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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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내게 유해한 사람은 또 누구였을까.

제목을 읊조리다가 가만히 생각해 본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해한 사람'일 수 있을까?
조금의 적의도 없이, 무한한 사랑의 이름으로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가끔은 미움보다 사랑이 더 큰 상처를 남기곤 한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누구에게 무해한 사람이었고 누구에게 유해한 사람이었을까.
내가 정말 무해한 사람으로 누군가에게 읽힌 적이 있었을까.

내게 무해한 사람은,
오로지 '완벽한 타인' 중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 힘을 얻고, 또한 모든 관계에서 상처를 받으니까.
그 사람과 나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는 내게 더 큰 힘이 되고, 더 큰 상처가 된다.
내 주위의 어느 누구도 오로지 무해하기만 했던 적은 없었다.
매번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가까워졌고, 서로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상처는 제멋대로 생겨나곤 했으니까.

나 또한 그들에게 무해의 얼굴은 아니었겠지.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p. 209. < 고백 >

 

 

최은영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바로 앞에 읽었던 김금희 작가의 책이 나에게는 조금 난해했으므로, 이 책을 시작할 때에도 역시나 조금 긴장했다.
두 작가 모두 최근 문학계에서 주목받는 젊은 작가들이었고, 책을 읽은 독자들의 평 또한 좋았던 작가들이라 '젊은 작가'들의 책은 혹시 다 어쩐지 난독증을 느끼게 하는 맥락으로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일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김애란 작가님을 떠올렸다.
닮아서가 아니라, 작년 여름을 기억하게 하는 단편집이 '바깥은 여름'이었던 탓이다.
이번 여름은 아마도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 같으니까.
'바깥은 여름'을 읽으면서 순수하게 문장의 아름다움에 감탄했었다.
뭉툭한 삶의 순간들 속 미묘한 감정의 일렁임 같은 것들을 담담함 속에 녹여놓은 문장들,
무심한듯한 일상의 모습에 덧씌워진 깊은 감정의 결들이 그 여름 내 마음에 날카롭게 그어져 상흔을 남겼다.
그 길고 긴 여운이 일 년을 지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번 여름, 처음 만난 최은영 작가의 글이 다시 내 마음에 저릿한 상흔을 남겨 놓은 것 같다.

최은영 작가님은 감정에 예민한 사람이 아닐까.... 혼자 추측해 본다.
책을 읽는 내내 섬세하게 잡아채 놓은 감정의 결들을 더듬으며 감탄하곤 했다.
그래, 이런 감정이 있었지.
그때, 나를 관통했던 그 감정들의 실체가 이것이었지.
말로 차마 표현할 수 없었지만, 가슴은 알고 있었던 이야기.
그 감정 한가운데에서는 되려 무뎌져 보지 못했던 그 작고 연약했던 감정의 민낯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 깨닫게 되곤 한다.
모든 감정이 뭉쳐져 하나의 아픔, 슬픔, 고통으로 기억되던 시간들도, 그 감정을 지나고 멀리 떨어진 시간 속에 서서 되돌아보고 있노라면 그제서야 그 속에 들어있던 수많았던 감정들이 보인다.
지나고서야 선명해지는 감정이 있다.
지나고서야 깨닫게 되는 감정이 있다.

이 책은 우리를 흐리게 지나쳐버렸던 그 감정의 알맹이를 들여다보라고 건네준 돋보기 같다. 
그 시절 우리들은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낀 사람들처럼 더듬거리다 놓치기 일쑤였다.
사랑을 놓치고, 믿음을 놓치고, 우정을 놓치고, 스스로를 놓치곤 했다.
핀트가 어긋나 흐리게만 보이던 감정들을 이제서야 선명히 바라본다.
어쩌면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고개 돌려 버렸을지도 모를 그때의 비겁함을 이제서야 마주 본다.
미안하다, 내가 놓친 많은 것들아.

 

 '미숙했던 지난날의 작은 모서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

아마도 편집자가 썼을 띠지의 이 문구가 이 책을 가장 잘 이해하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딱, 그런 책이다.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 연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상하고 망가지고 비뚤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
p. 112. < 모래로 지은 집 >

 

 

이 소설집에는 일곱 편의 중, 단편이 실려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폭력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사랑 혹은 우정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그 모든 이야기는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다양한 변주처럼 존재한다.
연인과 친구와 가족과 타인과의 '관계', 그 속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감정의 실낱같은 예민함들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설명할 수 없는 외로움이랄지, 숨기고 싶은 치졸함 혹은 내 속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헐벗은 감정들까지 모두 다 숨김없이.

