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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내게 무해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내게 유해한 사람은 또 누구였을까.
제목을 읊조리다가 가만히 생각해 본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해한 사람'일 수 있을까?
조금의 적의도 없이, 무한한 사랑의 이름으로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가끔은 미움보다 사랑이 더 큰 상처를 남기곤 한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누구에게 무해한 사람이었고 누구에게 유해한 사람이었을까.
내가 정말 무해한 사람으로 누군가에게 읽힌 적이 있었을까.
내게 무해한 사람은,
오로지 '완벽한 타인' 중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 힘을 얻고, 또한 모든 관계에서 상처를 받으니까.
그 사람과 나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는 내게 더 큰 힘이 되고, 더 큰 상처가 된다.
내 주위의 어느 누구도 오로지 무해하기만 했던 적은 없었다.
매번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가까워졌고, 서로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상처는 제멋대로 생겨나곤 했으니까.
나 또한 그들에게 무해의 얼굴은 아니었겠지.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p. 209. < 고백 > 中
최은영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바로 앞에 읽었던 김금희 작가의 책이 나에게는 조금 난해했으므로, 이 책을 시작할 때에도 역시나 조금 긴장했다.
두 작가 모두 최근 문학계에서 주목받는 젊은 작가들이었고, 책을 읽은 독자들의 평 또한 좋았던 작가들이라 '젊은 작가'들의 책은 혹시 다 어쩐지 난독증을 느끼게 하는 맥락으로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일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김애란 작가님을 떠올렸다.
닮아서가 아니라, 작년 여름을 기억하게 하는 단편집이 '바깥은 여름'이었던 탓이다.
이번 여름은 아마도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 같으니까.
'바깥은 여름'을 읽으면서 순수하게 문장의 아름다움에 감탄했었다.
뭉툭한 삶의 순간들 속 미묘한 감정의 일렁임 같은 것들을 담담함 속에 녹여놓은 문장들,
무심한듯한 일상의 모습에 덧씌워진 깊은 감정의 결들이 그 여름 내 마음에 날카롭게 그어져 상흔을 남겼다.
그 길고 긴 여운이 일 년을 지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번 여름, 처음 만난 최은영 작가의 글이 다시 내 마음에 저릿한 상흔을 남겨 놓은 것 같다.
최은영 작가님은 감정에 예민한 사람이 아닐까.... 혼자 추측해 본다.
책을 읽는 내내 섬세하게 잡아채 놓은 감정의 결들을 더듬으며 감탄하곤 했다.
그래, 이런 감정이 있었지.
그때, 나를 관통했던 그 감정들의 실체가 이것이었지.
말로 차마 표현할 수 없었지만, 가슴은 알고 있었던 이야기.
그 감정 한가운데에서는 되려 무뎌져 보지 못했던 그 작고 연약했던 감정의 민낯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 깨닫게 되곤 한다.
모든 감정이 뭉쳐져 하나의 아픔, 슬픔, 고통으로 기억되던 시간들도, 그 감정을 지나고 멀리 떨어진 시간 속에 서서 되돌아보고 있노라면 그제서야 그 속에 들어있던 수많았던 감정들이 보인다.
지나고서야 선명해지는 감정이 있다.
지나고서야 깨닫게 되는 감정이 있다.
이 책은 우리를 흐리게 지나쳐버렸던 그 감정의 알맹이를 들여다보라고 건네준 돋보기 같다.
그 시절 우리들은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낀 사람들처럼 더듬거리다 놓치기 일쑤였다.
사랑을 놓치고, 믿음을 놓치고, 우정을 놓치고, 스스로를 놓치곤 했다.
핀트가 어긋나 흐리게만 보이던 감정들을 이제서야 선명히 바라본다.
어쩌면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고개 돌려 버렸을지도 모를 그때의 비겁함을 이제서야 마주 본다.
미안하다, 내가 놓친 많은 것들아.
'미숙했던 지난날의 작은 모서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
아마도 편집자가 썼을 띠지의 이 문구가 이 책을 가장 잘 이해하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딱, 그런 책이다.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 연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상하고 망가지고 비뚤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
p. 112. < 모래로 지은 집 > 中
이 소설집에는 일곱 편의 중, 단편이 실려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폭력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사랑 혹은 우정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그 모든 이야기는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다양한 변주처럼 존재한다.
연인과 친구와 가족과 타인과의 '관계', 그 속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감정의 실낱같은 예민함들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이랄지, 숨기고 싶은 치졸함 혹은 내 속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헐벗은 감정들까지 모두 다 숨김없이.
예전부터 그랬어. 왜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왜 나 스스로가 그렇게도 못나 보였을까. 저리 가. 나는 그애에게 말했어. 내 눈에도, 남들 눈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왜 너는 죽지도 않아? 사라지지도 않고 그대로 내 안에 남아있어? 그렇게 거칠게 나를 대하는 게 어른이 되는 것인 줄 알고서.
