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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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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여성의 인권은 백년 전에 비해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중동 어느 나라에서 여전히 여자들이 이혼을 했다는 이유로 친형제에게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질 때, 동유럽을 여행하는 여학생들이 납치되어 인신매매를 당할 때, 대한민국에 소라넷이라는 사이트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될 때. 페미니즘은 여전히 유효하며, 우리는 여전히 암흑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역사를 들춰본다. 그리고 거기에서 암흑보다 더 짙은 어둠을 발견한다.

   '그들'은 1937년부터 시작한다. 모린의 어머니 로레타가 열여섯이던 시절. 디트로이트 외곽의 빈민가에서 가난과 폭력으로 얼룩진 삶 속에서도 낙관적인 미래를 꿈꾸는 한 소녀에게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채 50페이지도 지나지 않아, 그녀의 미래는 부서져 내린다. 로레타는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돈을 가지지도 않았다. 기분이 상하면 옆에 끼고 걷던 여자의 얼굴을 칼로 아무렇지 않게 그어버리는 남자들이 활보하는 동네에서 그 사실은 그녀를 더없이 약하게 한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위해 거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남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로레타는 몸을 주고 결혼을 한다.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이야기는 세대를 건너 그녀의 아이들에게로 이어진다. 모린과 줄스. 그들의 삶이라고 더 나을 이유가 없다. 하나 달라진 게 있다. 모린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를 악물고 발버둥친다. 좀 더 사람다운 삶을 위해, 깨끗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이상 남자들의 손에 모든 걸 잃는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 그녀의 부단한 노력은 종종 벽에 부딪히고, 가족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지만 그래도 모린은 벗어나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작가를 통해 세상에 이 이야기를 전한다. 너무 멀지 않은 과거에 실재했던 어느 끔찍한 이야기를. 실제 이 세상에 살았던, 혹은 아직도 살아있을 개인들이 살아낸 역사를. 그 이야기는 무섭도록 생생해서 어떤 악의에 찬 범죄소설보다도 진득하게 기억에 달라붙는다. 이건 모두 실제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린, 너도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야?"

   끝끝내 모린을 찾아낸 줄스가 현관에 서서 묻는다. '그들'을 떨쳐내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모린의 악착같은 노력을 비웃듯이. 결국 너도 그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너의 인생도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비웃는다. 그 질문에 대해 모린은 입을 다문다. 여동생의 아픈 과거를 들쑤시며 마지막 상처를 남긴 오빠 줄스는 영원히 떠나 그녀를 자유롭게 하지만, 아마 모린에게 지울 수 있는 기억은 없었을 것이다. 먼 훗날 야간학교에서 만난 오츠에게 털어놓게 될 만큼, 그 이야기들은 그녀 안에 똬리를 틀고 지키며 언제나 머물렀을 것이다.

   그녀는 줄스의 말처럼 '그들' 중 하나였을까? 그런데 '그들'이 대체 누구일까? 모린의 어머니, 외삼촌, 베티, 줄스. 그들을 '그들'로 만드는 게 무엇이기에? 1967년의 폭동, 디트로이트. 그 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는 중요한 무언가를 공유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언제나 '우리'가 아닌 '그들'이 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서로 닮은 사람들이었다는걸.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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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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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신간목록에서 발견했을 때부터 신간평가단과는 상관없이 꼭 읽겠다고 다짐했던 책이었다. 주제 사라마구는 그런 작가다. 그 이름만으로 새로 쓴 소설이 어떤 주제의식을 담고 있고 어떤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분량은 어느 정도고 번역상태는 어떤지 고민할 필요 없이 책을 선택하게 만드는 작가. 200페이지 정도의 얄팍한 두께였던 이 책은 얼핏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작가의 성향을 생각했을 때, 그리고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을 통해 구약을 새롭게 조명한다는 소재를 고려했을 때 결코 쉽게 읽힐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갔던 것은 구약성서에 기초한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워서였고, 그를 풍자하는 사라마구의 신랄한 어조가 시선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덮는 게 아쉬워지는 종류의 책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전국 방방곡곡의 절에 기와를 얹고, 숙모 혼자 꿋꿋이 성당에 예배를 다니며 나머지 가족 모두가 종교적인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던 집에서 엄마는 혼자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가족끼리 예배에 가는 게 소원이었다는 엄마는 성경을 좋아했다. 틈만 나면 창가에 앉아 돋보기를 콧등에 얹고 낡아서 책장이 반들반들해진 대학 시절의 성경책을 넘겨보곤 했다. 비슷하게 성경 읽기를 좋아하면서도 난해한 디테일과 흐름을 끊는 고어체에 자주 좌절하던 나는 언젠가 엄마에게 뭐가 그리 재밌어서 끈덕지게 읽는거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엄마가 한 대답은 성경은 역사야, 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특정한 방법으로 쓰여진 한 민족의 역사이고, 그 민족이 자랑스러워하는 조상들의 일화이고, 어떤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기록이라고. 그래서 (돌이켜보면 늘 역사에 매료됐던) 엄마는 성경을 좋아했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꿰고 있을 딱 그만큼은 읽었어도 격동의 사춘기를 거치며 간혹 언급되는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문장들에 거부감을 느껴 성경을 멀리하게 되었지만, 엄마는 늘 꿋꿋했다.

