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아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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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보시라. 풍아송. 風雅頌. 아,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들인가. 난 제목 보고 이렇게 간판을 다는 작가가 쓴 책이라면 틀림없이 대박일 것이라고, 사람의 마음을 저리게 할 아름다운 스토리를 담은 숨겨진 명작일지도 모른다고 벌컥벌컥 김칫국을 들이켰다. 바람 풍風, 맑을 아雅, 칭송할 송頌.
 나 어려서 책장에 4서가 있었다. 논어, 맹자, 주역, 대학. 그리고 3경도 있었다. 시경, 서경, 역경. 당연히 두 개 더 포함해 5경도 있었다. 예기, 춘추. 문제는 너무 어려서 그냥 그런 책이 있었다는 것이지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거다. 그러니 제목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아름다운 얘기니 뭐니 할 수 있었다. 풍, 아, 송이란 각각 시경을 구성하고 있는 편들인데, 풍은 남녀 간의 정과 이별에 관한 노래, 아는 공식 연회에서 쓰는 의식가儀式歌, 송은 종묘 제사에 쓰는 악시樂詩, 라고 두산 백과사전에 나와 있다. 물론 송이 악시를 얘기한다고 두음법칙이 적용된 즐거울 락樂을 감안해 ‘즐거운 시’라고 번역하면 큰 잘못임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듯.
 소설 <풍아송>은 중국의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양커 부교수를 주인공으로, 이이가 바로 <시경>의 해석과 번역을 일생의 업으로 삼아 연구실에 틀어박혀 오랫동안 ‘맹렬정진’하여 <시경>에 관한 한 득도의 경지에 오른 권위자인데, 드디어 오랜 연구를 끝내고 벽돌 세 장 분량의 불세출의 저작 《풍아지송風雅之頌―<시경> 정신의 근원에 관한 연구》의 마지막 구두점을 찍고 그간의 노고에 대하여 아름다운 아내의 따뜻한 살이란 (힘들게 공부한 남편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어리광적 기대를 품고 냅다 교수 사옥으로 달려가 서슴지 않고 열쇠를 돌려 문을 열어 현관에 들어가 보니, 어라, 거실 소파 위를 한 무더기의 남자 옷과 여자 옷이 뒤섞여 어지럽게 점령하고 있었고, 아내 자오루핑의 눈부시게 희고 통통한 몸뚱이 위에 장작개비처럼 비쩍 마른데다 피부도 거무튀튀한 리광즈, 자기가 부교수로 근무하는 중국 최고 명문대학 칭옌淸燕대학 부총장이 포개져 있었던 거다. 이렇게 해서 600쪽에 달하는 긴 장편소설은 시작한다. 리광즈 부총장이 업무상 위계로 양커의 아름다운 아내 자오루핑을 성폭행 했다면 그나마 괜찮을 텐데, 남달리 야망에 불타는 자오루핑은, 남편은 아직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자기 경력과 꿈을 이루기 위해 리광즈의 권력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 그러니까 주고받은 거다. 하지만 막상 자기 아내가 나보다 돈도 많고 높은 지위를 향유하고 있지만, 못생기고, 늙었고, 침대 위 스테미너도 형편없을 것 같은 허접스런 작자와 바로 내 침대 위에서 숨이 넘어가는 콧소리를 내는 라이브 쇼를 직접 자기 눈으로 본 젊고 튼튼하고, 싸움도 잘하는 양커. 일단 뒤로 돈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돌려 “먼저 옷 좀 입으시오.”라고 주문하고 문 밖으로 나가 잠시 시간을 준다. 옷을 다 입었을 즈음해서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간 양커. 그는 눈앞에서 자기 아내와 정을 통한 학교 최고의 권력자, 그러나 이젠 약점을 단단히 틀어쥐게 된 부총장 리광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식인으로서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첫째,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둘째,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주십시오. 셋째, 무릎을 꿇고 간청하건대 제발 다음부터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주십시오.”
