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내 것이었던
앨리스 피니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하지만 스릴러 소설은 썩 좋아하지 않는다.
추리 소설도 최근 트렌드를 따라가는 종류보다는 좀 더 클래식한 느낌의 옛날 추리를 좋아한다.
스릴러 소설 또한 피가 튀고 살이 뜯기는 소설보다는 심리 스릴러를 선호하는 편이다.
애초에 영화든 책이든 너무 지나치게 잔인한 것을 잘 못 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추리와 스릴러 장르 모두에서 잔인한 살인 장면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찌르고, 자르고, 온통 피로 도배된 잔혹한 장면들이 기어코 책에 한 장면 이상은 등장하기 시작하자, 추리와 스릴러 장르의 소설을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종종 재밌다고 소문난 책들을 사긴 했지만, 그것을 읽는 행위에서도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굳이 잔인한 살인의 과정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구경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정말 오랜만에 스릴러 장르의 책을 읽었다.
너무 감사하게도 이 책에서는 피 튀기는 살인 장면이 없다.
의문과 의문이 꼬리를 물고, 진실과 거짓이 하나의 반죽으로 뒤엉켜 우리를 혼란하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몹시 서늘하고, 섬뜩한 오싹함을 선물한다.

더듬더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진실의 흔적을 손끝으로 더듬어가다 덥석 거짓에게 손끝을 물리곤 했다.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움켜잡았는데 그것은 거짓이었고, 거짓이라 의심했던 것이 어느 순간 진실의 옷을 입고 나타나곤 했다.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독자는 내내 갈팡질팡한다.

 

 

 

 

 

글은 현재, 그때, 이전, 이렇게 세 가지 구성으로 진행된다.
현재 속 그녀는 코마 상태이다.
그때는 사고가 나기 전의 며칠을 그녀의 기억을 통해 더듬는다.
이전의 그녀는 어릴 적 일기장을 통해 이야기를 건넨다.

글의 구성을 그대로 따라가보자.

 

<현재>

 

나는 지금 1인실에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사방이 막힌, 비좁은 병실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을 그려본다. 사방의 벽을 타고 똑똑 떨어져 내리는 시간은 더러운 침전물이 가득 떠 있는 웅덩이가 되어 나를 서서히 익사시킬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망상과 현실이 뒤섞인 무한한 공간에 존재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존재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설정하는 공장으로 반송되었다. 보이지 않는 벽 너머로 삶은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안에 가만히 억눌려 있다.
_ p.26~27.

 

나(엠버)는 코마 상태이다.
몸을 움직일 수 없고, 말을 할 수도 없고, 눈을 뜰 수도 없다.
나에게는 남편이 있고, 여동생이 있다.
왜 내가 여기 이렇게 누워있는지,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남편과 여동생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건지, 그 무엇도 선명하지 않다.
기억은 조각조각 부서져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나초자 알기 어렵다.
몸속에 갇혀 꿈과 현실과 지난 기억과 현재의 소리들을 이해하기 위해 애써보지만 모든 것은 혼돈 속에 뒤엉켜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때>

 

한가지 잘못된 결정, 잘못된 방향 전환 때문에 그 1분이 계속 이어진다.
_ P. 90.

 

사고가 나기 일주일 전부터 사고가 나던 그 시점까지의 기억이 차근차근 재생된다.
기억 속 엠버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일을 했었고, 남편과는 사이가 나빴으며, 부모님과도 소원한 사이였고, 여동생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으로 비춰진다.
남편과 여동생 사이를 의심했으며, 길 가다 우연히 옛 연인과 조우하기도 한다.
라디오에서 해고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자 살아남기 위해 메인 진행자인 매들린을 함정에 빠트리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녀는 강박증이 있으며, 무언가 많이 불안해 보인다.

 

<이전>

 

나는 가끔 거짓말을 해.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가끔 거짓말을 하지.
p. 195.