 

 

예전부터 그랬어. 왜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왜 나 스스로가 그렇게도 못나 보였을까. 저리 가. 나는 그애에게 말했어. 내 눈에도, 남들 눈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왜 너는 죽지도 않아? 사라지지도 않고 그대로 내 안에 남아있어? 그렇게 거칠게 나를 대하는 게 어른이 되는 것인 줄 알고서.
예전 일들을 잊고, 지워버리고, 연연하지 않으려 하고, 내 안에 갇힌 그애가 추워하면 더 외면해서 얼어죽기를 바라고, 배고파하면 그대로 굶어 죽기를 바라면서 겉으로는 평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연기했지. 그게 다 뭐였을까. 그애는 나였는데.

p. 177~178. < 모래로 지은 집 >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모래로 지은 집>이었다.
단편이라기보다는 중편이라고 봐야 할 이야기 속, 너무 많은 문장들이 마음을 쿡쿡 찔러대고는 했다.
<그 여름>이 사랑에서 오는 슬픔을 가장 선명하게 그려냈다면, <모래로 지은 집>에서는 관계에서 오는 슬픔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여자 둘과 남자 하나로 구성된 소울메이트에 가까운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를 지나 현재로 오자 색을 잃고 바래버렸다.
하나의 손을 놓치고, 그렇게 빛나던 시절도 놓쳐버린 것이다.

반대로 가장 암흑이었던 시절 낯선 땅에서 만나 서로의 치유제가 되어준 <아치디에서> 속 인물들은 현재의 삶 속에 서로가 없음에도 마치 서로가 존재하는 것 같다.
서로를 통과해 지나온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떠받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시간 속에도 여전히 아련하게 빛나는 그때의 '우리'가 숨 쉬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 여름>의 이경 또한 영영 그 사랑을 잃어버렸지만, 그 여름이 내내 이경에게 남겨졌다.
사랑이 영원히 끝나버렸어도 이경에겐 수이가 사라지지 않고 존재했다.
그게 사랑의 상처인지, 벌인지, 트로피인지 알 수 없는 채로.

그렇게 사라지지 못한 채 존재하는 것들 중에는 가족이 가장 깊지 않을까 싶다.
기억조차 가물한 아주 어렸던 시간들을 내내 함께 했던 사람들.
<지나가는 밤>과 <손길> 속에 그려진 가족은 약간 다른 형태를 띠고 있지만 결국 그 마음의 깊이는 같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나도 외로운데 네 외로움까지 짊어지기가 힘들었던 언니와 너무 외로워서 사람이 간절했던 동생.
자꾸만 수렁으로 걸어가는 동생을 외면했지만, 결국 외면할 수 없었던 마음들.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도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무료하고 긴 하루하루로 이어진 시간, 아무리 노래를 부르고 그네를 타도, 공상에 빠져 이야기를 지어내도, 자신들이 작가이고 감독이고 배우이고 관객인 연극을 해도,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거리까지 달려간다고 해도 메워지지 않았던 커다랗고 텅 빈, 그 무용한 시절을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p. 97. < 지나가는 밤 > 中

 

가족이란 피로 이어져 있어서 남이 될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무용한 시절'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남이 될 수 없었던 건가 보다.
내게도 남겨진 '커다랗고 텅 빈, 그 무용한 시절'이 있다.
그 시절을 함께 살아냈던 사람들, 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라고 해도 그 어린 시절 함께 마음을 나누고 체온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며 '무료함'을 견뎌냈던 사람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고,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녀는 해인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죽어버렸다가도 어느 순간이면 다시 살아나는 오래된 타인이었다.
p. 215. < 손길 > 中

<손길>에서 해인은 오래전 인사도 없이 남이 되어버린 숙모를 우연히 다시 만난다.
남이었지만 절대 남일 수가 없는 숙모를.
어쩌면 엄마보다 더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가족을, 남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난다.