 정말로 아주 힘차게, 마치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산 전체를 정복하려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리광즈 부총장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왜 책을 읽으면서 싱클레어 루이스가 쓴 재미있는 책 <배빗>이 생각났을까. 당연히 공통점이 있어서다. 배빗이나 양커, 둘 다 ‘속물’이기 때문. ‘속물’은 사실 좋게 표현하는 것이고 속물 아주 가까이, 손톱으로 그은 금 넘어 바로 저 편에 어떤 작자가 있느냐 하면 ‘잡놈’ 혹은 ‘잡년’이 있다. 작가 옌렌커가 ‘경성’ 또는 ‘황성’이라고 표시했으나 틀림없이 베이징일 도시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인간들은 빠짐없이 ‘속물’, 한 걸음 더 나가 ‘잡놈’과 ‘잡년’이며, 초장부터 양커의 아내 자오루핑과 리광즈를 잡놈과 잡년의 대표선수로 소개해마지않는다. 여기까지 양커는 그냥 속물 정도. 오직 하나, 자신이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인 칭옌대학에 20년간 몸을 담았고 그 가운데 10년 동안은 부교수로 학부생과 석사, 박사 과정자들을 가르쳐왔으며, 희대의 저작이 될 《풍아지송風雅之頌―<시경> 정신의 근원에 관한 연구》를 탈고한 세계 최고의 <시경> 전문가인 지극한 지식인이란 허위의식에 완벽하게 몸과 마음이 절어 있는 인간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양커로 말씀드리자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수 끝에 드디어 중원의 바러우산맥을 둘러싼 지역 모두에서 최초로 대학에 입학한, 그것도 최고 명문인 칭옌 대학에 입학한, 개천에서 난 용의 자격으로 드디어 황성으로 떠날 시기에, 이 양 부교수는 약혼상태였던 것이다. 약혼녀 링쩐의 가무잡잡한 얼굴은 전적으로 햇볕에 타서 검어진 것이란 건 들판에서 링쩐이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옷자락을 양 손으로 활짝 벌려 커다랗고 붉은 브래지어로 감싼 토플리스를 연출했을 때 알았는데, 옷에 가려진 피부는 “아주 희고 섬세하며 비단처럼 발그레”한 정도를 넘어 “한백옥의 표면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광채가” 날 정도였던 거다. 둘 다 벽촌에서 살았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을 양커가 칭옌대학의 학생으로 베이징에서 살게 된다는 건 일자무식의 약혼녀, 공중화장실에서 남男과 여女를 구분하지 못해 약혼자가 저기서 보고 있는데도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망신을 당하는 링쩐에겐 자신의 순정 위에 날벼락이 떨어졌을 것이었다. 실제로 경성으로 떠나는 전날 밤, 둘은 여인숙에 방 둘을 얻어, 당연히 양커가 약혼녀 링쩐의 방에 들게 되지만 링쩐은 한 마디 한 마디 우렁찬 구절로 또박또박하게 힘주어 다음과 같이 말했던 거였다.
 “양커 오빠, 솔직히 말해봐요. 나랑 결혼할 건가요? 결혼하고 나서 이혼할 수도 있잖아요. 날 아내로 맞아 변심하지 않고 평생 함께 살겠다는 한마디만 해주면 오늘밤 내 몸을 오빠에게 줄게요. 내가 가진 모든 걸 하나도 남김없이 다 줄게요.”
 양커는, 그냥 잤다.
 대학에서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대학의 권력자들의 보신을 위해 대표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탈출에 성공해 고향으로 돌아간 양커는, 동네뿐만 아니라 현 단위에서 유일한 대학교수로의 위치를 향유하게 되는데, 여기서 자신도 모르게 속물의 경계를 넘어 잡놈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다른 사람의 감상은 모르겠고, 내 생각에 양커 역시 자신이 갑의 자리, 지역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허위의식뿐이지만 그것도 권력이라고 갑의 위치에 놓이자마자 자신의 생각엔 정당하고 지식인다운 행위라 여길지 모르겠으나, 독자의 눈엔 기꺼이 잡놈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어떤 행위를 보고 잡놈 운운하느냐 하면, 직접 읽어보시라 할밖에. 그의 온갖 기괴한 행위와 한 여인에 대한 철저한 갑질을.
 그런데 이 단계에서 묘한 건, 양커가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인물이란 거. 작가 옌렌커가 의도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째 자꾸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 양커의 정신이 맑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히 정상적인 수준으로 보아달라고 조르는 거 같은데, 나는 도무지 그렇게 읽히지 않는다. 역시 대뇌의 특정부분에 모종의 이상적異常的인 화학작용이 자주 발생하는 거 같다. 이거까지 말하면 정말 안 되는데, 어떻게 할까. 얘기를 할까 말까. 좋다. 이 독후감을 보시고 그래도 책에 관심이 있는 분은 독후감 읽은 다음에 한 석 달 열흘 지난 다음에 책을 읽으시라는 조언과 함께라면 그나마 좀 낫겠다,는 전제로 얘기한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는 아니고 유토피아, 또는 율도국을 발견한 양커. 거기서 족장 노릇을 좀 하다가 또 다른 유토피아를 향해 떠나는 마지막 장면. 소위 말하는 열린 결말을 독자에게 선물한 거까진 좋았지만 조금만 더 헷갈리게 해줬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여간, 풍아송風雅頌. 이 멋진 제목만 가지고 섣불리 선택했다가는 불륜, 매매춘, 살인 등등을 구경할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신 분은, 아직 독서 전이라면 이 독후감을 먼저 읽은 것이 조금은 다행일 수 있을 터. (이 맛에 독후감 쓰고, 그걸 서재에 올린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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