   사라마구의 '카인'을 읽으며 엄마의 말을 다시 되새겼다. 이 책은 구약의 서사적 측면에서 줄거리를 따온다. 아우 아벨을 살해한 죄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게 되었다는 아담과 하와의 장남 카인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방랑하며 성경 속 사건들을 목격하고, 경험하고, 성찰하는 이야기. 분명 비현실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지만 성경 자체가 신과 천사가 등장하는 판타지 장르라는 걸 생각했을 때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설정이다. 카인은 노아를, 아브라함을, 여호수아를, 그리고 욥을 만나고 소돔과 고모라의 몰락, 바벨탑의 혼돈, 노아의 방주와 40일간의 비를 경험한다. 그 만남에서 카인은 자신들을 창조한 신이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카인의 시선을 통해 사라마구는 구약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면모를 꼬집는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이 얼마나 경악스러운 명령인지, 충직한 욥을 두고 사탄과 내기를 한 것은 결국 악마와 다를 바 없는 일이 아니었는지, 소돔과 고모라의 죄없는 어린아이들까지 죽일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묻는 카인을 통해, 성경 속 하나님은 지금껏 없었던 논리적인 비판에 직면한다.

   이렇게만 보면 사라마구의 '카인'은 신성모독이다. 실제 그럴지도 모른다. 실제 많은 기독교 단체들은 이 책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그저 자신의 변덕으로 사람의 목숨을 흔들고 못하는 일이 있어 인간에게 거래를 제안하며 때로는 유치한 고집을 부린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라마구가 겨냥하는 신이 '구약성서 속의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이 책 어디에도 실제 어딘가에서 인류를 지켜보고 있을 하나님에 대한 비판은 등장하지 않는다. '카인'은 철저하게 구약에 산재한 증거들을 토대로 하여 구약이 묘사하는 하나님의 문제점들을 공격한다. 그리고 몇 천 년 전 쓰여졌다는 책 속 하나님의 모습은, 결국은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성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기득권층의 신념을 투영한 모습인 것이다. 여자를 하찮게 여기는, 동성애를 죽음으로 벌해야 하는 죄악으로 여기는, 전쟁에 열광하고 학살에 환희하는 모습들은, 아마 하나님보다는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과 더 닮아있을 것이다.

   굳이 지금 이 책이 쓰여진 이유는 뭘까? 구약성서에 때로는 읽어내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기록을 남긴 인물들은 지금은 죽고 없는데 말이다. 글쎄, 적어도 21세기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그건 하나님을 자기 입맛에 맞게 형상화하고 자기가 원하는 모습대로 믿으며 그로 인해 권력을 취하려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했을 때 결국 욕되는 것은 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어쩌면 단 한번도 악하지 않았을 신을 추악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늘 인간이다. 오직 인간의 탐욕만이, 인간의 이기심만이 그런 힘을 가진다. 사라마구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책에서 남긴 강렬한 비판은, 그런 인간을 향한 것이 아닐까.


신을 위하여

 

   주제 사라마구가 '카인'에 녹여내는 의심은 사실 성경을 열심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봤을 법한 것들이다. 욥은 죄를 짓지 않았는데 왜 재산도, 자식도, 건강도 잃어야 헀던 걸까? 소돔과 고모라에 살던 사람 중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아이들은 왜 구원받지 못했을까? 신약의 예수님은 늘 용서와 사랑을 말하는데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죄 지은 자들은 왜 늘 잔인하게 죽임당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영원히 죽지 못하는 운명을 얻음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된 카인은 당당하게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나님에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따져 묻는다. 당신이 정말 우리를 사랑한다면 이럴 수 있는 거냐고. 전지전능한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는데 이 세상에는 왜 전쟁이, 가난이, 미움과 악의가 존재하는 거냐고. 왜 당신은 그토록 추악한 것들을 창조하여 당신이 사랑한 피조물들을 괴롭히는 거냐고.

