챗GPT를 통한 사례가 없이 이론적인 접근으로만 서술되어 있는 부분은 조금 아쉬웠다.

저자는 구약 본문에 대하여 다양한 주석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의 답이 있는 게 아닌데 반해 인공지능은 모든 것을 종합하여 하나의 답변을 내놓는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을 설교에 활용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주석 혹은 주해 작업 곧 '구약 당시의 의미'를 찾는 과정은 기계적인 논리의 종합 이상의 개입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즉 독자가 가진 인격적 관점과 본문을 꿰뚫어 보는 종합 능력 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AI가 이런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해석을 인간 주석가가 시도한 해석의 수준으로 우리가 받아들일 것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AI를 한 인격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58)

이런 부분에서도 실제 AI를 통해 비교해주면서 설명했다면 좀더 분명하게 인공지능과의 차이점을 느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내가 한번 챗GPT를 통해 기독교 교리에 관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Q.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위격을 갖는 존재인가?

A. ChatGPT
기독교 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위격을 가진 존재로 여겨집니다. 이 교리는 삼위일체 교리로 설명되며, 삼위일체는 성부 하나님(아버지),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세 위격(Person)을 갖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신약 성경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됩니다. 이는 그분이 신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동일한 위격: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독립적인 위격을 가지신 분으로 설명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하나의 하나님이지만, 각기 독립적인 인격적 존재로 구별됩니다.
초기 기독교 공의회, 특히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이 교리가 명확히 정의되었으며, 이는 기독교 주요 교파들이 공유하는 신앙의 핵심 요소입니다.

인공지능은 자신의 의견이나 특정 주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그것을 가지고 답변을 내놓고 있다. 여기에서 내가 좀더 질문을 깊게 들어가 진화론과 창조론, 그리고 그에 대한 인공지능을 의견을 물었을 때 인공지능은 분명하게 진화론이 더 합리적인 이론이라고 답변을 내놓았다.

4장에서는 함영주 교수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인공지능을 교회에서 어떻게 신앙교육에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로봇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문화명령의 보조적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로봇이 인간의 보편적 윤리에 반하여 행동하거나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거스르는 기계적 메커니즘을 입력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로봇이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거나 로봇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일종의 과학주의적인 신념을 가지고 로봇을 활용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로봇을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 문제를 해결하는 도움의 수단으로 삼아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문화명령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보조재로 삼아야 합니다. (185)

저자는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들이 이를 자유롭게 잘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는 보조적인 작업으로서의 활용이지 언제나 모든 지식의 최상위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다음 세대들을 위해 오늘날 등장하고 있는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스마트 기기, 어플리케이션, 미디어 편집 프로그램 등의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204)

성경은 모든 지식보다 우월하며 그 지식을 해석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모든 것의 최종적 판단 기준입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높은 수준의 지식과 정보를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그 가공된 지식은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정보의 옳고 그름은 성경을 통해 판단받아야 합니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만들어내는 정보들에 대하여 성경을 통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기독교교육 교사는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정보를 맹신해서는 안 되며 학생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최고의 진리이며 모든 지식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220)

마지막에 네 명의 저자와 대담하는 부분으 부록으로 실려 있었는데, 매우 현실적이고 유익한 부분이었다. 저자가 어떤 관점에서 이 글을 집필했는지를 알 수 있었고, 다시 한번 강조해야 하는 부분들이 잘 언급되어 있어 참 좋았다. 특히 다음세대 아이들을 위한 인식은 우리가 반드시 참고해야 할 내용이다.

특별히 잘파세대(Z세대+알파세대)라고 부르는 다음 세대 아이들은 디지털,AI 네이티브인데 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나 부모는 사실 디지털 네이티브가 아니라 디지털 이미그런트(이주민)입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이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거나 디지털 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인공지능을 기독교교육에서 활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236)


인공지능도 문화의 한 부분이므로 창조 명령인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되 돌보고 가꾸는 방식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문화 명령은 다스림과 돌봄과 가꿈이 같이 가야 하는데, 현재 개발자들은 상당히 공격적입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인문학자나 신학자는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여 가꾸고 돌보는 쪽을 더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50)

