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원전 사고와 독일의 핵 정치 원전 사고는 독일에서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 닿을 수 있는 나라 일본에서 일어났지만 정작 사고에 대한 위기의식은 독일 내에서 더 급박하게 퍼져나갔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독일 정치계와 언론, 국민들의 핵 정치에 대한 요구와 변화의 물결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때론 감동적이고 때론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후쿠시마 제1원전이 폭발하던 2011년 3월 12일, 슈투트가르트에서는 이미 6만여 반핵주의자들이 인간 사슬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네카어베스트하임 원자력발전소를 시작으로 빌라 라이첸슈타인까지 장장 45km에 걸쳐 남녀노소 불문하고 손에 손을 잡고 인간 띠를 만들었다. -210쪽
주말에는 여행이나 가족 중심의 휴식을 중시하는 독일인이 귀중한 토요일 하루를 포기하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독일 뉴스 전문 채널nTV는 하루 종일 일본 지진과 원전 폭발의 심각성을 알리는 특별방송을 내보냈다. 당초 주최 측은 시위 참여 인원을 4만명 으로 예상했으나 실제 시위에서는 2만 명이 더 늘어난 6만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예측하지 못한 2만 명이 당일 후쿠시마의 원전 폭발 소식을 전해 듣고 슈투트가르트로 달라간 것이다. 이 시위를 시작으로 원전 폐지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기자회견을 통해 "확실한 안전장치를 갖춘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 이와 같은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에 독일도 마음 놓고 있을 수 없다. 철저하게 안전 점검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 이라고 밝히기는 했지만 그녀의 더 큰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앙겔라 마르켈 연합 정부는 당시 2022년까지 원전 가동을 중단하기로 한 지난 정부의 핵 정책을 전면 파기하고 17개 원자력발전소의 가동 시한을 최장 14년까지 늘리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나서 '전력 회사와 더러운 거래를 했다' 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211쪽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반핵 열기가 일본 지진으로 더욱 고조되고 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자회견 때마다 "원전의 안전에 대해서는 티끌만 한 실수라도 덮으려 하지 말고 숨겨서도 안 된다. 누구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터부시해서는 안 된다" 라고 강조했다. -211쪽
한국 보수와 진보의 싸움은 여전히 이념과 돈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또 최근에 등장한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 등이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독일 진보와 보수의 가장 두드러진 대립은 진보를 대변하는 반핵주의와 보수파의 핵 찬성론 혹은 유보론이었다. 국민의 공감을 얻어내고 마음을 움직이는 데 핵만큼 뜨거운 감자는 없었다. 그런 독일인에게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강 건너 불이 아니었다. 사고 후 바로 독일은 비상시국에 돌입했다. 정부 각료는 주말도 반납했으며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일곱 개 원전이 가동 중지되었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이 일어나고 사흘 만의 일이었다. -212쪽
독일에서는 자기 집 앞 눈을 쓸지 않아 지나가던 행인이 미끄러져 사고가 날 경우 그 책임을 집주인이 전적으로 져야 한다는 것이다. ... 쓰는 것만으로는 불안해서 소금까지 뿌렸다. 그야말로 부지런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독일식 존경스러운 이웃이 된 것이다. 이 나라에 사는 동안 이런 비슷한 경험을 종종 했다. 그때마다 감탄하는 것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심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회를 위해 필요한 규율을 작은 것까지 개인의 도덕에 맡기지 않고 법으로 규정지어 놓은 세밀함이다. 또 아무리 보잘것없는 작은 법이지만 법을 무서워하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놀랍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이 사회를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살 만한 나라로 만들어 주는 근간이 바로 엄격하고 주도면밀한 이들의 법이요, 또 그 법을 말없이 지켜주는 사람들의 준법정신이다. -223-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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