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비의
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김순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지금 슬픔을 마주하고 있다.
펑펑 소리 내어 울 수도 없는, 그저 처연하고 먹먹한 슬픔이 안개처럼 아득하게 나를 감싸고 있다.
토해 낼 수 있는 슬픔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의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슬픔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은 어떤 '언어'로도 써내리지 못하는 막막한 슬픔이 있다.
그 자욱한 슬픔 속에서 나 또한 그 '열리는 문'을 찾고 있었던가 보다.

슬픔을 깊이 바라보다, 그 슬픔 속에서 한발자욱 떨어져 나와, 그 슬픔의 끝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삶의 순간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싶어서 책을 들었다.

 

 

 

 

 

/ 슬픔을 겪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
끝 간 데 없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
끝내 누군가와 영영 이별한 사람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슬픔을 겪고 있다.
가족을 잃고, 연인을 잃고, 친구를 잃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통곡하고, 또 다른 이는 숨죽여 울고, 어떤 이는 눈물조차 메말라버린 마른 슬픔을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
슬픔은 다 다른 빛깔로, 다른 무게로, 다른 형태로 우리를 찾아온다.
그러다 어느 날, 나와 닮은 빛깔의 슬픔을 껴안고 사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서로의 슬픔의 깊이를 어림할 수 있는 그 사람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그 슬픔은 위로받는다.
그이가 지금 슬픔의 한가운데 서 있지 않더라도, 희미하게 남겨진 지나간 슬픔의 흉터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을 남긴다.
그 슬픔의 시간을 지나온 이를 보면서 우리는 안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있구나.
살아서 그 슬픔을 건너왔구나.
나도... 견딜 수 있겠구나.
여전히 누군가를 잃은 가슴은 헛헛하겠지만, 슬픔을 지나면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의 슬픔의 흉터는 때론 그래서 더 큰 위로가 되어준다.

 

 

 

 

 

비탄 속에 빠져 아스팔트 길을 혀로 핥는 듯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그때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직면한 것은 오히려 색이 사라져가는 느낌이었다. 색이 '색깔이 없는 색'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_ p.156

 

 

 

이 책에는 많은 슬픔의 기록들이 있다.
비통한 심정으로 견뎌낸 시간들의 기록이다.
그이들이 지나온 슬픔의 길들.
그 슬픔을 지나 열린 문을 통과한 사람들의 오늘.
그들의 흉터가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다정한 위로의 말 따위는 필요 없다.
말이 더 이상 의미를 담지 못하는 순간이 너무도 많다.
때론 침묵이 더 깊은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저자는 나에게 어설픈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슬픔을 벗어나는 방법 따위를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읊조리듯 담담히 자신의 흉터를 내보여 줬을 뿐이다.

이렇게 조용하고, 다정하고, 깊은 위로가 또 있을까.

 

 

 

 

 

토해지지 않는 그 막막함들이 내 숨통을 조이는 것만 같았는데,
실체가 보이지 않는 슬픔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는데,
그런 마음들을, 그런 시간들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 덕분에 다시 몸속에 공기가 들어 찬다.
크게 숨을 들이쉬어 본다.
앞이 보이지 않게 자욱하던 슬픔의 안개가 조금 뒤로 물러선다.

말이 되어지지 못하는 무언의 슬픔은 '시'가 되어 가슴에 남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가슴에 시인을 품고 산다고 한다.
내 안에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슬픔의 '시정'을 느낀다.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던 나의 슬픔의 토로들이 슬픈 시구였던가.
응어리진 채 불확실한 모습으로,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어떤 감정들이 여전히 내 속에 있다.
그 불투명의 낯선 감정들이 어느 날 시가 되어 나를 뚫고 나오기를 기다려 본다.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시인의 생각을 읽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작품이 훌륭하면 할수록 시는 우리에게 시인의 고백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뭔가를 찾으라고 재촉한다. 미지의 타인의 말을 통해 내면 깊숙한 곳에 잠재되어 있는 뭔가를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독자는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보다도 더 자신에 가까운 말을 시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_ p.136

 

 

내 속의 내가, 이렇게 종종 낯설어서, 잘 모르는 타인 같을 때,
나는 책을 읽고, 시집을 읽는다.
자신보다 더 자신에 가까운 말을 본능적으로 낚아채기 위해.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에게 가장 먼저 엄습해오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고독이다. 하지만 떠난 자로 인한 고독은 그 사람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닿을 수 없다는 탄식이다. 슬픈 감정은 사랑하는 이가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p.119~120

 

 

 

책 속에 굉장히 자주 등장하고, 깊이 관여하는 감정은 와카의 감정인 것 같다.
와카는 만가(挽歌), 즉 죽은 자에게 들려주는 노래이다.
시조에 음률이 생겨 곡조로 불리는 형태인듯 싶다.
죽은 자에게 올리는 기도 혹은 추모의 마음같이 여겨지는 와카는,
가닿을 수 없는 이에게 닿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인 것이다.

