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미나 마르케스 세계문학의 숲 14
발레리 라르보 지음, 정혜용 옮김 / 시공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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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발레리 라르보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는데, 책 앞날개 보면 1958년에 당시 벨기에 박람회가 선정한 프랑스 대표작가 10명에 포함된 사람이라고 한다. 이 평가가 정당하다고 가정하면, 철학자이면서 작가이기도 한 빛나는 별들은 빼고라도, 라블레, 몰리에르, 라신, 볼테르, 위고, 뒤마, 발자크, 모파상, 플로베르, 졸라, 프루스트, 뒤 가르, 베를렌,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기타 등등 가운데 누가 탈락의 고배를 마셨을까? 흠. 인정한다. 요새가 올림픽 시즌이라서 그런가, 꼭 등수 안에 들어야 환호하는 세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 어쨌든, 라르보가 10대 프랑스 작가의 범주 안에 들던 들지 않던 간에, 프랑스 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가라면 말씀이지, 어찌하여 아직 대한민국에서 그의 번역물이 <페르미나 마르케스> 하고, 번역에 관한 중요한 에세이라 칭하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호 아래> 딱 두 권밖에 없느냐 하는 것도 문제다. 하긴 라르보의 생애가 작가뿐만 아니라 번역가로도 명성이 높아 번역을 통한 프랑스 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고 하니 저서가 그리 많지 않을 수 있는 개연성은 있을 수 있겠다. 사실 책 한 권 읽으면서 이런 거 아는 게 중요하지는 않다. 독자의 유일한 권리는 즐기는 것. 지금부터 즐겨보자.
 저기 라틴 아메리카에 누에바 그라나다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름을 새로이 ‘콜롬비아’라고 고치고, ‘세계만방에 고하야 콜롬비아의 독립국임과 콜롬비아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바 있었다. 이 콜롬비아에서 지배층으로 사는 인간들은 대서양 건너 동쪽에 있는 스페인 출신 백인으로, 현지 원주민을 하도 잔혹하게 학살한 결과 원주민의 개체수가 엄청 줄어들어 도무지 요구 노동력을 확보할 수 없어지자 아프리카에서 새로이 흑인 노예까지 수입해가며 무진장한 부를 축적한 인간들이었다. 이 살인마들이 신세계에서 무한대로 금덩이의 홍수를 맞으면서도 꿀리는 것이 하나 있으니, 지옥(아니면 적어도 아수라) 같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식들에게 도무지 좋은 교육을 시킬 수 없다고 판단해 아들의 경우 열 살이 넘자마자 유럽 대도시(근방)의 사립 기숙학교로 유학을 보내곤 했다 한다. 물론 저자 발레리 라르보가 어려서부터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각국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페인어를 쓰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들이 대다수이고 나머지는 페르시아, 인도말레이반도, 중국 등의 아시아 출신, 그리고 극소수의 프랑스 청소년들로 구성된 남학생용 사립 기숙학교 생토귀스탱 중등학교를 작품의 무대로 설정했다. 여기서 아시아 학생들은 하도 인간 같지 않아 정말로 단 한 번도 해당 지역 학생들은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주로 라틴 아메리카 출신 학생(악당)들과 프랑스 현지 학생의 일화로 작품이 채워지는데, 멀리는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가까이 알랭 프루니에가 쓴 <대장 몬느>를 통해 읽어본 듯한, 아니면 비슷한 범주의 소설이라고 해도 크게 까탈은 잡히지 않겠다. (물론 완전 아마추어 독자인 내 생각이다.) 아, 역시 책 앞날개 보니, 이 작품이 나온 다음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다룬 문학이 봇물을 이루”었다고 하며 그 속에 프루니에의 <대장 몬느> (책 속엔 <몬 대장>)을 언급한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책 한 권을 읽으며, 과거로 돌아가 다시 본고사 볼 것도 아닌데 이딴 거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10대 남자들, 열 살이 넘자마자 부터 19세 다 자란 청소년들이 모여 사는 기숙학교. 더구나 공동침실 형태의 기숙사. 바야흐로 사춘기에 접어든 숱한 어린 수컷들의 모임에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아마 여성들은 별로 감이 잡히지 않겠지만, 바로 폭력성이다. 수컷들의 폭력성은 내가 흔히 잘 쓰는 말로, 두 발로 걷기 이전부터 유구하게 수컷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기질로, 우리처럼 유교적 장유유서의 질서가 전혀 없는 유럽에선 기숙학교 내 서열은 전적으로 힘과 덩치와 돈으로 결정이 됐다. 1번이 힘(과 깡다구), 2번이 덩치, 3번이 돈. 이것들 가운데 하나도 없는 아이들은 그냥 주면 먹고, 때리면 맞고, 비웃으면 한 번 씨익 쪼개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작은 정글을 생각하면 딱 맞는다. 딱 두 가지 예외가 있는데, 하나는 남들보다 월등하게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 (사례를 좀 쓰다가 얘기가 길어질 거 같아서 삭제했다.) 탁월하게 공부 잘하는 딱 한 명 정도는 정글의 법칙에서 제외된다. 다른 한 경우는 매우, 매우, 그리고 매우 아름다운 누나, 누이동생을 둔 경우.