   이 책의 신은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때로 신도 완벽하지 않다 인정하고, 자신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큰소리치고, 어떨 때에는 슬그머니 논쟁을 피하기도 한다. 그래서 카인이 만난 신이 정말 어떤 존재였는지, 선했는지 악했는지, 누구도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어쩌면 신은 그냥, 관망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채 조용히, 모두를 굽어보는 존재. 그 신이 자신에게 계시를 내렸다고, 혹은 자신을 버렸다고, 혹은 자신들만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다. 그 인간이 파를 나누고 나와 다른 이를 미워하며 차별을 조장하고 때로는 피를 보고야 만다. 어쩌면 가장 선한 신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에게 공평한 신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때로는 기쁨을 누리고 때로는 어려움을 헤쳐나가도록 가만히 두는 신. 그 어떤 이도 신의 권력에 부당히 기대어 다른 이들을 착취하지 않도록 때로는 가차없이 쳐내는 신. '카인' 속 하나님은 그러지 못했지만 내가 믿는 신은 부디 그러기를 바라며 책을 덮었다.


'카인' 들여다보기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모든 사람이 노아의 자식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처음에는 정당한 의심과 수군거림, 또 그 이상의 것들이 넘쳐나겠지만, 모든 것을 평평하게 다듬는 위대한 존재인 시간이 곧 그것들을 다 쓸어버릴 것이고, 미래의 역사가들은 공을 들여 이 도시의 연대기에서 아벨, 또는 카인, 또는 이름이 뭐든 어떤 진흙 밟는 자에 대한 언급을 지워버릴 터였다. 의심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를 망각으로, 영원한 격리 상태로, 왕조들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이야기되지 않는 것이 좋을 그 사건들의 림보로 보내버리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역사적이지는 않을지 모르나, 그 역사가들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 또 어쩌면 얼마나 악의가 있었는지 보여준다. 카인은 실제로 존재했고, 노아의 부인에게서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 pp. 84-85


   아예 안 오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오는 게 낫다, 천사는 대단한 진리라도 말하는 것처럼 으스대는 표정이었다. 바로 그 점이 틀린 거요, 아예 안 오는 것은 늦게 오는 것의 반대말이 아니오, 늦게 오는 것의 반대말은 너무 늦게 오는 거요, 카인이 반박했다. 천사가 중얼거렸다, 어이구 이런, 합리주의자로군.

- p. 96


   오랜 세월 뒤 사람들은 거기에 운석이 떨어졌다고 말하게 된다. 천체, 우주의 허공을 떠도는 수많은 천체 가운데 하나가 떨어졌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바벨의 탑이었으며, 여호와가 자존심 때문에 완성을 허락하지 않은 탑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오해의 역사이니,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pp. 105-106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우연히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이야기를 했던 곳에서 잠깐 발을 멈추었고, 그때 카인이 말했다,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아브라함이 물었다. 불에 타버린 소돔과 다른 도시들에도 틀림없이 죄 없는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여호와가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내게 하신 약속을 지켰겠지요.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카인이 물었다, 아이들은 틀림없이 죄가 없었을 텐데요. 맙소사, 아브라함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신음 같았다. 그래요, 노인장의 하나님일지는 모르나 그 사람들의 하나님은 아닌 거지요.

- p. 117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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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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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록 속 스웨덴 여자


   모잠비크의 수도 마푸토에 보관되어 있던 식민시대의 여러 문서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스웨덴 여성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매음굴을 운영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헨닝 망켈은 이 단순한 사실에 살을 붙이고 생명을 불어넣어 한나라는 인물을, 그리고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보냈던 짧지만 강렬한 몇 년을 창조해낸다.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불안한 낙원'이다.