 

'일기장에게'로 시작하는 <이전>의 글들은 어릴 적, 그러니까 열 살 무렵의 시작된 그녀의 일기다.
일기에는 그녀의 일상과 세 가지 진실이 담겨있다.
일기장 속 그녀는 매우 불행했다.
부모님은 늘 싸웠고, 자주 이사를 다녔으며, 친구들과도 사이가 나빴다.
그렇게 새롭게 전학을 간 학교에서 선생님의 숙제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 속에는 부모님과의 불화와 새롭게 사귀게 된 '테일러'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친하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도 친해진 테일러.
그녀는 테일러가 가진 따뜻한 가정이 너무도 가지고 싶었다.
자신은 지나치게 불행했으므로.

 

 

 

 

세 가지의 기억은 우리를 함정에 빠트린다.
현재, 온통 조각난 기억들을 맞춰보려고 애쓰고 있는 그녀와 그때의 시간을 살았던 그녀와 아주 예전 어렸을 적에 일기장에 기록된 그녀는 어느 것이 진짜 그녀의 모습인지 혼란스럽다.
그녀는 때론 피해자였다가, 때로는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타인의 거짓에 예민하게 굴면서도, 자신의 거짓에는 조금의 죄악감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은 가끔 거짓말을 하며,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거짓말들에 대해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으니까.


현재 속 그녀는 코마 상태이기 때문에, 그녀의 기억에 대한 신뢰가 낮다.
코마 상태에서 그녀가 겪게 되는 일들을 지켜보며, 측은한 마음이 강해진다.

그때의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망가져 있는 모습이다.
불안해 보이고, 조급해 보이고, 늘 의심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강박적인 그녀의 모습은 머릿속의 어떤 감정의 끈이 뚝 끊어져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만큼, 평범하거나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일기장 속 그녀는 어쩐지 좀..... 선뜩하다.
가끔 거짓말을 하는 그녀는, 거짓말에 대한 죄의식이 전혀 없다.
특히나 팔찌와 관련된 사소한 사건이나, 엄마와 관련된 엄청난 사건 속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다.
그녀의 진짜 알맹이는 무엇인지, 그녀를 잠식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섬뜩해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천진함이 때로는 그 어떤 것보다 잔인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 천진할 수 있는 순간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기장 속 그녀는 점점 더 자기 합리화에 능해질 뿐이다.

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 속 '양달희'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나는 잘못이 없고, 상황이 자꾸 잘못되어 갈 뿐이고, 내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만 일삼던 양달희를 보며,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으면 저런 생각과 결론에 도달할까 너무 궁금했었는데, 일기장 속 그녀에게서 양달희를 오버랩해 보았다.

 

 

 

 

나는 이제껏 써왔던 몸의 지퍼를 열고 밖으로 걸어 나온다. 하나씩 벗겨낼 때마다 새로 나오는 러시아 인형처럼 내 몸은 이전보다 조금 작아진 것 같다.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새로운 모습이 있는지 궁금하다.
P. 407.

 

 

책은 내내 거짓말과 비밀의 안갯속에 휩싸여있다.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처음 믿었던 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실성을 잃어가고,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섬뜩해진다.


애초에 선으로만, 혹은 악으로만 이루어진 인간은 없는 모양이다.
한 사람 안에 깃든 선과 악이 마주 보고 있다.
선이 오른팔을 올리면 악은 왼팔을 올린다.
서로를 거울처럼 들여다보며 똑같이 따라 한다.
어느 순간 둘 중 누가 선이었고 악이었는지 혼란스러워진다.
그리고 그 혼란의 끝에 누군가는 죽었다.
죽은 것은 선이었을까 악이었을까.
그녀 마음속에서 똑같이 마주 보며 웃던 선과 악중 누가 남겨졌을까.

그것은 책을 통해 확인하시길.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기 좋다. 내가 되어야만 하는 내 모습으로,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도둑맞았던, 그런 삶 말이다.
P. 414.

 

 

 

우리는 모두 무엇이라도, 누구라도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갈 곳이 없으니까.
P. 413.

 

 

 

 

그것은 어쩌면 섬뜩하고 광기어린 사랑의 한 모습이었을까.
무엇이라도 사랑해야 했던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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