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전성기로의 초대이제 우리는 세인즈버리관을 나와 본관의 서쪽에 자리 잡은 서관으로 향한다. 서관은 16세기 르네상스 전성기 회화들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분위기부터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 느껴진다. 세인즈버리관의 내부에 르네상스 양식의 핵심 개념인 ‘원근법‘이 녹아 있다면, 서관은 어느 나라 궁전에들어온 듯 화려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그림의 크기 또한 상대적으로 무척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캔버스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프레스코화와 템페라화의 한계를 인식한 화가들이 그 대안으로유화를 선택하면서 바탕이 되는 재료 역시 캔버스로 전환되었다. 특히 바닷가에 위치한 베네치아 화가들이 습기에 취약해 곰팡이가 슬기 일쑤인회벽이나 나무 패널 대신 가격이 저렴하고 운반도 용이한 캔버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티치아노를 포함한 베네치아 화파의 그림이 다른지역 화가들의 그림과 구별되는 색감과 질감을 갖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작용했다. 초상화의패러다임을 바꾸다라파엘로 (교황 율리오 2세의 초상 ‘르네상스 시대 3대 천재 화가‘라고 하면 보통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를 꼽는다. 세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나이차는 조금 있다.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23살 차이가 나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8살 차이이다. 모두 뛰어난 화가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다 빈치는 관심사가 다양해 완성작이 적다는 아쉬움이 있다. 미켈란젤로는 회화보다는 조각에 심취해 있었고 성격도 괴팍해의뢰인과 충돌도 잦았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인물도 좋은 데다 성격도 무난해 당시 의뢰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화가였다. 라파엘로를 ‘성실한 다빈치‘, ‘욱하지 않는 미켈란젤로‘라고 부른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라파엘로는 서른일곱 번째 생일날 요절하고 말았다. 라파엘로1483-1520 1483년 이탈리아 중부의 우르비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반니 산티는 우르비노의 궁정에서 활약하던화가이자 시인이었다. 라파엘로는 궁정의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며 상류층과어울리는 데 필요한 예절을 익혔다. 아버지의 인맥은 두고두고 그를 도와주었다. 아들이 똑똑하며 예술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버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라파엘로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특히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P70
후라파엘로는 화가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영향을 크게 받아, 라파엘로의초기 작품은 페루지노의 그림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1504년 피렌체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피렌체의 시청사라 할수 있는 팔라초 베키오 대회의실의 벽화를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라파엘로는 세기의 대결을 직접 보기 위해 피렌체로 향했다. 밑그림만 그려진 상태에서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오 2세의부름을 받고 로마로 떠나면서 그림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지금은 조르조바사리가 그린 벽화로 덮여 있지만, 다른 화가들이 그 밑그림을 보고 그림모사본이 있어 두 사람의 화풍을 비교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를 보면 자신의 최대 관심사인 해부학적 표현에 초점을 두고다양한 인체 포즈를 실험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다 빈치의 <앙기아리 전투>는 전투라는 소재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에너지를 병사들의 격앙된 표정과 넘치는 생동감으로 승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페루지노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라파엘로는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열심히 연구하였다. 라파엘로, <패랭이꽃을 든 마돈나>, 1506-1507년경레오나르도 다빈치, <브누아의 성모), 1478-18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묘사하는 다 빈치의 능력은 라파엘로에게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다 빈치의 부드러운 표현과 우아한미켈란젤로 (카시나 전투>, 모사본레오나르도 다빈치, <앙기아리 전투>. 모사본 - P72