   한나는 스웨덴의 산골짜기에서 매일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집의 첫째로 자란다. 가난이 익숙하고 추위가 일상적인 그 곳에서,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도시로 보내겠다고 결정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모든 일이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듯. 이따금 산골짜기를 지나던 부호 포르스만의 썰매에 올라 순드스발로 향한다. 그 곳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계획대로 친척을 만나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포르스만의 저택에서 하녀로 일하며 새로운 인생을 얻는 듯했다. 친구가 있고, 익숙한 업무가 있고, 가끔씩 좋은 옷을 입고 시내에 나가 젊은 남자들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웃어버릴 수 있는 일상을.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1904년 포르스만의 소개로 선상 요리사가 되어 로비사 호에 오르며 다시 한번 파도를 탄다. 한나를 어디로 떨어뜨릴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파도를.

   한나는 로비사 호에서 룬드마르크를 만나고, 한나 룬드마르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망인이 된다. 1935m의 깊이에 남편을 묻고 한나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아프리카 어딘가의 부두에서 배를 내린다. 그리고 파라다이스 호텔에 숙박한다. 그녀의 인생을 다시금 되돌릴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갈 곳, 겉으로만 호텔로 치장한 아프리카 최고의 매음굴에서.

   그렇게 한나는 아프리카에 오고, 세뇨르 바즈와 그가 고용한 흑인 매춘부들을 알게 되고, 두번째 결혼을 하고, 로우렌소 마르케스에서도 손꼽히는 부자가 된다. 저녁에 먹을 게 있을지 걱정했던 때에서 채 2년이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남아프리카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재산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동시에 남편의 죽음과 함께 그녀는 매음굴의 여주인이 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한나는, 아니 이름을 바꾼 아나는 아프리카에서 흑인 여자를 위해 싸우는 첫 백인이 된다. 백인들의 비난과 흑인들의 침묵 속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양쪽에 한 발씩을 걸친 채 살아야 하는 삶. 그 삶에서 자유롭기 위해 떠나는 마지막 여정을 끝으로 한나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자유를 향한 여정


   그녀의 이야기는 그토록 단순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지만도 않다. 1904년에서 1905년까지 한나의 일기장을 통해 남아있는 기록은 한나가 살아간 하루하루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그녀의 내면에 일어났던 변화, 그녀가 느꼈던 감정, 그녀가 아프게 깨달았던 진실, 그리고 그녀가 관찰했던 사람들에 대한 진술이다.

   처음 로우렌소 마르케스에 도착한 한나는 혼자다. 남편은 죽었고 배는 떠났으며 아프리카에는 아는 사람은 물론 제대로 말이 통하는 동향조차 없다. 그런 그녀에게 아픈 그녀를 정성스레 돌보아주는 라우린다와 펠리시아는 고마운 은인이고 서투른 포르투갈어로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된다. 그러나 곧 매음굴의 주인인 세뇨르 바즈와 한나를 돌보도록 파견된 백인 간호사 아나 돌로레스는 한나에게 백인과 흑인의 차이를, 그 차이를 결정짓는 질서를, 그리고 그 질서에서 파생되는 일련의 행동지침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벤치에서 잠든 흑인 노인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자리에 앉는, 서슴없이 매음굴의 여자들을 때리는, 흑인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며 증오와 냉소를 숨기지 않는 아나 돌로레스에게 한나는 처음에는 환멸을 느낀다. 흑인에 대한 비뚤린 시각과 이유 없는 증오를 이해하지 못해 당황한다. 그러다 곧 아프리카의 백인들을 점차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끔찍함에 몸서리친다. 어느새 자신 역시 흑인들에게,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바로 그 사람들에게 잔인해지고 있음을 깨달으며 한나는 아프리카에 존재하는 질서가 부조리하고도 강력함을 몸소 체험한다.

