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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도 1년밖에 안 남았고… - 보조작가 김국시의 생활 에세이
김국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4월
평점 :

제목만 보고 전세 이야기인가 했다.
그러니까 팍팍한 생활 속에서 깨달은 어떤 이야기인가 싶었다.
삶은 고되고, 내 맘대로 되는 것 하나 없고, 전세 기간은 끝나가고, 또 내일은 어떻게 버티나에 관한,
그러다가 그 속에서도 싹이 나고 식물이 자라고 꽃이 피는 그런 이야기겠거니 하고 읽기 시작한 책은 전혀 다른 매력을 폴폴 풍기고 있었다.
저자는 방송작가다.
다큐멘터리부터 드라마, 뉴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보조작가로 일해왔다.
그녀가 지나온 사회 초년생의 삶, 보조작가로서의 일상들이 이 작고 귀여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때로는 시니컬하고, 적당한 블랙 유머와 엉뚱함으로 잔뜩 버무린 그녀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유쾌하다.
그렇다고 가볍지만도 않다.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오는데도 어쩐지 단맛보단 쌉싸름한 맛이 더 강하게 남는다.
생크림을 잔뜩 얹은 다디단 카페모카가 딱 어울린 것 같은 그녀의 일상에는 왜인지 에스프레소의 깊고 쓴맛이 난다.
엉뚱한 소녀 같은 그녀의 일상은 로코가 딱인데, 슬프게도 인생은 그녀에게 로코를 허락하지 않은 모양이다.
인생의 쓴맛들을 모조리 삼키며 무던하게 버텨낸 그녀의 지난 일기가 그래서 더 와닿는다.
우리 모두 로코를 꿈꾸지만, 대부분 하드코어 장르에 가까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기에.
가끔은 속을 알 수 없는 일본 영화 같기도 하고.
(이제 영화가 시작되나 보다 했더니 엔딩 시크릿이 올라가던 '4월 이야기'같은.)

애초에 레벨업 같은 건 없었던 거다. 나는 깰 수 없는 지루한 게임기를 손에 쥐고 땀을 뻘뻘 흘리며 용을 썼다. 내가 물리쳐야 할 어마어마한 왕 같은 건 없고, 입을 나불대며 나를 물어뜯으려 하는 적들만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그냥저냥 살아남고 있었다.
앞으로도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이 허름한 배경 안에서 평생 뿅뿅 위로 갔다 아래로 갔다 옆으로 갔다 그렇게 왔다 갔다만 하다가 실수로 죽지나 말고 살아야 하는 거였다.
P.55~56
이 얇고 작은 책이 수시로 허를 찌르고 뼈를 때려서 웃으면서도 아팠다.
복잡하고 어렵고 난해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생이 이렇게 쉽게도 문장으로 보여질 수도 있구나 싶어서 헛웃음도 났다.
어떤 장르이건 '작가'라는 사람들은 특유의 어떤 섬세함과 날카로움이 있는 건가 보다.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기지개를 펴고, 햇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을 것만 같은 느른한 모습의 저자를 상상했는데, 돌연 순식간에 훅 다가와 어퍼컷을 날릴 때마다 대책 없이 얻어맞았다.
허를 찔리며 두들겨 맞으면서도 웃음이 나는 건 왜일까.
아마도 작가의 말들에 너무 동감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공감을 넘어서 완전히 동감하게 되는 쓰디쓴 일상의 조각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고, 전혀 다른 일을 하면서, 전혀 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어째서 우리들의 일상은 데칼코마니 같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처럼 '동감'을 외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을 것 같아서, 또 입맛이 씁쓸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은 내가 너무 많은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 같다. 왠지 사람들을 속이고 신내림을 받은 척 칼춤이라도 추는 기분이다. 대충 그럴듯하게 흉내만 내도 진짜라고 믿어주니 얼렁뚱땅 넘어가는데 이다음에도, 또 이다음에도 이렇게 넘어갈 수 있을까. 내가 가짜 으른인 걸 사람들이 알아채고 딱지라도 떼면 어쩌지.
P.162
내가 어른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그냥 어른의 이름을 달고 무작정 어른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
다들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철딱서니 없는 꼬꼬마가 의아하게 세상을 내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것이다.
이상하고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버텨야 하니 하루하루를 어른스럽게 살아보려고 애쓰는 우리들의 진짜 속마음을 덜컥 들켜버렸을 때, 민망하지만 슬금슬금 터져 나오는 웃음.
어른인 척 잔뜩 힘을 줬던 어깨가 스르르 내려앉는 순간.
그런 웃음과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 이 책 속에 담겨있다.
꼬마가 커다란 어른의 옷을 훔쳐있고 있는 모습을 들켜버린 순간의 민망함과 동질감.
야 너두? 야 나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꼬마가 감당했던 어른의 무게가 선명하게 보여서 또 울컥해지는 마음에 콧날이 시큰해지는 순간들.
저자의 일상을 통해, 그 모든 순간의 나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나에게 행복은 '개'같은 존재였다. 뭐 딱히 별거 없이 밥만 줘도 그렇게 좋다고 헥헥거렸다.
…중략…
학창 시절의 나는 단순해서 행복한 게 아니었다. 삼시 세끼 밥을 먹고 배가 불러서 행복한 것도 아니었고 부모님이 성적표로 혼내지 않아서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 불행할 이유가 없어서 행복했다.
P.21~24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했던 시간들.
너무 당연하게 누렸던 행복들.
어렸던 그 시간들을 뒤돌아보니, 그랬다. 이유 없이 그저 행복했다.
행복한 이유가 아니라 사실은 불행할 이유가 없어서였던 건가 보다.
더 이상 우리는 그 시절도 돌아갈 수 없다.
너무 손쉽게 불행과 마주치는 시간을 살얼음 걷듯 걸으며 애써 눈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린다.
저자의 온순했던 개 같은 행복이 불안과 스트레스에 날뛰다 더 이상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린 것처럼,
어른이 된다는 일은 서글픈 일인 것 같다.
오늘도 우리는 어른의 옷을 입고, 어른의 얼굴을 하고, 어른의 일상을 살아간다.
먹고사는 일을 외면할 수 없어서, 종종 행복의 얼굴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그래도 이 책의 작가는 '전세도 1년 밖에 안 남았는데' 끈끈이 없이 미끄러지는 시간을 스스로 던져버리고 나왔다니 다행이다.
여전히 끈끈이 없이 미끄러져 내리는 시간을 의미 없이 버티고 있는 나에게 저자의 '지금'은 그래서 더 부럽고 응원하고 싶은 시간이다.

얇고 작은 책이라 어디라도 들고 갈 수 있고, 어디서도 꺼내 읽기 좋은 책이다.
와드득와드득 뼈도 씹어가며, 헛웃음도 내뱉어 가며, 한참 끅끅대며 웃다 보면 나의 오늘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면 또 어떤가, 하드코어 내 인생에도 블랙 유머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
하늘을 쳐다보며 '하하하하하하하' 시원하게 웃고 싶어지는 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