인공지능으로 더 많이 편리해지고 좋아졌지만, 그만큼 생각하지 못한 부작용은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매우 심각한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을 하나님의 주신 선물로 판단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말씀에 기반하여 잘 활용하느냐, 아니면 바벨탑을 쌓아가던 그때처럼 하나님을 이기려는 마음으로 기술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느냐는 오롯이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인공지능이 세상의 프레임을 완전히 바꾸고 있는 이 때 정말 신학적인 관점에서 이를 깊숙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책을 펴낸 익투스 출판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앞으로 인공지능을 사용할 때마다 이 책에서 읽은 하나님의 관점을 잘 적용하여 내가 기술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나님의 성품으로 빚어진 자녀임을 잊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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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집사 직분자 시리즈 2
박성규 지음 / 익투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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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책을 볼 때는 그랬다. 책이 얇네.
표지를 넘기니 _____님께 _______드림. 이 나온다.
아하, 이거 교회에서 직분자들에게 선물로 주라고 만든 책인가 보다.
나쁘진 않네.
딱 이 정도 느낌이었다.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울 때 교회에서 선물하기 딱 좋은 책. 그렇다면 이런 책은 받긴 받으나 그냥 어딘가 책상 구석에서 먼지나 쌓이면서 졸고 있을 책.

그랬는데. 책을 읽어나가면서 스티커를 붙이고 밑줄을 긋는 곳이 점점 많아졌다. 아, 이거, 그냥 쓴 책이 아니구나. 박성규 목사님이 작심하고 쓴 책이구나.

사실 나는 부산의 부전교회에서 유초등부와 대학 청년부를 다녔다. 부전교회는 내 모교회다. 한병기 목사님과 신예철 목사님을 거쳐 가장 현대적인 후임 목사님으로 오셨던 분이 박성규 목사님이었다. 나는 이미 다른 지역에서 다른 교회를 섬기고 있었지만, 명절날 부산 집에 갔다가 주일이 겹치면 부전교회에 가서 박성규 목사님 설교를 듣곤 했다.

설교를 참 잘하셨다. 누구나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의 틀을 딱 가지고 계셨다. 그 설교의 틀이 이 책에서도 고스란이 느껴진다.

아니 '집사'라는 단어 하나로 어떻게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성경책에서도 집사의 직분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논하고 있지 않은데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은 기우였다. 얼마나 많은 자료와 책을 인용하며 참된 집사에 대하여 강론하시는지, 하나도 놓치거나 버릴 게 없는 책이다.

가장 먼저, 우리가 계급처럼 인식하고 있는 장로와 집사의 차이에 대해 명확하게 구분해 주신다. 장로와 집사의 차이는 은사의 차이지 결코 계급이나 직위와 같은 것이 아니다. 집사를 해야 장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젊은 시절 서리집사로 진해 모 교회에서 섬기고 있을 때 목사님께서 장로 후보로 추천하셔서 매우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목사님께서도 안수집사가 장로가 되기 위한 징검다리가 아니라고 수차례 강조하셨다.

장로와 집사는 기능과 은사의 차이입니다. … 바울은 장로가 되기 위해서 먼저 집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장로와 집사의 차이는 계급이 아닌 기능의 차이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르치는 은사와 행정의 은사가 있고, 디모데전서 3장 1~7절에 언급된 자질이 있다면 장로가 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가르치는 은사와 행정의 은사는 없지만 섬기는 일을 즐거워한다면, 집사가 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10)

그리고 집사라는 말은 명예직이 아니라 섬기고 돕는 봉사자라고 집사의 역할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집사는 명예직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집사라는 말 자체가 일을 잡고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로 집사는 '디아코노스'로서 그 뜻은 '종', '돕는 자', '식사를 돕는 웨이터'입니다. 봉사해야 진정한 집사입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봉사해야 합니다. (14)

그렇다. 집사는 봉사하는 자리이다. 리더이긴 하지만 섬기는 리더다. 항존직 집사는 평생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섬기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장립 집사는 시간과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성도를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얼마나 어깨가 무거워지는 말인가. 내가 집사로 교회를 섬긴다 할 때 그런 마음을 가지고 헌신에 임했는가, 실로 부끄러워졌다. 저자는 나아가 집사는 사무(四無)의 삶이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 뜻이 없어야 하고, 자기 돈이 없어야 하고, 자기 자식이 없어야 하고, 자기 생명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것이 바로 이런 사무의 삶이라고 하는데, 정말 오싹했다. 나는 정녕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