   그러나 한나는 다른 백인들처럼 그 질서에 몸을 맡기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흑인과 백인 모두를 바꾸기 위해 분투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함에도, 그래서 뼛속까지 외로움에도 한나는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그리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한나는 베이라의 빈민들의 모습에서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시절을 본다. 매음굴의 흑인 매춘부들이 유산하거나 낙태한 아기들을 묻은 나무 아래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허락되지 않았던 자신과 룬드마르크의 아이를 떠올린다. 백인 남편을 죽인 죄로 감옥에 갇힌 이사벨을 보며 자신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기에 그녀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음을 직감한다. 그렇게 한나는 누구와도 다른 사람이 되고,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불안한 낙원'은 아프리카에 관한 이야기이다. 백년 전 그 곳에서 일어났던 끔찍했던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자, 지금도 현존하는 폭력에 대한 고발이다. 동시에 이 소설은 하나의 사회질서로 굳어진 증오와 공포 앞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삶을, 그리고 그 삶을 바꾸는 힘을 향한 간절한 응원이기도 하다. 아프리카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래서 글을 통해 아프리카의 고통을 고스란히 비춰내고자 했던 헨닝 망켈. 그가 전하고자 했던 건 광기 어린 피의 역사가 아닌, 마룻바닥 속 일기장처럼 고요히 묻혀 있던 희망이 아니었을까.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로우렌소 마르케스의 백인과 흑인은 서로 다르다. 백인들에게 흑인들은 주술적 사고에 사로잡힌 미개한 민족에 불과하고, 흑인들은 실존하는지도 모르는 땅속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는 백인들이 허황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한나에게는 흑인들에 대해 이유 없는 미움과 분노를 내보이며 끔찍한 짓도 서슴지 않는 아나 돌로레스도 치가 떨릴 만큼 싫은 존재지만, 아무리 대화를 오래 지속해도 끝끝내 평행선을 유지하고야 마는 펠리시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한나는 매음굴을 정리하며 매춘부들에게 5년 수입에 해당하는 넉넉한 금액을 보상하면 그들이 가족에게 돌아가 다른 삶을 꾸릴 것이라고 믿는다. 반면 매춘부들은 그 돈을 받지 않겠으며 어디든 따라가 한나가 새로 여는 매음굴에서 몸을 팔겠다고 주장한다. 오랜 기간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영위했던, 판이한 삶을 살아온 두 집단의 만남은 결코 쉽게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남긴다. 그리고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은 침묵이다. 때때로 침묵을 깨고 울리는 음성은, 온통 거짓을 말할 뿐이다.

   한나는 그 침묵이 두려움임을 알아차린다. 백인들도, 흑인들도, 온통 서로를 두려워한다. 낯선 존재를, 그 존재가 휘두르는, 혹은 휘두를지 모르는 낯선 종류의 폭력을. 유럽인들이 스스로 발견했다 의심치 않는 대륙, 그러나 그 이전에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오랜 시간 살아오며 삶을 일궈왔던 대륙에 자리잡은 공포를 한나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삶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삶을, 그렇게라도 살아남고 싶었던 삶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애쓴다. 로우렌소 마르케스를 떠나는 날까지 한나에게는 제대로 된 친구가 없다.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한나는 자신과 그들의 간극이 영원히 매워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와는 조금 멀리 있는 너를, 그대로 알아주겠다 말한다. 그런 마음으로, 그녀는 그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조화와 화합은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끝끝내 불가능한 순간도 있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은 때로는 죽을 때까지 서로 다른 삶을 살기도 한다. 백 년 전 아프리카의 백인과 흑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그것을 잘못이라 낙인 찍고 그 간극을 좁히지 못하는 서로를 미워하고 또 두려워했다. 처음에는 마찬가지로 그 빈틈에 빠져 괴로워하던 한나는 떠나는 순간에는 다르다는 것 자체를 인정한다. 그것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다르지만,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서로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에 남는 문장들

 

   그녀는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세뇨르 바즈의 눈빛에서 발견한 두려움에 관해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서는 그런 두려움을 보지 못했었다. 스웨덴에도 물론 상류층이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여기는 모두가 두려워했다. 다만 백인들은 침착과 자기절제, 또는 사전 계획된 분노의 폭발 같은 가면 뒤에 두려움을 감출 뿐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왜 두렵지가 않지? 두려워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일까? 완전히 혼자여서?

- pp. 160-161


   처음에는 한나도 흑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세뇨르 바즈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차츰 그 주장은 백인들에게도 인도인들에게도 아랍인들에게도 모두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식은 다를지 몰라도 어쨌든 모두가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거짓말과 위선 위에 세워진 나라에 살고 있었다.

- p. 208


   "그런 건 걱정거리도 못돼요. 흑인들이 뭘 할 수 있어서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들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있어요."

   처음으로 그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뭔데요?"

   "그들의 숫자요."

   그는 그녀의 대답에 실망한 눈치였다. 그녀가 뭔가 엄청난, 자신은 생각하지 못했던 기발한 대답을 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단순히 숫자가 많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아요." 그가 성급하게 말했다. "결코 현실이 되지 않을 악몽인 거죠. 숫자가 많아질수록 그들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될 거예요."

