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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ㅣ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1
생 텍쥐페리 지음, 김미성 옮김, 김민지 그림 / 인디고(글담) / 2017년 8월
평점 :

'어린 왕자' 하면 다들 무엇을 떠올릴까.
소행성 B612호, 바오밥나무, 장미, 길들임, 여우, 금빛 밀밭......
많은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다.
그만큼 나는 어린 왕자를 사랑했고, 실제로 내 삶에도 내내 영향을 미쳤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진실,
내가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
그런 것들이 내 삶의 곳곳에서 꽃처럼 피어나, 나를 진심을 건넬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만들었고, 누군가와 함께 보낸 시간들의 가치를 잊지 않게 만들었다.
나를 길들이고, 내가 길들였던 내 다정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잊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늘 노력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수많은 문장 중에서 나를 가장 흔들어 놓았던 문장이었으니까.
내 장미꽃이 그렇게 소중해진 건 내가 장미꽃에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어린 왕자는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여우의 말을 되뇌었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잊고 있어. 하지만 너는 잊어서는 안 돼. 넌 영원히 네가 길들인 것에 책임을 져야 해. 넌 네 장미꽃에 책임이 있어."
꿈 많던 십 대에 읽었던 어린 왕자,
그리고 청춘행 기차에 몸을 실었던 그때 읽었던 어린 왕자.
하지만 여전히 시간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은 채 내 속에 머물러 있는 것들.
어린 왕자의 질문들, 여우의 대답, 그리고 어느 실종된 조종사의 신기루 같았던 사막에서의 시간.
순수했던 그때 만났던 어린 왕자를
청춘도 중년도 아닌 애매한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났다.

나에게는 수집벽이 있다.
참 여러 가지 것들을 모았었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책이 아닐까 싶다.
어린 왕자는 정말 여러 가지 판형으로 출판사 별로 다 사 모았던 시절이 있었다.
서점에 갔다가 새로 출간된 어린 왕자를 보면 무조건 사 오던 그때.
인디고에서 출간된 어린 왕자는 심장이 쿵 내려앉을 만큼 예뻤다.
(아, 정말 너무너무 이뻐서 흥분했던 기억이..ㅎㅎ 김민지 일러스트 작가님 사랑합니다!!)
실제로 정말 여러 권을 사서 선물하기도 했었다.
덕분에 인디고의 고전 시리즈를 사 모으기 시작하기도 했었고.
그러다 책이 너무 많아서..;; 같은 책을 여러 권 가지고 있지 말자는 나름의 다짐으로 여기저기 선물을 하고는, 현재 인디고의 고전 시리즈 중 하나인 어린 왕자와 타 출판사에서 출간된 불어, 영어, 한국어 버전이 모두 담긴 책 한 권만 소장 중이다.
그러다가 다른 판형과 번역가가 바뀐 어린 왕자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또 읽고 말았다.
어린 왕자를 외면하기엔 나는 너무 어린 왕자를 사랑한다.
보랏빛의 표지는 좀 더 엔틱한 느낌을 풍기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가 담긴 일러스트에 두말할 것 없이 심쿵.
(사진은 어떻게 찍어도 실제 다크한 느낌의 보라를 잡아내지 못했다. ㅠ_ㅠ 내가 찍은 사진과 전혀 다른 보랏빛 표지라는 거.;;;;)
이로써 인디고에서 출간된 세 가지 버전 표지의 어린 왕자를 다 소장하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읽은 어린 왕자는 말할 것도 없이 다 번역본인데... (애초에 불어든 영어든 원서를 읽을 능력은 없으니;;) 사실 커다란 차이를 느낀 적이 없다.
연달아 읽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지만, 딱히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처음이다.
번역이 이렇게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게.
한국소설 말고는 어차피 죄다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같은 책을 번역자에 따라 여러 권 읽은 적이 없다.
많은 분들이 원서를 찾아 읽는 이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다르다.
맥락은 같지만 문장이 많이 다르다.
이렇게 차이를 드러낼 거라고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어느 정도의 차이는 분명 있겠지만) 같은 인디고에서 출간된 어린 왕자와 비교해도 확연히 다른 문체를 보인다.
심지어 내가 인상 깊게 기억하던 문장도 다르다.
물론 내용은 같지만.
묘하게 다른 문장을 가진 이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어색함(?)을 느껴 인디고의 다른 어린 왕자 책을 옆에 놓고 함께 읽었다. (첫번째 출간된 어린왕자)
다름의 차이를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아는 분이 내가 읽어준 문장들을 들으시더니 기존의 어린 왕자가 좀 더 한국적이고(문장의 배열 같은 것들) 서정적인(예쁜) 문체를 사용하는데 반해, 이 책이 조금 더 원서에 가까운 번역을 한 느낌이라고 하셨다.
번역체 특유의 느낌을 풍긴다고.
(이를테면 '~라고 생각했다'/'내 생각엔~' 같이 문장의 배열 자체가 우리나라식으로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들의 차이 같은 것들.)
그렇다. 그래서 내가 처음 묘한 이질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아주 한국식으로 번역된 문장에 익숙했던 내게 원서의 느낌을 물씬 살린 번역은 조금 낯설었던 게 아닌가 싶다.
번역이 다르니 나름 색다른 맛도 있었다.
자 그럼,
김미성 번역의 어린 왕자를 읽어보자.
내가 사랑하는 어린 왕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영원히 나이 들지 않은 채로, 영원히 어린 왕자 그대로.
가끔 밤하늘에 별이 보일 때면 소행성 B612호를 가늠해 본다.
길 가다 잔뜩 피어난 장미를 볼 때도 가시가 네 개 달린 어린 왕자의 장미를 떠올리곤 한다.
장미의 허영이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이었음을 알고 나서부터,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나와 당신의 모습들에 매번 어린 왕자의 장미가 오버랩되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어린 왕자를 애타게 기다리며 살아가는 장미인 지도 모른다.
나는 '어린 왕자'가 허구의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텍쥐페리는 분명 그 사막에서 어린 왕자를 만났을 거라고 믿는다.
그가 만났던 어린 왕자는 자기 별로 잘 돌아갔을까.
여전히 세 개의 화산을 청소하고, 새로 돋아난 새싹을 유심히 관찰하다 바오밥나무임이 분명해지면 얼른 뽑아내고, 새침하고 까다로운 장미에게 유리관을 씌워주고 있을까.
어떤 날에는 너무 슬퍼 의자를 옮겨가며 마흔세 번이나 노을을 바라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