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녀의 짓궂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판탈레온과 특별 봉사대>, <염소의 축제>, <세상 종말 전쟁>,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읽은 요사. 이 책의 ‘옮긴이의 말’에도 나오지만 <염소의 축제>와 <세상 종말 전쟁>이 정치와 혁명 또는 쿠데타 같은 한 국가의 거대 서사를 그렸다면 나머지 세 편은 사랑과 섹스에 관한 가비야운 농담 또는 한 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사가 매우 특별한 소설가, 한쪽으론 매우 정치적, 진보적(아니면 적어도 반독재적)이면서도, 한 편으론 사람살이의 지극한 관심이자 피할 수 없는 딜레마이며 기회이며 때론 인생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터닝 포인트가 될 사람 사이의 사랑과 성에 매우 관심이 많은 작가였기 때문에 이 두 방면을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그럼 이 책의 성격은 이미 나온 것이다. 사랑과 성에 관한 사람의 한 살이라는 거. 근데 제목에 ‘나쁜 소녀’라고 했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설레발꾼으로 호가 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나쁜 소녀’라고 할 정도면 우리 같은 동양의 예의바른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철없는 ‘나쁜 소녀’하고는 아예 비교를 하지 말아야 하는 수준. 어떤 나쁜 소녀인가 하면, 영어로 이렇게 얘기하면 혹시 알아들으실 수 있을지 몰라? Born to be a bad girl. 엄마 배 속에서 나올 때부터 거짓말의 혓바닥을 달고 나온 예쁘고 날씬하고 작은 몸매의 약간 갈색 아가씨. 매끄러운 피부에 삼삼한 조명이 비추면 차라리 초록색은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오른쪽 아랫배에 맹장수술을 한 실금이 나 있으며, 음부 주위엔 숱이 많지 않은 음모가 깔려있고, 향내 나는 제모한 겨드랑이, 살짝 튀어나온 척추 뼈마디, 벨벳처럼 보드랍고 탱탱한 엉덩이에다, 하이고, 19세 미만도 이 독후감을 읽을지 모르는데 여기까지 써야하나 싶지만 엇다 모르겠다, 좁디좁은 생식기까지 겸비한(남자는 뭐, ‘속 좁은 여자’를 좋아한다나 어쩐다나) 위세를 떠느라고, 유사시엔 상대방 생각은 눈곱만큼도 해주지 않고 그냥 발랑 누워 다리만 약간, 어깨넓이만큼 벌린 채, 본격적인 식후행사의 순서만 주둥이로 우리의 불쌍한 남자 주인공에게 명령하는 나쁜 여자로 성장하고, 이어서 나쁜 중년을 거쳐 한 인생 마무리하는 소설.
 오틸리아, 라는 이름의 페루 소녀. 얘가 이른바 도시빈민의 딸인데 엄마가 부잣집 입주 요리사로 갈 때 죽자사자 엄마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바람에 어영부영 함께 부자동네의 괜찮은 집에서 살게 된다. 마음씨 좋은 주인집 아줌마가 체격 차이 때문에 딸이 입지 못하는 옷을 오틸리아에게 입게 해서, 이제 (하여간에) 부잣집에서 공립학교 다니는 얼굴만 예쁜 소녀가 옷도 예쁘게 입고 다니게 되어 동네 소년들은 이 소녀, 자신이 칠레에서 이민 온 귀족 출신이라고 맹랑한 구라를 치고 다닌 ‘릴리’라는 이름의 소녀만 지나갔다하면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바지춤에 두 손을 질러놓은 채 침만 질질 흘리게 되는 사태로 치닫게 된다. 물론 단 한명도 릴리가 ‘오틸리아’라는 웃긴 이름을 본명으로 가지고 있는 페루 촌년인줄도 모른 채. 나? 나야 책을 다 읽었으니 무려 470쪽을 넘어서야 알 수 있는 내용을 이리 미리 쓸 수 있는 거다. 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소년들 가운데 주인공 ‘나’, 이름이 ‘리카르도’인 ‘나’도 포함되어 있어서, ‘나’는 나쁜 소녀의 완전한 대척점, 왜 그런 거 있잖나, 보색대비 이딴 거. 색깔들의 동그라미 완전 반대편에 있어서 두 지점에 있는 색을 옆에 가져다 놓으면 가장 눈에 잘 띄는 현상, 그 대척점에 있는 ‘착한 소년’의 자리가 주어진다.