색채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라파엘로의 <패랭이꽃을 든 마돈나>를 보면다빈치의 <브누아의 성모)의 구성을 차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바사리가 ‘예술가들의 학교‘라고 지칭한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 밀그림은 라파엘로에게 큰 가르침이 됐다. 카시나 전투>를 통해 라파엘로는인물들이 상호 작용하는 방법과 빛의 효과를 사용해 형태에 3차원을 부여하는 방법 등을 스스로 익혀나갔다. 교황 레오 10세가 라파엘로가 페부지노의 스타일을 넘어선 것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고 나서였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라파엘로는 스물다섯 살까지 피렌체에서 활동했는데, 초기에는 성모자상과 같은 소품으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다가 점차 큰 작품의 의뢰를 받게 됐다.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그들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확립된 라파엘로의 스타일은 당시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던 교황의 관심을끌게 됐다.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의 부름을 받아 <아테네 학당> 등의 작품으로 ‘서명의 방‘ 장식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교황의 전적인 신임을 받게 되었고, 이후 로마에 머물며 활동을 이어갔다. 1514년 도나토 브라만테가죽자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로 임명되기도 했다. <교황 율리오 2세의 초상>은 라파엘로가 스물여덟 살에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에 대해 바사리는 저서 <미술가 열전>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이그림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진실해서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을 두렵게 했다. 마치 그가 살아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사람들을 두렵게 했다는 교황 율리오 2세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무서운 교황‘ 또는 ‘전사 교황‘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율리오 2세는이탈리아 내에서 교황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부단히 싸운 사람이다. - P74
1503년부터 1513년까지 10년간 교황으로 봉직했는데, 1510년 프랑스군대에게 볼로냐를 빼앗긴 후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때까지 수염을 깎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1512년 3월 상황이 호전된 후 면도를 해서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13일흔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섭기만 한 교황이었던건 아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축을 명하고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라파엘로에게 <아테네 학당>을 그리게 해 서양미술사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으니 말이다.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정면 초상화가 아니라는 점부터가 그렇다. 과거의 초상화는 대상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위엄있는 정면상을 택했지만, 이 그림은 이례적으로 대상의 측면을 담았다. 하지만 교황의 얼굴과 옷의 단추들 그리고 오른손까지 그림의 중심선에 위치해 있어 그림의 격을 잃지 않는다. 또한 그림 속 주인공을 생각에 잠긴모습으로 표현해 심리 상태까지 보여준다는 것 또한 매우 예외적이다. 이렇게 친밀감을 자아내는 교황의 초상화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지만 이후200년 동안 교황 초상화의 모범이 되었다.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그린 <교황 클레멘스 7세>나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첸시오10세)에서 라파엘로의 영향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해설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어떤 그림을제일 좋아하세요?"였다. 내셔널 갤러리에는 좋은 그림이 정말 많아 하나만 꼽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내셔널 갤러리에서 해설을 하면서좋아하게 된 그림‘이라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바로 라파엘로의<교황 율리오 2세의 초상>이다. 처음 이 그림을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든 것은 아니었다. 라파엘로에게 기대했던 우아하고 유려한 그림이 아닌 데다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교황 클레멘스 7세 1531년경디에고 벨라스케스 교황 인노첸시오 1001860그림 속 교황이 심술궂은 노인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림 속 교황이 슬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볼 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관람객들에게도 교황이 어떤 사람으로 보이냐고 물었는데, 매우 다양한 대답이 쏟아졌다. 이게 바로 라파엘로의 저력인 걸까? 교황의 수염과 의상, 옷 가장자리의 털 모두 흰색이지만 질감을 저마다다르게 표현해낸 라파엘로의 실력도 놀랍다. 교황 왼손의 단축법 묘사는내셔널 갤러리의 같은 방에 있는 동시대 화가들의 그림과 비교해볼 때 월등히 뛰어나 감탄이 절로 나온다. 게다가 녹색과 빨간색, 흰색, 황금색만쓴 절제된 색채와 선명한 보색대비는 강렬하고 현대적인 느낌까지 들게했다. 그림 속 바탕을 보면 교황의 상징물인 삼중관과 천국의 열쇠를 그렸다가 녹색 물감으로 덮은 흔적이 보인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 속에서 원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 P76