죽음 앞에 우리는 모든 것을 상실해 버린 것만 같지만,
사실은 그저 '죽은 자'와 '산 자'로 나뉜 것 뿐이란다.
죽음을 경계로 이곳에 내가 '산 자'로 남겨졌을 뿐이고, 그들은 경계 너머에 그저 '죽은 자'로 서있는 것뿐이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전혀 새로운 우주에 내가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죽은 자들은 내가 사랑했거나, 혹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너무도 사랑했던, 아빠, 엄마, 외할머니.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내 영원히 그들을 잃었다고만 생각했었다.
불현듯, 시시때때로 나를 찾아오는 그리움들과 치열하게 싸워댔다.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질 수 없는 이들을 만지고 싶어서 슬펐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은 '죽은 자'라는 이름표를 달았을 뿐, 여전히 내 곁에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아있다.
책을 읽다가 깨달았다.
가닿고 싶었던 나의 열망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는 것을.
상실의 고통은 그들이 내게 준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그들을 잊어보겠다고 발버둥 치느라 생겨난 감정이라는 것을.

엄마가 여전히 내 곁에 있음을 이제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손은 닿을 수 없을지 몰라도, 마음은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넘어 여전히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와카를 읊조리고 싶어지는 밤이다.

 

 

 

 

 

읽는 것은 쓰는 것보다 낫다고도 부족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작품을 쓰는 것은 작가의 역할이지만 완성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작품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다. 글을 다 쓰고 난 시점에서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간다. 글은 쓰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고 독자들이 읽음으로서 결실을 맺는다. 독자들이 읽어야만 비로소 영혼에 말을 건네는 무형(無形)의 언어가 되어 세상으로 나간다. 독자는 작가와는 다른 눈높이에서 작품을 읽고 다른 뭔가를 창조해낸다. 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썼는지 작품의 전모를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아는 것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p.26~27

 

독자란 작가가 들려주고자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다. 작가도 느낄 수 없었던 진정한 의미를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의 심층까지 발견해내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고유의 역할이 독자들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책을 펼칠 때마다 몇 번이고 상기해야 한다.
또한 문학이란 유리책장에 장식으로 꽂힌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영혼 속에서 벌어지는 단 한 번뿐인 경험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p.162

 

 

 

 

가장 이상적인 작가와 독자의 관계가 아닐까.
'읽는다'라는 행위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저자는 여러 번 피력했다.
쓰는 행위만큼 읽는 행위 또한 깊고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체로 창작의 고통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면서, 읽는 행위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대단한 평가는 없다.
글쓴이의 의도나 생각들이 더 중요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읽은 사람의 해석과 의미가 저평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의 저자는 독자 또한 읽음으로서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작가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글은 독자를 만남으로서 완결된다고 말한다.
나와 만나, 내 내면의 소리들과 부딪혀, 진정한 하나의 책이 탄생된다니.
이 얼마나 근사하고 아름다운 표현인가.

작가의 생각을 강요받던 독서는 이제 끝났다.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오롯한 시선으로, 나의 해석과 의미로 책을 완결하고 싶다.
쓰는 행위와 읽는 행위는 그저 각각의 고유한 영역일 뿐인것이다.
당신의 말이 맞고 내 말이 그른 것도, 당신의 말이 그르고 내 말이 맞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당신만 쓸 수 있고, 나만 완성할 수 있는 하나의 글이 있을 뿐이다.

좀 더 깊이, 더 농밀하게, 의미 있는 책 읽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해본다.

 

 


 

 

 

희망, 사랑, 신뢰, 위로, 격려, 치유, 그 어느 것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하나같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다른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가 우리의 인생을 바닥에서 지탱해주고 있다.
_ p.19

무엇인가에 대해 진심으로 알고 싶다면 마음속에 무지의 방을 만들어야 한다.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탐구를 계속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_ p.29

 

인생의 의미는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소박한 말이지만 우리는 매번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머리로만 생각하기에 절망에 빠지는 것이다.
_ p.65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말 한 마디 없이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단 한 번의 눈길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
_ p.99

태어나는 것은 사라져가는 과정이며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_ p.141

 

 

 

 

이 작은 한 권의 책 속엔 짐작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잠깐의 유희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쉽게 읽히는 문장으로부터 파생된 오랜 여운과 생각들은 마음을 뒤척이게 만든다.

담담해서 더 깊은 위로들.
그냥 스치기엔 너무 깊어 자꾸만 되읽는 문장들.
손끝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더듬어 읽고 싶어지는 글이다.
특히나 나에겐 고요한 침묵 같은 묘한 위로를 건네준 책이었다.
책은 분명 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왜 내겐 침묵한 채 곁을 지켜주는 친구 같았을까.


이 책을 집어 든 독자가 종이에 적힌 말을 그냥 읽는 게 아니라 글을 쓰면서 응당 만나야 할 말들과 조우하는 경험의 계기가 된다면 필자로서 그보다 더한 기쁨은 없을 것이다.


응당 만나야 할 말들과 조우하면서, 내 안의 안개가 점점 더 옅어지고 있다.

 

 

 


 

 

 

 

생각해보면 단연하지만 우리는 단 한순간도 똑같은 존재일 수가 없다. 지금의 나는 내일의 나와 다르다. 나는 매 순간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도 지금밖에 할 수 없는 한 번뿐인 일이다. 의식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항상 지금밖에 쓸 수 없는 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 끝머리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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