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키핑
메릴린 로빈슨 지음, 유향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릴린 로빈슨의 처녀작. 이이가 쓴 <길리아드>를 읽고 기독교적 세계관에 아주 학을 뗀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사실 <하우스 키핑>을 읽으려다가 마우스 클릭을 잘못해 <길리아드>를 샀던 거다. 그런데 <길리아드>를 너무 재미없게 읽어 정작 마음먹었던 <하우스 키핑>을 읽기 위해서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앞서 읽은 책이 얼마나 재미없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 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3년 전, 메릴린 로빈슨의 <하우스 키핑>이 타임지인가 어딘가에서 선정한 100대 문학작품에 포함됐다는 걸 알고 궁금증이 도졌었다는 거. 그런데도 <길리아드>에 관한 추억이 하도 험악해서 이거, <하우스 키핑>은 정가의 37% 가격인 5천 원 주고 헌 책 샀다. 지금, 후회막급. 이런 책은 새 것으로 사고, 3년 전에 산 새 책은 헌 것으로 사야했던 거다. 난 타임지 같은 기관의 100대 명작, 이딴 거 안 믿는다. 아니, 그런 평가가 내 취향하고 같지는 않다는 걸 이해한다. <앵무새 죽이기>와 <동물농장>을 어떻게 명작이라고 하는지, 난 도무지 이해 못하는 인종이다. 근데 <하우스 키핑>은 정말 대박.
 일반적으로 ‘하우스 키핑’을 한국말로 하면, 아니, 인터넷 뒀다 뭐하나, 네이버 검색해보니까, “살림, 집안일, 집안 돌봄, 시설관리” 등으로 쓰는데, 이 책에서 ‘하우스 키핑’은 흠, 물론 그런 의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각개 단어의 뜻, 그러니까 하우스를 키핑하는 일, 집안을 간수하고 보살피는 일, ‘집안일’ ‘살림’ 대신, “집‘House' 및 집을 구성하는 가족을 지키고, 유지하고, 심지어 사라진 가족을 기다리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거 같)다.
 콩가루 집안을 소개한다.
 미국 중서부 지역에 에드먼드 포스터 씨가 살았다. 광막한 평야지대에 바람이 한 번 불었다하면 거칠 것 없이 몰아치는 거센 바람의 발톱을 막아낼 방법이 없어 땅을 깊게 파고 집을 지어 창문이 지표면과 같게 만든, 이른바 반 지하 집에서 살았는데, 이 양반이 하도 평야지대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평소에 산을 동경해 세상의 모든 유명한 산을 (사진이나 그림을 보며) 스케치하는 취미가 생겼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해 꽃피는 봄이 오자 에드먼드 씨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열차 정거장으로 냅다 달려가 매표소에 돈을 한 움큼 내밀더니, 산이 있는 곳으로 가는 차표를 달라고 했단다. 그래 그 길로 열차를 타고 떠난 곳이 미국 북서부 워싱턴 주의 시애틀 부근이라고 짐작하는 가상 소도시의 가상 촌 동네이자 넓은 호수가 있는 완전한 산골마을 핑거본이었다. 여기사 에드먼드 씨는 어여쁜 아내 실비아와 결혼을 하고,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 핑거본에서도 높은 지역에 터를 골라 벽돌로 튼튼한 집을 지어, 깨가 쏟아지지는 않지만 그냥 덤덤하고 성실한 철도원으로 살며 딸을 셋 두었다. 첫째가 몰리요, 둘째가 주인공이자 화자 ‘나’ 루스의 친엄마인 헬렌이고, 셋째가 또 다른 주인공 혹은 주연급 조연 실비였다. 첫째가 16세, 둘째가 15세, 막내가 13세, 즉 세 딸이 자랄 만큼 자랐을 때, 에드먼드 씨가 타고 근무하던 열차가 핑거본의 넓은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웅혼하게 달리다 과감하게 호수 안으로 자유낙하를 시도하여 에드먼드 씨는 기어이 실비아를 과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잠수부가 며칠을 찾았지만 단 한 구의 시신도 건지지 못해, 과부가 된 동네의 여인(들)은 시신 없는 장례를 치룰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조금 지나자 맏딸 몰리는 과감하게 개종을 하고나서 선교사들을 따라 태평양을 건너 중국 땅으로 건너가 경리직원 정도의 자리를 잡았고, 둘째 헬렌은 도시로 가 일단 결혼부터 한 다음 딸만 둘을 두니 첫 아이가 화자 ‘나’루스요, 작은 애가 루실이다. 막내 실비 역시 머리 굵어지고 곧바로 도시로 가더니 결혼은 분명히 했는데 아이도 없고, 남편도 없고 그냥 정처 없이 떠도는 여자가 돼버렸다. ‘나’의 엄마 헬렌의 남편(그러니까 ‘나’ 루스와 동생 루실의 친 아버님)은 벌써 가정에서 도망해 새장가 가버리고 이제 도무지 혼자 두 딸을 키우기 벅찬 지경에 몰리니, 친구의 차에 둘을 데리고 핑거본의 엄마(‘나’의 외할머니)한테 찾아와 엄마가 없는 사이에 두 딸을 집에 둔 채로,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아버지의 영혼이 헤엄치고 있을 거 같은 호수로 돌진해버린다.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하자. 이건 책의 앞부분, 전체의 10분의 1 가량만 읽으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니까 그냥 전제사항만 일러두었다고 여기시면 된다. 그래서 ‘나’ 루스와 루실은 할머니하고 살게 되고, 할머니가 죽은 다음엔 전 재산을 상속받은 상태에서 할머니의 두 시누이들, ‘나’의 대고모 두 분의 보살핌을 받다가, 자기 엄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한 번 편지를 보낸 막내 이모 실비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잘 읽어보자.
 할머니 살아생전 호수의 영spirit이 소용돌이치며 열차를 빨아들였고, 몇 년 후 거의 같은 장소에서 둘째 딸이 또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는데, 두 경우 다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시신은커녕 열차와 자동차도 건져낼 수 없었다. 그럼, 정말 죽은 건가? 호수의 밑바닥엔 아버지와 둘째 딸의 유해가 서로 빈 동공을 바라보며 가라앉아 있을까? 혹시 할머니는 숨이 다 하기 전까지 남편과 딸이 어디선가에서 낡은 옷에 뭍은 먼지를 툭툭 털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까, 하고 늘 창가의 소파에 앉아 들녘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중국으로 가버린 맏이 몰리는 이젠 거의 완전히 남이고, 어느 날 문득 집을 나가 도시의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인식 망에서 사라져버린 막내 실비. 죽었다는 말은 없지만 정말 살아 있기는 한 것일까. 그리하여 할머니 실비아 포스터 여사께선 전 재산을, 직접 낳은 두 딸을 완전히 배격하고 둘째 딸이 낳은 두 손녀에게 유증해버린다. 직접 만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이 둘 말고는 없었으니까.
 여기에서 독후감을, 누구나가 읽을 수 있는 공간에서 쓴다는 조건 때문에, 그만 둘 수밖에 없다. 몇 십 년 전 손으로 쓰던 독서일기라면 하고 싶은 얘기까지 다 하겠지만,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도 이 책의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인에 공개하는 서재에 독후감을 올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소설이다. 미국 북서부 지방의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여성 3대에 걸친 가족과 가족애에 관한 이야기. 외로움의 피를 이어가는 여인들의 고독과 방랑과 기다림의 안타깝고 애잔한 엘레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