에 있는 교황 율리오 2세의 초상>의 사본이라고 여겨졌는데, 엑스선 검사 등을 거친 끝에 이 그림이 원본임이 밝혀진 것이다. 의자의 황금색 도토리 두 알은 교황의 성인 델라 로베레della Bowe암시한다. 도토리는 떡갈나무의 열매이고 이탈리아어로 로베레ver는맥갈나무이기 때문이다. 교황 율리오 2세가 원래 로베레 추기경이었다고알려주는 셈이다. 서양미술사의 연구자들은 라파엘로가 죽은 1520년을기점으로 하이 르네상스가 끝났다고 본다. 하이 르네상스는 레오나르도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한 1495년부터 라파엘로가 죽은해까지 약 30년의 기간을 말한다. 지난 수세기 동안 유럽의 주요 미술학교들은 라파엘로의 그림을 회화의 정석으로 여겼으며, 그의 그림들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완벽한 그림‘으로 평가받아왔다. 조각에 가까울수록훌륭한 그림이다미켈란젤로 <예수의 매장<예수의 매장>은 미완성 그림이다. 미완성임에도 당당하게 내셔널 갤러리의 한쪽 벽면을 빛낼 수 있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회화 작품이 그만큼 드물기 때문이다.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벽화인 <최후의 심판>을 제외하고 현존하는 미켈란젤로의 패널화는 딱 세 점인데 그중 두 점 <예수의 매장>과 <맨체스터 마돈나>를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다. 나머지한 작품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도니 톤도>이다. 그래서 내셔널갤러리는 우피치 미술관과 더불어 르네상스 3대 천재 화가의 그림을 모두소장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피에타 1498-1409미켈란젤로(도니돈도), 1500-1506미켈란젤로는 생전에 이미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재능이 뛰어났다. 그의 공식 데뷔작은 스물네 살에 작업한 <피에타>이다. 이탈리아어로 ‘동정‘, ‘연민‘ 등을 뜻하는 ‘피에타‘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를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을 말한다. 통상적으로피에타는 슬픔, 고통 등의 감정을 담지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고요하고 절제된 미감을 보여주어 매우 독창적이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를제작하고 4, 5년 정도 로마에 머물다 자신의 고향인 피렌체로 가 (다비드)를 작업한다. 거대한 대리석 하나로 조각한 이 작품은 높이 5.17미터에 푸게도 6톤이 넘는 대작이다. 1504년 제작된 이후 1873년까지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 전시됐지만 대리석이 대기 오염과 산성비에 취약하여 지금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실내 전시되고 있다. <예수의 매장>은 1500년 로마의 성 아고스티노 성당의 장례 예배당을위한 제단화로 의뢰받은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작업에 착수했지만, 앞서 언급한 <다비드> 제작을 위해 1501년 피렌체로 떠난다. 5년 후 로마로서 9 - P78
미켈란젤로 (예수의 매장), 1500-1501년경돌아온 미켈란젤로는 성 아고스티노 수도사들에게 착수금을 돌려주었다. 이렇게 미완으로 남은 <예수의 매장)은 죽은 예수를 그림의 오른쪽 위로보이는 바위산 동굴 무덤으로 옮기려고 십자가에서 내리는 순간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예수의 왼쪽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사도 요한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가 자신이 새상을 떠난 뒤 어머니인 마리아를 보살펴달라고 특별히 부탁할 정도로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예수의 제자 중 가장 어렸기에 그림에서는 항상 붉은옷을 입은 수염이 없는 젊은이로 묘사된다. 예수의 머리 위에 있는 사람은 아리마태아의 요셉으로,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의 시신을 인계받아 자신이 쓰려고 했던 동굴 무덤에 매장하도록 도운 사람이다. 그림의 왼쪽 아래에서 흡사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과 예수를 매장할때, 무덤이 비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에 모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복음서마다 예수의 비어있는 무덤을 발견한 첫 증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3.4세기 무렵부터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른 죄지은 여인‘과 혼동되기 시작해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참회 혹은 묵상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거나 예수의 발치에서 향유병과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미켈란젤로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의 가시 면류관과 꽃을 보며 묵상하는 모습을 표현할 의도였다. 그림의 오른쪽 공간에는 마리아를 그리려 했는데, 마리아를 그리려면 ‘울트라마린 블루‘가 반드시 필요했다. 청금석에서 추출되는 울트라마린 블루는 당시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값이 비싸서 ‘천국의 색상‘이라 불리며 성모 마리아의 의상에 주로 쓰였다. 미켈란젤로의 다른 미완성작 <맨체스터마돈나>에도 울트라 마린 블루 색상이 없는 것을 보면 가장 비싸고 구하기 힘든 안료를 마지막에 쓰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 P80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1512<예수의 매장)은 ‘조각에 가까울수록 훌륭한 그림이다‘라는 미켈란젤로의 평소 신념을 잘 보여준다. 