저자는 카일 아이들만 목사님이 쓴 <거짓 신들의 전쟁>을 인용해 현대인이 음식의 신, 섹스의 신, 오락의 신, 성공의 신, 돈의 신, 성취의 신, 로맨스의 신, 가족의 신, '나'라는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왜 사무(四無)의 을 살아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찬송하지 않으면 예수님과의 유기적 관계, 생명의 연합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더라도, 그때 주신 감동에 순종하지 않으면 유기적 관계, 생명의 연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28)

또한 참된 집사는 예수님과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이를 통해 생명의 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는데, 유기적 관계가 되려면 말씀, 기도, 찬송이 필연적이다. 이를 등한시하고 교회 봉사만 한다고 하면 이는 참된 집사의 모습이 아니다. 겉으로는 헌신적으로 보일지라도 영적으로 그는 부패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언젠가 그는 상처를 주거나 받거나 떨어져 나갈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부분은 집사의 출발점과 종착점에 관한 부분이다. 저자는 집사의 출발점은 가정이어야 하며, 종착점은 자신의 일터라고 말한다. 그래서 출발점인 가정에서 본을 보이지 않으면 그는 실패한 집사가 된다.

집사 사역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어디일까요? 우리는 교회에서만 집사로 살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사의 출발점은 가정이며 교회를 거쳐 일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즉 집사 사역의 종착점은 일터(직장, 사업)입니다. 가정과 일터에서 집사답지 못하다면 그의 사역은 반토막 사역이 될 것입니다. (144)

그러면서 집사가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영적으로 돌보는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무너지고 만다고 경고한다. 그 부분을 읽는데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정말 가장 필요하고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가정과 분리된 집사의 모습은 참된 집사가 아니다. 나 역시 어린 시절, 교회에서의 모습과 집에서의 모습이 다른 부모님 때문에 한창 방황을 하고 심지어 교회를 떠날 생각까지 했었다. 그만큼 가정에서 본이 되는 모습이 중요하다.

가정에서 아내를 섬기고 자녀를 섬겨야 합니다. 그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가정의 제사장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고 교회에서만 집사의 사역을 하는 것은 사상누각과 같습니다.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자신이든, 아내든, 자녀든, 누군가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149)

우리 모든 성도는 이 땅의 청지기다. 하나님께서 집사의 직분을 주셨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 속에서 언제나 그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 평생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와 므나를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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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권사 직분자 시리즈 3
박성규 지음 / 익투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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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총신대 총장으로 부임하신 박성규 목사님의 저서 중 <참된 집사>에 이어 <참된 권사>를 읽었습니다. 큰 틀에서 <참된 권사>는 "참된 집사" 책의 구성을 따르고 있습니다. 참된 권사는 교회의 리더라는 입장에서 보면 참된 집사와 크게 다른 품성은 없습니다. 성도들을 권면하고 가르치는 리더의 자리에 있습니다.

권사는 말 그대로 권할 권, 스승 사이기에 성도들을 잘 권면하고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영어로도 권하는 사람(exhorter)이라고 합니다. (64)

영국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가 권사직을 만든 것은 주로 교인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장로교의 권사는 목회자를 도와 교인들을 심방하며 위로하고 돌보기 위해 세운 직분이고, 실제로 아주 유익한 직분입니다. (65)

그리고 무엇보다 자라나는 청소년 세대에게 본이 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특히 자녀에게 더욱 그러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교회에서는 웃으면서 성도들에게 인사하고 인자한 모습을 보이다가 집에만 오면 호랑이로 돌변했던 어머니를 보며 많은 좌절을 경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그런 생활을 할 거면, 왜 교회를 가는지 모르겠다며 많은 방황을 했습니다. 권사는 어머니로서 자녀에게 성도의 본을 보여야 하며, 교회 스승으로서 청소년 자라나는 세대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청소년 세대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모델링 엘더스(Modeling Eleders)로서 신앙 형성에 기성세대를 모델링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기성세대의 신앙이 모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권사는 청소년들에게 모델이 되는 성도입니다. (56)


권사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집사가 초대교회에서 구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세워진 것처럼, 권사직은 후대 교회에서 필요에 따라 만든 것입니다. 책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권사'라는 용어가 1910년 제4회 독노회 회의록에 처음 등장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권사의 역할을 한 사람들을 예로 들어 권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우선 성경 속에서 지금 권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역할과 비슷한 성도들을 가려 뽑아 소개했습니다.