 생토귀스탱 중등학교에 콜롬비아에서 온 열두 살짜리 어린 마르케스가 있어 하고 한 날 아이들한테 모욕을 받고 얻어터지기를 일 분 동안 뛰는 맥박 수만큼 당하고는 했다. 근데 어린 마르케스에게 작은 누나와 특별하게 아름다운 큰 누나가 있었고,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들은 나이 40줄에 든 고모하고 매일 같이 학교를 방문해 일정 시간 어린 동생하고 산책을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학교의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당연히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어린 수컷들만 바글거리는 기숙학교 교정에 매끄러운 흰 피부와 고급 드레스, 잘 화장한 아름다운 미모의 잘 빠진 아가씨가 살랑살랑 산책을 하니 아이고, 청춘들, 그 모습만 보고도 죽어 자빠지는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아가씨들이 어린 마르케스의 누이들임을 알고 아이티 포트로프랭스 출신의 건장한 흑인 학생이 과감하게 마르케스의 팔을 비틀어, 즉, 고문을 통해 누이의 이름을 밝혀내기에 이른다. 작은 누이가 필라르. 큰 누이가 바로 페르미나. 바로 그날부터 페르미나는 생토귀스탱의 모든 침대 시트를 새벽마다 뻣뻣하게 풀을 먹이게 하는 베누스의 대관을 쓰게 된다. 작품이 간행된 것이 1911년. 당연히 시트 풀 먹이는 장면은 나오지 않으며, 전적으로 내가 상상하기에 그렇다는 거니까 오해는 하지 마시라. 건전한 성장소설이다.
 꽃이 있으면 벌 나비가 꾀는 법. 책에서는 대표선수 세 명이 등장한다. 학급에서 공부도 제일 잘하고 생기기도 끝장을 내게 잘 생겼으며, 나중에 아버지가 멕시코의 장관 자리에까지 오르는 멋쟁이지만 몽마르트르 언덕의 숱한 유흥가에서 질탕하게 놀 줄도 아는 매력남 산토스. 그의 조연(또는 이른바 ‘꼬붕’)으로 앞에서 말한 바 있는 포트로프랭스 출신의 흑인 학생 드무아젤은 빼고 얘기하자. 언제나 최우등의 학업을 지속하며 자신이 비록 외모는 별 거 없지만 카이사르와 보나파르트를 꿈꾸는 시골부자의 외아들이자 프랑스 인이라기보다 로마 제국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사실상의 주인공 조아니. 마지막으로 학교 최고의 열등생으로 난폭한 급우들로부터 폭력과 멸시, 조롱으로 언제나 죽고 싶어 하다가 페르미나를 본 순간, 저 여자를 정복하면 순간에 자기 팔자가 역전이 될 거란 생각에 들뜬 열세 살짜리 꼬마 카미유.
 페르미나는 누구인가. 특정한 인물이라기보다 청소년기의 한 가지 환상. 결코 닿지 않는 무지개 같은 몽환적 숭배의 대상이라 할 수 있을까?
 세월은 흘러흘러, 화자가 충분히 나이 들고, 추억의 작은 정글 생토귀스탱 중등학교는 어느덧 폐교가 되고 이제 폐허인데, 그곳을 찾아 한 시절을 회상한다. 옛 시절의 소년들은 지금, 혹은 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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