관계라는 게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토록 가까웠던 사람이 너무도 낯선 타인이 되어버리는 일이 우리 삶 속에서 생각보다 빈번하게 일어난다.
영원히 좋고, 영원히 다정하고, 영원히 무해한 관계는 없다.
그래서 서글프다.
누군가의 손을 잡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다.

내가 지나온 '관계'들을 통해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자라났지만, 가끔은 키만 멀대같이 큰 속이 텅 빈 대나무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든다.
사람을 잃을수록, 관계에서 탈락될수록 나는 점점 비어간다.
그때 놓쳐버린 그 손이 어떤 의미였는지 뒤늦게 깨달을 때마다, 앞으로 내가 잡을 손에 대한 다짐보다 놓쳐버린 손에 대한 상실에 더 깊이 앓곤 한다.

이미 흘러가버린 지난 시간들, 그 속에서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 그 시간 속에 갇힌 마음들.
때론 후회로, 때론 상처로, 때론 추억으로 남겨진 그때의 우리들이 이 책 속에 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그런 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어린 시절,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습관이자 관성이 되어 계속 작동하는 것 아닐까. 속이 깊다거나 어른스럽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이해라는 것. 그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택한 방법이었으니까.
p. 121. < 모래로 지은 집 > .

 

 

 

모래로 지은  >

 

pc 통신 동호회를 통해 알게 된 나비, 모래, 공무.
서로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나눴던 이야기들이 쌓여 공감대를 형성했고, 현실 속 만남에서도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웃사이더적인 색깔이 강해 보였던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더욱 단단해져갔다.

셋.
관계 속에서 3이라는 숫자는 가장 불안전한 숫자다.
첫애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학부모 총회에 갔더니,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여자아이들은 절대 셋이 어울려 다니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셋은 기어코 문제가 생기고 만다고. 홀수여서는 안된다고. 꼭 짝수로 놀게 하라고.
그때는 피식 웃고 말았는데, 생각해보면 관계 속에 3이라는 숫자는 실제로 늘 아슬아슬하다.

나비와 모래와 공무도 결국 똑같은 무게로 서있지 못했다.
같은 무게의 마음을 똑같이 나누며 똑같은 의미로 서로를 바라보지 못했다.

갈등을 어물쩍 넘기는 화해가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그 둘에게 화가 났다. 감정싸움에 섞인 서로에 대한 애정이 제삼자인 내게도 보여서, 그 애정이 나를 우리의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는 것 같아서, 다툼의 맥락을 둘만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p. 122. < 모래로 지은 집 > 中

나비는 점점 밀려남을 느꼈다.
자신만 알 수 없는 비밀이 생기고, 자기는  모르는 감정을 공유하는 둘을 바라보면서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우린 셋이었는데, 우린 함께였는데, 어쩌자고 너희 둘은 사랑이 되어 버렸을까.

그리고 나는 왜 혼자 남겨졌을까.

물론 모래도 공무도 아무도 나비를 따돌리거나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민한 감정이라는 놈은 기어코 그 속에서 찾아내고야 만다.
누군가에게 좀 더 기울어진 마음이라든지,
색이 다른 감정이라든지,
둘만을 감싸는 아우라 같은 것들을.
그래서 결국 하나는 외로워지고 쓸쓸해지고 외톨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 감정의 미세한 틈을 들여다보고 만 죄로.

 

 그런데도 그애는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태가 났다. 그애의 넉넉함은 물질이 아니라 표정과 태도에서 드러났다. 모래는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거나 나쁘게 보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전전긍긍하지 않고 애쓰지 않았다. 관대했다.
그 관대함은 더 가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비싼 자동차나 좋은 집보다도 더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p. 118, < 모래로 지은 집 > 中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내 말에 모래는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이 모래를 어떻게 아프게 할지 나는 알았다. 나는 고의로 그 말을 했다. 너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애가 우리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네가 아무리 사려 깊은 사람이라도 하더라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p.126~127, < 모래로 지은 집 >

 

나비는 모래를 질투했다.
모래가 나비보다 더 가진 것들에 대해.
모래가 그것을 조금도 과시하지 않았어도, 나비가 모래를 진심으로 좋아했어도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틈이 있었다.
그 틈 사이로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비뚤어진 고약함 같은 것들이 삐죽 고개를 내밀곤 했다.
자기보다 더 좋은 부모를 만나,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더 밝고 다정하게 자란 모래를 보며 나비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저 나보다 빛나는 상대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시기 같은 것.