   "저는 신경이 예민한 유형은 아니에요. 보이는 것을 보고 들리는 것을 들을 뿐이죠."

   "들리는게 뭔가요?"

   "침묵이에요. 부자연스러워요."

- p. 228


   열여섯쯤 되었을 소년은 문간에 멈춰 섰다. 숨을 죽인 모습이었다. 나랑 비슷하구나, 한나는 생각했다. 저 아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문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저 아이 속에서 내 모습이 보여.

- pp. 293-294


   나는 백인들이 스스로와 흑인들을 기만하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하는 흑인 세계에서 살고 있어,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은 이곳 사람들은 백인 없이는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흑인들은 돌과 나무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열등한 인종이라고 생각해. 반면에 흑인들은 어떻게 신의 아들을 모질게 학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지. 그리고 백인들이 심장이 곧 멎어버릴 만큼 늘 바쁘게 움직이며 부와 권력을 향한 끝도 없는 추구에 휘둘리는 걸 보고 놀라기도 해. 백인들은 삶을 사랑하지 않아. 대신 시간을, 언제나 부족하기만 한 시간을 사랑해.

- p. 403


   그 순간 아나는 주변의 모든 것이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목가적 풍경처럼 느껴졌다.

   그건 불안한 낙원이었다.

- p. 407


   하지만 며칠 후 흑인 동네들을 되풀이하여 방문했을 때 그녀의 눈에 새로운 것이 들어왔다. 이 극빈자들에게서 삶에 대한 뜻밖의 갈망이 엿보인 것이었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즐거움조차 하찮아하지 않고 두 팔을 벌려 움켜쥐었다. 나눌 것이 전무한 상태에서도 서로 돕고자 했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이 모든 빈곤과 불결의 표면을 파고 들어가면 발견할 수 있었던 것들을 일기에 적어보려 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이 불가해한 가난의 한가운데서 나는 풍요의 섬들을 볼 수 있다. 존재할 수 없었을 행복, 살아남을 수 없었을 온기. 이것을 통해 온갖 부와 안락에 파묻혀 사는 백인들의 또 다른 종류의 가난을 나는 볼 수가 있다."

- p. 454


written by. 가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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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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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라니, 작가 이름만 보고도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나를 보내지 마'로 처음 접했던,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정교하게 구성된 세계관과 담백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문체,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묵직한 메시지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호평을 받아온 영국 현대문학의 거장이다. 그가 고대 영국의 대평원을 배경으로 그리는 서사적 이야기라니, 그 자체만으로도 기대가 되었다. 비록 기사가 나오는 고전적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 아서왕 이야기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지만 이 작가가 재구성한 세계라면 어쩐지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파묻힌 거인'이 발매되었을 때 바로 손이 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번역본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작가의 영어 문체를 좋아했고, 이왕이면 그 문체를 오롯이 느끼며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과연 번역본이 원작의 느낌을 온전히 담아냈을지 걱정도 되고 의심도 들었다. 막상 읽어보니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은 훌륭했고 작가 특유의 담담한 문체도 잘 살려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치밀하게 계획했을 인물들이 그 모습 그대로 살아 숨쉬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된 지도조차 없는, 골목의 갈림길로 기억을 더듬어 이웃마을을 찾아가야 하는 고대 영국의 대평원에 한 부부가 있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브리튼족이 굴을 파고 사는 마을에서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놀림감이 되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만은 지극하다. 액슬은 여전히 비어트리스를 공주라 부르고, 이른 새벽 일어나 불을 피울 수 없는 방안에 스며드는 햇살 한 줄기가 아내의 얼굴을 비출 때 행복감에 젖는다. 두 부부를 고민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 망각이다. 망각은 비단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온 마을을 망각의 안개가 덮고 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온 평원을 덮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과거의 일을 잊은 채 현재를, 자욱한 안개 속 고립된 섬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런 생활에 두 사람도 안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전에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고, 때로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이 언젠가는 진실이었을 거라고. 짧게 스쳐가는 과거의 순간들 속에서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다 자란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그 아들을 찾아 먼 여정을 떠난다.

   다분히 클리셰적인 표현이지만, 두 사람의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이 아닌 과정이다. 아들을 찾아 떠난 여행이지만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사건들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들은 한 조각씩, 잃어버린 과거를 모아나간다. 그렇게 비로소 손에 넣은 과거의 정체와 상관없이, 그 끝에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놓치 않는 부부의 모습은 이 책에서 가장 큰 여운을 남긴다.