예전 일들을 잊고, 지워버리고, 연연하지 않으려 하고, 내 안에 갇힌 그애가 추워하면 더 외면해서 얼어죽기를 바라고, 배고파하면 그대로 굶어 죽기를 바라면서 겉으로는 평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연기했지. 그게 다 뭐였을까. 그애는 나였는데.
p. 177~178. < 모래로 지은 집 > 中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모래로 지은 집>이었다.
단편이라기보다는 중편이라고 봐야 할 이야기 속, 너무 많은 문장들이 마음을 쿡쿡 찔러대고는 했다.
<그 여름>이 사랑에서 오는 슬픔을 가장 선명하게 그려냈다면, <모래로 지은 집>에서는 관계에서 오는 슬픔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여자 둘과 남자 하나로 구성된 소울메이트에 가까운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를 지나 현재로 오자 색을 잃고 바래버렸다.
하나의 손을 놓치고, 그렇게 빛나던 시절도 놓쳐버린 것이다.
반대로 가장 암흑이었던 시절 낯선 땅에서 만나 서로의 치유제가 되어준 <아치디에서> 속 인물들은 현재의 삶 속에 서로가 없음에도 마치 서로가 존재하는 것 같다.
서로를 통과해 지나온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떠받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시간 속에도 여전히 아련하게 빛나는 그때의 '우리'가 숨 쉬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 여름>의 이경 또한 영영 그 사랑을 잃어버렸지만, 그 여름이 내내 이경에게 남겨졌다.
사랑이 영원히 끝나버렸어도 이경에겐 수이가 사라지지 않고 존재했다.
그게 사랑의 상처인지, 벌인지, 트로피인지 알 수 없는 채로.
그렇게 사라지지 못한 채 존재하는 것들 중에는 가족이 가장 깊지 않을까 싶다.
기억조차 가물한 아주 어렸던 시간들을 내내 함께 했던 사람들.
<지나가는 밤>과 <손길> 속에 그려진 가족은 약간 다른 형태를 띠고 있지만 결국 그 마음의 깊이는 같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나도 외로운데 네 외로움까지 짊어지기가 힘들었던 언니와 너무 외로워서 사람이 간절했던 동생.
자꾸만 수렁으로 걸어가는 동생을 외면했지만, 결국 외면할 수 없었던 마음들.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도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무료하고 긴 하루하루로 이어진 시간, 아무리 노래를 부르고 그네를 타도, 공상에 빠져 이야기를 지어내도, 자신들이 작가이고 감독이고 배우이고 관객인 연극을 해도,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거리까지 달려간다고 해도 메워지지 않았던 커다랗고 텅 빈, 그 무용한 시절을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p. 97. < 지나가는 밤 > 中
가족이란 피로 이어져 있어서 남이 될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무용한 시절'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남이 될 수 없었던 건가 보다.
내게도 남겨진 '커다랗고 텅 빈, 그 무용한 시절'이 있다.
그 시절을 함께 살아냈던 사람들, 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라고 해도 그 어린 시절 함께 마음을 나누고 체온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며 '무료함'을 견뎌냈던 사람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고,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녀는 해인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죽어버렸다가도 어느 순간이면 다시 살아나는 오래된 타인이었다.
p. 215. < 손길 > 中
<손길>에서 해인은 오래전 인사도 없이 남이 되어버린 숙모를 우연히 다시 만난다.
남이었지만 절대 남일 수가 없는 숙모를.
어쩌면 엄마보다 더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가족을, 남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난다.
관계라는 게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토록 가까웠던 사람이 너무도 낯선 타인이 되어버리는 일이 우리 삶 속에서 생각보다 빈번하게 일어난다.
영원히 좋고, 영원히 다정하고, 영원히 무해한 관계는 없다.
그래서 서글프다.
누군가의 손을 잡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다.
내가 지나온 '관계'들을 통해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자라났지만, 가끔은 키만 멀대같이 큰 속이 텅 빈 대나무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든다.
사람을 잃을수록, 관계에서 탈락될수록 나는 점점 비어간다.
그때 놓쳐버린 그 손이 어떤 의미였는지 뒤늦게 깨달을 때마다, 앞으로 내가 잡을 손에 대한 다짐보다 놓쳐버린 손에 대한 상실에 더 깊이 앓곤 한다.
이미 흘러가버린 지난 시간들, 그 속에서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 그 시간 속에 갇힌 마음들.
때론 후회로, 때론 상처로, 때론 추억으로 남겨진 그때의 우리들이 이 책 속에 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그런 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어린 시절,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습관이자 관성이 되어 계속 작동하는 것 아닐까. 속이 깊다거나 어른스럽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이해라는 것. 그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택한 방법이었으니까.
p. 121. < 모래로 지은 집 >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