네가 아무리 검소해도, 네가 아무리 사려 깊어도, 너처럼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덜 가진 혹은 결핍된 사람들의 영역이 있는 거라고, '가난'을 무기로 모래를 따돌린다.
너의 세계는 나의 세계와 다르다고. 어떻게 해도 겹쳐지지 못하는 세계의 틈이 존재한다고.
불행이라는 이름으로만 얻을 수 있는 불행한 사람들의 우월감으로 모래의 진심을 무시했다.
그것은 열등감과 질투가 엉망으로 뒤엉켜 구겨진 마음의 한 조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이 문장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을 것 같다.
구깃구깃 구겨져 있는 내 마음의 모서리를 힘껏 눌러 펴본다.
내 마음이 구겨져있다는 것을 내가 저렇게 과시했구나 싶어서 부끄러워진다.

 

 

스물하나의 나에게 이 년이라는 시간은 내가 살아온 시간의 십 분의 일이었고, 성인이 되고 난 이후의 시간과도 같은 양이었다. 나의 선택으로 공무를 만났고, 일상을 나눴고, 내 마음이 무슨 물렁한 반죽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금씩 떼어 그애에게 전했으니 공무는 나의 일부를 지닌 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무와 떨어져 있는 나는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 식의 애착이 스물하나의 나에게는 무겁게 느껴졌다.
p. 131. < 모래로 지은 집 >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기가 막히게 스물하나의 마음을 표현해 냈을까.
어쩌면 이렇게 형태가 없는 감정들을 실제하게 보여주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감정들을 눈에 잡히도록 보여주는 문장들이 너무 좋았다.
최은영 작가의 가장 큰 힘이 바로 감정을 잡아채어 그것들을 형태가 분명한 문장으로 바꿔주는 능력 아닐까.
덕분에 나는 물렁한 반죽처럼 내 마음을 조금씩 떼어내어 건네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나의 일부라고 여겼던,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들은 지금 내 마음의 반죽을 가지고 어디에 있는 것일까.

 

네가 밉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날 밤, 나는 내가 평생을 속으로 다른 사람을 책망하며 살았다는 걸 알아차렸어. 그리고 그 책망의 무게만큼 그 사람들에게 의존했다는 것도.
나를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몰아붙이던 남자친구에게조차 나는 의존했었던 거지. 내가 내 힘으로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해 자꾸만 누군가에게 기대려고 했던 거야. 내가 기대어 서 있는 벽이 자꾸만 무너지고 벽이 아니라 나를 해치는 돌덩어리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걸 털고 일어나서 자기 힘으로 서 있으려고 하지 못했어.
p. 178~179. < 모래로 지은 집 > 中

 

내내 나비의 시점으로 보여주던 과거 속에서 유일하게 다른 사람의 마음이 선명하게 드러난 부분이다.
모두의 손을 놓으며 모래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
그 속에서 모래는 나약하고 감추고 싶은 스스로에 대해 고백한다.
그리고 나비를 얼마나 의지했는지, 사랑했는지 말한다.

그렇게 모래의 손을 놓치고서야 나비는 깨달았다.
나비에게 모래 또한 그런 존재였다는 것을.
책망하며 의지했고, 시기하며 사랑했다는 것을.
스스로 상처받으면서까지 마음을 한껏 열어 사랑했던 것은 모래였고, 스스로의 메마름으로 어떤 꽃도 피우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

 

 

어떤 사람들은 벼랑 끝에 달린 로프 같아서, 단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안도감을 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모래도 내게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에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나를 세상과 연결시켜준다는, 나를 세상에 매달려 있게 해준다는 안심을 준 사람이. 그러나 모래에게도 내가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확실할 수 없다.
p. 162~163. < 모래로 지은 집 >

 

나를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사람, 나를 세상에 매달려 있게 해주는 사람, 내가 벼랑 끝으로 낙하하지 않을 거라는 안도를 주는 사람.
과연 우리에겐 몇이나 될까, 그런 사람이.
나는 몇 개의 밧줄에 매달려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사람을 잃고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울게 되는지.
밧줄이 하나씩 끊어져 나갈 때마다 세상과 한 움큼씩 멀어지는 아찔함으로 벼랑 끝에 매달린 심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어렸을 적부터 그 밧줄이 하나씩 끊어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자랐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삶으로부터 한참 멀어져 있었다.
그 공포를 잊을 수가 없어서 가끔은 내가 모든 줄을 잘라버리고 벼랑밑으로 뛰어내리고 싶어지곤 했다.

