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노소스 궁전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9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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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잔차키스. <그리스 사람 조르바>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 사실 나도 <....조르바> 말고는 <성 프란치스코> 하나밖에 더 읽어보지 못했다. <성 프란치스코>를 읽으면서 알았는데, 카잔차키스의 작품 세계는 거칠게 ① 일반 그리스 사람 이야기, ② 기독교 성인들 이야기, 그리고 ③ 희랍 신화에 대한 것들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 ①과 ②는 읽어봤고, 나머지 ③을 위해 고른 책이 <크노소스 궁전>이다. 며칠 전 알라딘에 들러 중고책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하나 더 사왔다. 이건 몇 달 뒤에나 읽을 듯.
 이 책을 선택할 때, 거의 언제나 출판사 책 소개를 별로 읽지 않는 관계로, 설마 카잔차키스가 그리스 신화를 다시 썼겠어? 그것도 숱한 드라마 등의 예술작품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미노타우로스, 테세우스, 아리아드네 이야기를? 이렇게 생각하면서, 신화에 빗댄 19세기말, 20세기 초를 무대로 그리스와 크레테 섬을 그렸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진짜로 서기 수 세기 전, 정말로 아테나이의 왕자 테세우스가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에 잠입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느 한여름 정오였다. 크노소스 위에 걸려 있는 태양은 그 유명한 크노소스 궁전에 빛을 내리비추었다. 청동 양날 도끼, 거대한 정원, 화려하게 채색된 지붕이 이글거리는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번쩍거렸다.” (7쪽)


 첫 문단. 이 책 가운데 가장 힘들게 읽었다. 역시 <그리스 사람 조르바>의 영향이 상당히 커서, 생각(또는 기대)을 20세기 초 그리스와 크레타 섬에서 근 3,000년 뒤로 넘겨 기원 수 세기 전 미노타우로스 신화의 무대로 갑자기 바꿔야 하는, 당혹감을 피할 수 없었다. 우습게도 아주 평범한 위의 글을 서너 번 읽어야 했다는 건 사실이다. 큰 덩치와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미남자 테세우스가 크노소스 궁전에 잠입해 여기저기를 염탐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낮잠 시간에 잠이 오지 않아 창문으로 정원을 내다보고 있는 아리아드네의 운명적인 눈길에 테세우스가 포착되고, 이어 테세우스를 미행하고 있는 근위대장 말리스가 눈에 들어온다. 당연히 아리아드네는 이미 테세우스가 염탐하는 장면을 몇 번 본 적이 있어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으나 아직 본인 스스로는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에는 미노타우로스의 탄생 설화, 즉 포세이돈의 미움을 받은 미노스 왕의 아내 파시파에가 대 발명가 다이달로스가 만들어준 나무 암소 속에 들어가 황소와 교접해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를 낳았다는 얘긴 나오지 않는다. 전설이나 설화는 대개 특정 사실을 암시한 것이 일반적이라서, 나는 파시파에가 정말로 황소와 교접을 해 괴물을 낳은 것이 아니고, 불륜을 통해 덩치가 크고 사나운 ‘가문의 골치덩이’를 생산해 이를 수치스럽게 여긴 미노스 왕이 특별 감옥인 미궁에 그를 가두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누구나 추리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 책에선 미노타우로스를 사람의 몸과 황소의 머리를 갖춘 흉물이자 괴물이고 정말로 1년에 아테나이에서 온 미청년 일곱 명, 미소녀 일곱 명을 산 채로 잡아먹어야 하며,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만든 미궁에 갇혀 있고, 미노타우로스가 죽으면 곧이어 크레타 섬이 멸망할 것이란 신탁이 내려오고 있다고, 신화에 아주 유사한 전제를 깔고 있다. 읽기에 따라서 아주 오래 전부터 크레타 섬에 있었던 괴물인데 미노스 시대에 와서 미궁에 갇히게 됐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또 하나 내가 알고 있던 신화와 다른 것은,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이별 장면. 신화에서는 낙소스 섬에 도착한 테세우스, 아리아드네 커플이 이미 할 거 다 해놓고, 아리아드네가 곤히 잠든 사이 이젠 그녀에게 싫증이 난 테세우스가 낙소스 섬에 공주 혼자만 남겨 두고 토껴버렸지만, 카잔차키스는 아량을 베풀어 테세우스가 낙소스 섬에 도착해서 항해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충하는 동안 아리아드네가 산보를 나갔다가 배를 한 척 발견했는데, 온통 포도덩굴로 치장을 한 배 위에 근사하게 생긴 남자가 옆에 앉은 표범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에 홀랑 반해 그 길로 디오니소스라고 짐작되는 인물을 따라 영원한 항해를 떠났다고 해놓았다.
 결정적인 장면은, 역시 굉장히 궁금해 했던 일종의 수수께끼였던 것으로, 크레타의 식민지 비슷한 처지에 불과해 미노스 왕의 명령을 좇느라고 아테나이 왕 아이게우스의 외아들 테세우스마저 7명의 남자 희생물 가운데 포함시켜야 했을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한 다음 어찌하여 그리 빠른 시기에 크레타를 멸망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물론 이를테면 아테나이는 초승달, 크레타는 보름달, 뭐 이런 비유도 가능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카잔차키스는 최신식 무기의 등장을 생각해냈다. 그게 무엇인지는, 당연히 안 알려줌. 그것마저 일러드리면 이미 숱하게 알려진 신화를 소설로 만든 문학작품을 찾아 읽겠는가 말이지. 여태까지 소개한 내용도 이미 스포일러가 과한 감이 듦에야.
 문제를 푸는 중요한 인물의 이름이 누군가하면, 아리스티데스다. 그런데,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나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영웅 아리스티데스가 아니라 소설의 가상인물이다. 그러니까, 막강한 최신 무기에 대해서는 힌트는 하나도 드리지 않겠다는 얘기. 이걸 우리는 먼저 읽은 자의 특권이라고 부른다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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