교회 개척의 동역자였던 루디아. 바울이 로마서를 맡겨 전달하게 할 만큼 신뢰했던 서신 전달자 뵈뵈, 목회자의 어머니 역할을 한 루포의 어머니 등이 그러한 인물입니다. 특히 저자는 목회자가 힘들 때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목회자를 격려하고 도와주는 권사의 역할로 루포의 어머니 같은 권사님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참 감동적인 표현입니다. 루포의 어머니가 바울 사도를 친아들처럼 대했다는 것입니다. ... 오늘도 목회자들은 힘겨운 목회의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악한 영들은 끊임없이 목회자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할 떄 목회자보다 경험이 많고, 연륜이 깊은 권사가 목회자를 따뜻하게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목회자는 힘을 내어 사역을 더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79)

다음으로는 한국 교회사에 등장하는 권사와 같은 사역자, 그리고 저자가 직접 경험한 존경하는 권사님들을 소개합니다.

과부였던 백선행 성도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교회를 짓고, 학교를 세우고, 장학재단을 설립했습니다. 백 과부라 불렸으나 그의 선행으로 그녀는 백선행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불리어졌으며, "돈이란 써야 돈값을 하지, 쓰지 않으면 돈값을 못 한다."며 세상의 돈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86세로 세상을 떠날 때 그녀의 재산은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총회 헌법에 따르면 권사는 당회의 지도 아래 교인을 방문하되 병환자와 환난을 당하는 자와 특히 믿음이 연약한 교인들을 돌보아 권면하는 자입니다.

저자는 특히 B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초기에 교회 청년들이 여름에 밀양에 갔다가 한 청년이 물에 빠져 숨지는 사건이 발생해 40대 젊은 목사로 감당하기 힘들었던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시는 어머님 권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권사님, 어떻게 하면 좋아요," 차를 타고 가며 전화를 받으신 B 권사님의 목소리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제 귓전을 때립니다.
"목사님, 이제야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것 같습니다." (107)

저자는 그 권사님의 놀라운 신앙고백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아들을 보러 현장에 달려가면서 받은 전화기에 대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의 고백은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었으면, 아들을 잃은 슬픔을 저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성경을 분석하면서,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권사님, 사역자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보호하는 권사님들을 보여주십니다. 교회 오래 다니고 나이가 들면 자연히 권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내어 놓고 목회자와 동역하고 교회 성도를 섬기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저도 장로요 아내도 권사입니다.
교회에서 큰 중직자로 섬긴다 하면서, 내 앞길이 바빠 교회와 사역자를 섬기는 일에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하늘에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주신 사명 귀하게 받아 헌신하며 에너지를 주를 위해 소진하길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 여 성도님들 모두 참된 권사로 거듭나는 성도님들이 되길 기도하며 책장의 마지막을 덮었습니다. 지금도 모두 다 잘하고 계십니다.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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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에 우산
김명희 지음 / 한사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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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희 시집 <꽃밭에 우산>

인간은 모두 시인으로 태어난다.
태초의 시작도 말씀이었듯이.

인간은 모두 시인으로 태어난다.
생각의 결은 언어와 문자로
곱게 빚어진다.

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시는
눈에 보이는 믿음이다

김명희 시인의 시집 <꽃밭에 우산>은
눈에 보이는 기도
눈으로 읽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준다.

김명희 시인의 첫 독자였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과 이별하자
시인의 시는, 그제야 빛을 찾아
세상으로 나아왔다.

클로드 모네의 그림 속에서
우산을 쓰고 있는 꽃들을 보면서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해주는
믿음의 실체를 확인한다.

1부 "회복"을 시작으로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리움을 안고,
다시 만날 소망을 안고,
견디며 치유해나가는지
그 마지막 여정까지 따라가다 보면
"색색으로 등불 밝히는" 마지막 길에 이른다.

시인의 마음까지 고스란히 드러낸
예쁘고 고운 시집.

가을인데 여전히 춥고 시리다면

<꽃밭에 우산> 하나 펼쳐들길.
내 마음 우에 펼쳐진 색색 우산
내 마음도 이미 물들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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