   책의 초반에 등장하는 장면인데도, 여행을 떠나 첫 마을에 닿기도 전 비를 피하기 위해 폐가에 몸을 피한 비어트리스와 액슬의 모습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 부부는 그 곳에서 뱃사공을 만나고, 강을 건너 섬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사랑하는 연인들, 혹은 부부들은 함께 그 곳에 다다르지만 섬으로 건너가는 배에는 오직 한 명만이 탈 수 있다. 부부 혹은 연인이 함께 갈 수 있는 건 오로지 두 사람의 사랑이 진실할 때 뿐이다. 그리고 그 진실을 확인하는 방법은 두 사람이 각자 가지고 있는 기억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그리는 두 사람의 기억이 일치할 때, 두 사람에망게는 함께 섬으로 가는 자격이 주어진다. 뱃사공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서 나오는 길, 비어트리스는 액슬에게 묻는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우리는 계속 사랑해왔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우리는, 함께 섬에 갈 수 있냐고.

   망각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모든 걸 기억하는 인간은 결코 살아갈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다. 삶에서 도무지 견뎌낼 수 없는 고통에, 슬픔에, 분노에 맞닥뜨릴 때 우리는 망각의 이불을 덮고 깊은 잠을 청한다. 그리고 그 힘으로 또 일어나 살아간다. 그러나 그 망각이 삶의 소중한 이들을, 행복했던 기억들을 함께 덮지는 않는다. 전부 파묻었다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 마음은 거인처럼 남아 거기에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을 떠올리며 책을 덮었다.


written by. 가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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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스트레인저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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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대전 이후 점차 몰락해가는 영국 귀족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들. 그 설명만으로도 '리틀 스트레인저'는 이미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귀신이나 초자연적 현상에는 담담했지만 현실적인 공포에는 취약한 사람이었다. 수없이 많은 방이 있어 한 집에 있으면서도 누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는 대저택은 기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꺼려지는 소재였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선정되어 배송된 이 책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던 건, 이야기의 흐름이 궁금해서였다. 전후 시대의 몰락하는 귀족과 함께 쇠락하는 대저택이라면 사실 배경은 뻔하게 느껴졌다. 책 뒷면의 추천사만 읽어도 소설의 화자인 닥터 패러데이가 의심스러운 상황이니 이미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범인도 알고 시작하는 셈이었다. 그런데도 어떤 놀라움과 공포가 있을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렇게 7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여유가 별로 없던 생활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잠을 줄여가며 며칠만에 책을 끝냈다. 세라 워터스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한 챕터만 더 읽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책을 펼치면 그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덮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일어나는 사건들이 그야말로 기이해서,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닥터 패러데이는 분명 이상했다. 그의 눈을 통해 사건을 보고 그의 목소리를 통해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마침 정신과 실습을 돌던 참이어서 홀로 열심히 그의 성격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헌드레즈홀에 집착하고 열등감이 심하며 가족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의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에어즈가 식구들을 조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가 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정말 집이 악령에 씌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들. 그 사건들의 배후가 궁금해서 소설을 탐독했다.

  결말은 깔끔하지 못했다. 명쾌한 설명도 없었고 딱 떨어지는 마무리도 없었다. 어쩐지 찜찜하고 덜 끝난 느낌이 드는데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잔뜩 남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했던 건, 무서웠다. 그것도 많이 무서웠다. 하필 룸메이트가 집에 간 날 밤 기숙사에서 책을 다 읽고 잠을 못 잘 정도였다. 몇 개월만에 처음으로 창문과 문을 모두 걸어잠그고 커튼을 꼼꼼하게 친 뒤 옷장까지 열어봤다. 그럼에도 불을 끄고 침대로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정말 피곤해서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버티다 새벽 3시 반, 방의 불을 전부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 '리틀 스트레인저'는 그런 책이었다.


'애크로이드 살인'을 추억하며

 

  화자가 범인인 스릴러의 대표작으로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이 있다. 반전의 여왕 크리스티 여사의 책 중에서도 독보적인 반전을 자랑하는 소설로,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일한 정보원이 범인인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냐는 원망과 성토도 많았던 작품이다. 이제는 스포일러도 아닐 정도로 유명해진 설정이기도 하다.