인물들이 리드미컬하게 배열된 가운데 인물 사이에 공간이 거의 없어 물감으로 칠해진 조각을 보는 듯하다. 오른쪽상단의 무덤 입구 부분을 그릴 때도 바위에 칠해진 물감을 긁어냈는데, 이또한 조각하며 재료를 제거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이 작품이 미완성으로남은 덕분에, 미켈란젤로가 유화인 <예수의 매장>을 그리며 템페라화를그릴 때처럼 한 부분을 완성한 후 다음 부분으로 넘어간 것을 확인할있다. 템페라화는 수정이 어려워 각 부분을 차례로 완성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수정이 용이한 유화에서도 같은 방식을 썼다는 점이 흥미롭다.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 자신의 무덤을 제작해달라고 했다. 미켈란젤로는 40명 이상의 조각이 들어가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황 율리오 2세는 자신의 무덤 제작대신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려달라고 했다. 원래 시스티나 성당의천장에는 밝고 푸른 바탕에 황금별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상당의 남쪽베이 바깥으로 기울면서 천장에 균열이 생겨 천장화를 다시 그려야 했는데 이를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한 것이다. 자신을 화가라기보다 조각가라고 여긴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제안을 여러 번 거절했지만 허사였다. 결국4년에 걸친 어려운 작업 끝에 1512년 11월 1일.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가대중에 공개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넓은 천장 중앙을 크게 9면으로 나누고 다시 길게 3면으로 나눠 성경 속에 등장하는 300명이 넘는 인물들을완벽하게 표현해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서도 미켈란젤로는 해부학을 통한 인체 구조 연구를 바탕으로 극적이고 생생한 움직임을 구현하려애썼다. 프레스코화 경험이 부족했던 미켈란젤로는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으로 인해 한쪽 눈을 실명했으며, 척추가 뒤틀리는 고통도 겪었다. 혁신과 도전의예술가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르네상스 시대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의<최후의 만찬>은 곰브리치가 ‘인간의 천재성이 만들어낸 위대한 기적들중 하나"라 극찬했으며 198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작품이다. <최후의 만찬>은 그의 후원자였던 밀라노의 스포르차 공작의 요청으로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수도원 식당의 벽화로 그려졌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 당시 수도원 식당에 자주 그려지는 소재였다. 식사 중 예수가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난 후 열두제자의 반응을 그리고 있는데, 하나의 화폭에 담긴 예수와 제자들의 다양한 표정. - P82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로마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과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지를 다스린대제국이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으면서 로마제국을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누어 두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4세기 말 훈족의 서진으로 일어난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서로마제국 내에서 게르만족의 영향력이 커졌고, 이는 결국 서로마제국을 붕괴시키고 말았다. 서기 476년의일이다. 동로마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했지만, 세계사에서 서로마제국의멸망은 고대의 끝과 중세의 시작을 의미한다. 800년 12월 25일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는 카롤루스 대제클로비스의 세례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게르만족이 유럽 전역에 세운 여러 나라 중 가장강성했던 곳은 프랑크 왕국이었다. 프랑크 왕국의 왕 클로비스 1세는 알레마니족과의 전쟁에서 힘겹게 승리한 후, 이를 부인의 신앙 덕분이라 여기고 496년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는 서유럽 전역이 기독교화되는 단초가되었고, 클로비스 1세가 세례를 받은 랭스 대성당은 이후 프랑스 왕들이대관식을 치르는 정통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카롤루스 1세는 800년 크리스마스에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아 카롤루스 대제가 되었다. 이는 형식적으로나마 서로마제국의 부활을 의미했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은 843년베르됭 조약으로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으로 분할되었으며, 이는 오늘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모태가 되었다. - P107