그래서 사람에 집착하기도 하고, 그래서 되려 관계에 무심해졌다.
아무나 붙들고 싶다가도,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관계를 믿고 싶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 엄마라는 가장 튼튼한 밧줄을 잃었다.
저 암흑 속으로 곤두박질 쳐야 하는 나는 놀랍게도 여전히 세상에 매달려 있다.
아직 세상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어서, 아직 세상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남아있어서.
남편이라는 단단한 밧줄이, 아이들이라는 길고 긴 밧줄이 나를 세상과 단단히 이어주고 있다.

 

 

 

 

이 책에는 두 편의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정확하게는 동성애 중에서도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
그중 한 편인 '그 여름'은 사랑 그 자체에 포커스를 맞춘 이야기이고, '고백'은 동성애의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회(친구)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이다.

똑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되려 '고백'은 담담하게 읽어 내렸다.
잠깐 그 당시 내 표정은 어땠을지 떠올려 봤지만,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미 너무 오래된 이야기들이고, 내 친구는 묵묵히 한 사람과 굳건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나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주위 친구들 덕분인 건지, 워낙 심지가 굳은 애라서 그런 건지 여하튼 '동성애'에 관대하지 못한 나라에서 스스로가 성소수자인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다. 

 

 

< 그 여름 >

열여덟 여름에 시작된 이경과 수이의 사랑.
첫사랑의 아릿함과 서투름, 그 환희와 고통의 경계를 읽노라니 '그해 여름 손님'이라는 책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미 스토리는 다 알고 있어서 그런 것도 있고, 그 책 리뷰어들의 입을 통해 첫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이야기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 이경과 수이의 사랑 또한 '동성애'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나면, 누구에게나 있었던 아릿하고 미숙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처음엔 솔직히 퀴어 소설이라는 점 때문에 약간의 진입장벽을 느끼고 다른 단편들을 먼저 읽었다.
그리고 맨 나중에 읽게 된 '그 여름'은 편견을 버리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나가 버린 우리들의 '그 여름'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

 

이제 이경은 안다. 축구는 수이에게 선택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이의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아주 적은 수의 선택지 중에서 고른 일이었을 것이다. 수이에게 축구는 세상과 자신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단 하나의 끈이었다. 그런 수이에게 이경은 선택에 대해 말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수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p. 20, <그 여름> 中.

 이경은 수이를 사랑했지만 서로가 살아온 환경의 차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더 많았기에 조금 더 느긋할 수 있었던 이경에게 매번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는 수이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을거다.
사랑의 이름으로도 넘어서지 못하는 일이 존재한다.
또한 사랑의 이름을 달고 있기에 더 깊은 상처가 되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이경과 수이는 너무 어렸다.
사랑의 깊이는 나이와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이해의 깊이는 살아온 시간의 길이와 비례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들의 서투름은 그래서 안타깝고 안아주고 싶어진다.

 

 

- 보고 싶었어요.
이경은 아직도 그 문자를 받았을 때 느꼈던 캄캄한 기쁨을 기억하고 있다.
p. 47. < 그 여름 >

 

책을 읽다가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하고야 말았던 문장이다.
'캄캄한 기쁨'이라니.
아니, 캄캄한 기쁨을 알고 있다니.
그래 그 마음이 캄캄한 기쁨이었지.
그 마음을 표현할 말을 알지 못했었는데, '캄캄한 기쁨'이라고 명명한 순간, 이제 그 감정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만 같다.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나는 이경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이경이 그 순간 느꼈던 그 감정을 너무도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일 테지, 절망스럽고 고통스럽게 행복한 캄캄한 기쁨의 순간.