  이 책의 뒷표지에는 닥터 패러데이의 심리를 한 문장으로 갈무리하는 대사가 적혀 있다. "그때도 이 집을 좋아했던 거네요?"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을 만큼요." 쇠락하는 헌드레즈홀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 이라는 설정과 함께 두고 생각했을 때 합리적인 독자라면 누구나 책을 읽기 전부터 닥터 패러데이가 범인일거라고 심증을 가질 만한 부분이다. 더구나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닥터 패러데이를 '문학사상 가장 믿을 수 없는 화자 중 하나로 기록될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이쯤되면 반전이라 할 것도 없이 뻔해진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로저 애크로이드를 살해한 닥터 셰퍼드는 이야기의 말미에 친절하게 모든 걸 설명해준다. 작품해설을 달아주는 범인이라니, 싶을 정도로. 닥터 패러데이에게는 그런 친절함이 없다. 사실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 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고백을 듣고 책을 덮었는데 닥터 패러데이의 멱살이라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짜증이 밀려왔다. 로더릭의 방은 어떻게 된건지, 지프는 왜 여자아이를 물었는지, 처음부터 캐럴라인과의 결혼을 통해 집을 차지하는 게 목표였는지, 공범이 있었는지. 그러다 마지막에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 일들, 닥터 패러데이가 담담히 얘기한 그 모든 일들이 정말 일어나기는 한걸까?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무서웠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차라리 헌드레즈홀에 집착한 닥터 패러데이가 이 모든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실행했고, 그래서 대저택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일들이 어떤 플롯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다행일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면, 모든 게 미궁이었다. 700 페이지에 걸쳐 읽어온 모든 이야기에 대한 신뢰성이 무너지는 순간, 남는 건 어떤 과정을 거쳐 한 집안의 세 사람이 차례로 극도의 공포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객관적인 진술, 베티는 캐럴라인이 빈방 뿐인 3층에서 놀라 "당신"이라 말하고 극도로 무서워하는 모습으로 계단을 뛰어내려오다 추락하였다고 말한다. 캐럴라인이 그 곳에서 본 것이 무엇일지, 혹은 닥터 패러데이의 어떤 모습일지 가늠이 되지 않아 소름이 끼쳤다. 그 곳에서 그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지.

  닥터 패러데이에게는 병적인 요소가 넘쳐난다. 그의 어머니는 헌드레즈홀의 유모였다. 그래서 열 살 무렵의 그는 에어즈 가 사람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집을 동경했다. 벽의 장식을 뜯어 가져올 만큼 좋아했다. 그 이후 그는 의사가 되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의 출신성분은 끊임없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집안의 후원 없이는 의사로서 성공하는 데에도 제한이 있었다. 그는 결혼도 하지 못했고, 부모님을 일찍 여읜 뒤 진료실에 딸린 집에서 외로운 생활을 했다. 몇 십 년이 지나 헌드레즈홀에 의사로서 출입하게 되었지만 거기에서 그는 (한 때 그의 어머니도 포함되었던) 하인들을 아무렇지 않게 웃음거리로 여기는 에어즈 가 사람들을 맞닥뜨린다. 더불어 여전히 스스로를 귀족으로, 다른 계급으로 여기며 그에게도 친구가 아닌 아랫사람으로 곁을 주려는 에어즈 부인의 오만함도 느낀다. 그는 남자로서도 캐럴라인에게 거절당하고 만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쇠락하는 헌드레즈홀처럼 그의 모습 역시 일그러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답은 없다. 정말 모든 게 닥터 패러데이의 망상일지도 모른다. 혹은 실제로 그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으나, 거기에 초자연적인 요소를 붙인 것은 닥터 패러데이의 작품인지도. 아니면 그 모든 생생한 일들이 집안의 주치의 노릇을 하던 닥터 패러데이가 무언가 손을 쓴 결과일지도 모른다. 결국 로더릭은 정신과 클리닉에 입원하게 되었으므로. 그것도 아니면, 정말 그가 어떤 트릭을 써서 그런 소동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벽에 그을린 자국을 남기고, 거울을 움직이게 하고, 에어즈 부인에게 죽은 딸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명확한 사실(이것조차 거짓일지도 모르지만)은 에어즈 가에서는 누구도 남지 않았고, 그 뒤에 홀로 남겨진 건 잔뜩 망가진 헌드레즈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헌드레즈홀을 '망가뜨려서라도 갖고 싶었던' 닥터 패러데이가 있다. 빈집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자라지 못한 열살 소년이.


written by. 가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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