막시밀리안 1세(1459-1519)SEVE막시밀리안 1세 가족 초상화962년 독일 왕국의 왕 오토 1세가 교황에게 왕관을 받으면서 신성로마제국이 시작되었다. 게르만족의 전통에 따라 선거권을 가진 제후인 선제후가 독일의 왕을 뽑고, 이 독일의 왕이 교황에게 왕관을 받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것이다. 1250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2세가 사망한 후, 선제후들은 뛰어난 인물이 즉위하는 것을 원치 않아 왕의 선출을 23년이나 미루었고, 이를 대공위시대라 부른다. 기다림에 지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직접 황제를 지명하려 하자, 선제후들은 빈한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백작을 선택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 스위스 북부 지방에서 시작된 작은 백작 가문에 불과했다. 쉰세살의 나이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루돌프 1세는 5년 후 전쟁을 일으켜보헤미아, 오스트리아 일대를 영지로 삼으면서 오스트리아로 본거지를옮겼다. 루돌프 1세의 노력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펠리페 1세(미남왕 펠리페 1478-1506)스페인 공주 후아나(광녀 후아나. 1479-1555)정도로 강대해졌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세습하기 위해서는 150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랜만에 배출한 영웅이었다. 그는 3대에 걸친 혼인동맹의 성공을 통해 영토를 급격히 넓혀갔다. 첫 번째혼인동맹은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의 마리였다. 부르고뉴 공국은 호담공le Téméraire 이라 불린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 때 시작됐다. 그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 장 2세와 함께 백년전쟁의 푸아티에 전투에참가했다. 비록 아버지와 함께 영국의 포로가 됐지만 용감한 활약에 대한보상으로 부르고뉴 지방을 ‘왕자령‘으로 받게 된다. 왕자령이란 자치권이인정되지만 후계가 단절되면 프랑스 왕실에 귀속되는 영지를 말한다. 부르고뉴는 독일어로 부르군트, 영어로 버건디라 하는데 이름에서 짐작 - P109
수 있듯 프랑스의 대표적인 포도주 산지이고 양모산업 등이 발달한 플랑드르 지방까지 지배하고 있어 프랑스 왕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부르고뉴의 마리는 부르고뉴 공작 샤를 1세의 외동딸로, 부르고뉴 공국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샤를 1세는 프랑스에서 부르고뉴를 독립시켜 왕국으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 대한 야심으로 딸 마리와막시밀리안 대공의 약혼을 추진했다. 1477년 샤를 1세가 전쟁 중 사망하자프랑스의 왕 루이 11세가 왕자령인 부르고뉴 공국을 되찾으려고 군대를보냈지만, 막시밀리안 대공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부르고뉴 공국을 지켜냈다. 마리는 셋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낙마사고로 사망했지만, 마리가 남긴 자녀들은 또 다른 혼인동맹의 기회를 제공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펠리페 1세는 스페인 공주 후아나와 딸 마르가레테는 스페인 왕자 후안과 결혼했다. 후안은 후사 없이 사망했지만, 펠리페는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2남 4녀를 낳아 스페인의 영토가 합스부르크 가문 차지가 되었다. 후아나는 콜럼버스를 후원했던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페르난도 2세의 차녀였는데, 남편의 바람기에 집착한 나머지 ‘광녀‘라 불리기도 했다. 1504년 어머니 이사벨 1세 사후 카스티야의 여왕을 비롯해15개의 작위를 물려받았지만 남편이 죽은 후 광증이 심해져 일흔세 살의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40년 넘는 기간 동안 수도원에 갇혀 살아야 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손자 카를을 포르투갈 공주와 카를의 남동생인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헝가리 공주와 그리고 카를의 여동생 마리아 폰 외스터라이히를 보헤미아, 헝가리 왕자와 결혼시키는 것으로 3대에 걸친 혼인동맹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이번에도 페르디난트는 3남 10녀의 자식을보았으나 보헤미아 왕자 러요시 2세는 스무 살의 나이로 후사 없이 전사했다. 혼인동맹을 통해 스페인과 보헤미아, 헝가리 지역까지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면서 16세기 초에는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거의 전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혼인정책을 두고 어카를 5세(1500-1558)리석은 너희들은 열심히 전쟁을 하라. 우리 현명한 오스트리아는 결혼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438년부터 1806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이어갔으며, 페테르 파울 루벤스나 디에고 벨라스케스 같은 걸출한 화가들의 후원자이자 예술품 수집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최고 전성기는 ‘미남왕‘ 펠리페와 ‘광녀‘ 후아나의 아들 카를 5세 때였다. 그는 열여섯 살에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고, 열아홉 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카를 5세는 어머니 후아나가 수도원에서 사망한 다음해인 1556년 아들 펠리페에게 스페인과 플랑드르를,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물려주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는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으로 분리되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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