안타까운 건 이경이 수이에게 느낀 감정이 아니라 다른 사랑이 시작되는 그 곤혹스럽고 음험하며 절망스런 순간에 느낌 감정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시작이 늘 찬란하거나 아름다울 수는 없는 것이니까.
이경의 첫사랑은 찬란하게 빛나며 시작되었지만, 이경의 두 번째 사랑은 고통스러운 어둠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경은 수이가 최소한으로 상처받기를 바랐다. 그래서 수이에게 은지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했고, 그것이 수이를 위한 일이라고 철저히 믿었다. 수이를 속이지 않기로 마음먹은 순간 이경은 자기 자신조차 완벽하게 속일 수 있었다. 이경은 자신의 기만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그 거짓말이 비겁함이 아니라 세심하고 사려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려라니. 지금의 이경은 생각한다. 배려라니. 그 거짓말은 수이를 위한 것도,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이고 위선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이경은 몰랐다. 수이는 그런 식의 싸구려 거짓을 받아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사실도.
p. 52. < 그 여름 > 中

우리가 가장 진실하지 못한 순간을 고르라면, 그건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 아닐까.
그냥 사랑이 끝나버렸다고,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혹은 너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왜 있는 그대로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걸까.
가장 잔인한 방식이 가장 상대방을 존중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다.
사랑했던, 혹은 사랑받았던 사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는 사랑이 끝난 이유를 포장하지 않는 데 있다.
나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잔인함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
그게 사랑받았던 시간들에 대한 예의다.
잔인해지지 않으려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서, 상처 주지 않으려고,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인다 해도 상대방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이 끝나버린 이유를.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 깨닫게 되었다.
이별의 순간, 가장 나를 존중했던 사람은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가장 잔인하다고 여겼던 말이 사실은 가장 다정한 말이었다는 것을.

 


 

 

 

<아치디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 세 시간 동안 샤워하기. 돌아와 다시 두 시간동안 샤워하기.
그뒤로도 내가 할 수 있었던 일.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열여섯 시간 동안 텔레비전 보기.
한심하게 사는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심하게라도 살기까지 얼마나 힘을 내야 했는지, 마침내 배가 고프고 몸을 움직일 수 있고 밖으로 나갈 힘이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p. 261. < 아치디에서 > 中

그렇지만 마음이 아팠다. 삶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 가버리고 말았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미움 뿐일 때, 자기 마음을 위로조차 하지 못할 때의 속수무책을 나도 알고 있어서.
p. 274. < 아치디에서 > 中

 

아치디에서를 읽다가 펑펑 울고 싶어졌다.
실제로 눈물이 날 만큼 슬픈 글이 아님에도 어쩐지 자꾸만 울고 싶어졌다.
나는 어째서 저 마음을 알고 있는 걸까.
저런 속수무책을, 저런 끝없는 무력감을, 나는 어쩌자고 알고 있는 걸까.
그것을 알고 있어서 울고 싶어졌다.
모르고 살아도 좋을 감정을 하필 알고 있어서, 내가 저런 시간을 견뎌왔다는 게 울컥하고 치받혀서, 어딘가에서 그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안도감에, 자꾸만 울고 싶어졌다.
마침내 집 밖으로 나가고, 마침내 나를 미워하는 일을 멈췄을 때조차
내 속에 담긴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차마 입 밖으로 낼 수조차 없었던 감정의 찌꺼기들을 랄도를 통해 위로받았다.
랄도가 그 시간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더, 더 무너질 수도 있었을 랄도가 한심하게라도 버텨낸 시간들.
그 시간들을 칭찬한다.
스스로를 위로조차 할 수 없었던 하민은 이제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을까.
하민의 지금이 궁금하다.
랄도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하민도 지구 어딘가에서 하민의 삶을 굳건히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 



타인의 삶을, 타인의 생각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싶어서 책을 읽고 있지만, 실상은 가장 잘 아는 감정에 공명하고 마는 것이다.
나와 같은 감정을 만났을 때 결국 울림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보다.
최은영 작가가 보여준 감정의 결들이 나를 자꾸만 진동하게 만든다.
마음속에 물결이 일고 있다.

쇼코의 미소도 사야겠다, 읽어야겠다.
왜 아직도 그 책을 사지 않았던 걸까.

 

 

 

 

어른이 된 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p. 99. < 지나가는 밤 >

 

관계를 통해 우리들은 어떻게 변해가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나' 아닌 '너'를 통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인류가 아닌 이상,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오롯이 '나'로만 존재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인간은 누구나 '너'를 통해 '나'를 본다.
나 또한 누군가의 '너'가 되어 그가 지금 나를 통과하는 중이라면, 이왕이면 '무해한 너'가 되어주고 싶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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