 예전에,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이 읽고 계시는 독후감을 쓰고 있는 쇤네 학창시절에, 교수 한 명이 아내가 죽자 인생에 대하여 심각하게 절망해 아직 덜 자란 두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호텔(인지 콘도인지 하여간 숙박시설)방을 빌려 혼자 자다가 깜깜한 새벽에 그냥 떨어져 죽은 적이 있다. 이때 교수들 술만 마셨다하면 죽은 이를 이해하는 파와, 뭐하는 짓이냐고 남은 아이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지탄하는 파가 있었다는데, 난 이해파와 지탄파의 말다툼 같은 건 졸업하고 나서야 알았지만 하여간, 만일 이 재미난 책 <나쁜 소녀의 짓궂음>을 지탄파가 읽었다면, ‘착한 소년’이 평생을 걸쳐 코피 쏟아가며 허덕이는 사랑에 관해 이해하기는 조금 힘들지도 모른다. 나? 나는 당연히 이 책을 읽으면서 절절 공감한 걸 보니까 이해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뭐. 쉽게 얘기해서 이래봬도 순정파란 말씀.
 이렇게 질금질금만 얘기하니까 감질나시지? 그러라고, 감질나시라고 슬쩍 슬쩍 이야기를 흘리기만 하는 거다. ‘릴리’라는 가짜 이름으로 동네 소년들을 평정한 오틸리아가, 오필리아도 아니고 오틸리아는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본명은 되게 웃긴 이름이라고도 하는데(당연히 난 이 이름이 왜 웃긴 이름인지는 모른다), 점점 자라, 도무지 가난한 집구석에선 견딜 수가 없어하다가 천하의 진리, 삶의 불편을 겪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고, 자기가 돈을 많이 벌 재주가 없으면 돈 많은 놈을 꼬드겨 같이 살면 된다는 걸 알아차려서 500쪽이 넘어가는 장편소설을 만들게 되는 거다. 때는 1960년대. 당시 세계 경제 블록에서 페루의 위치나, 페루 내에서 나쁜 소녀의 집구석이나 거기서 거기. 일단 페루에서 떠야겠다고 결정한 나쁜 소녀는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쿠바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우선 프랑스 파리로 들어가게 된다. 왜? 당시 케네디가 쿠바를 봉쇄했기 때문에 쿠바에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파리를 경유하는 비행 편밖에 없었단다. 근데 소년시절부터 파리에서 사는 걸 일생의 로망으로 여겼던 로베르토 역시 딱 그 시절에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 소설작법 제 1장 3절에 씌어있듯이 주인공들은 서로 만나게 되어 있는 법. 그러나 아무리 많은 ‘빠리의 밤’이 와도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쁜 소녀는 게릴라전 훈련을 받기 위해 쿠바로 떠나 다시 페루 해방 전쟁을 치러야 하는 운명. 에잇, 여기서 그만 해야 하는데, 입이 근질거려서 비록 스포일러일지라도 이번 한 번만 말해드린다. 쿠바의 산악지역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아야 하는 나쁜 소녀. 아시다시피 페루 반군들은 80년대 들어 완벽하게 거덜이 나서 거의 대부분이 밀림 속 어딘가에서 죽어버렸는데 주인공이 그리 허망하게 죽으면 말도 안 된다. 그래서 나쁜 소녀 릴리 또는 오틸리아는 쿠바의 혁명영웅 카를로 시엔푸에고스의 동생 오스마니 시엔푸에고스의 2인자 차콘 사령관과 뜨거운 사랑을 맺어 게릴라 훈련을 면제받는다. 대단하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쿠바 현지에 나가있던 유네스코의 고급 외교관 로베르 아르누 씨, 당연히 나이 차가 무척 많이 나는 프랑스 아저씨한테 드디어 안다리후리기를 성공시켜 결혼에 골인, 기어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해 다시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드디어 우리의 주인공, ‘착한 소년’ 로베르토와 밤의 역사를 만들게 되는 것. 이때부터 착한 소년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나쁜 소녀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한 번 더 사랑하고 이왕 사랑한 거 또 한 번 사랑하고, 사랑한 김에 또 사랑하고, 마지막으로 사랑하고, 그래서 죽도록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앞에서 말했듯, 이해파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반면, 지탄파 입장에선 놀고 있다, 세상 어디에 이딴 사랑이 있어, 이렇게 비판할 수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난 생각이 하나 들었는데 그걸 소개하자.
 아시다시피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정치에도 깊은 관심을 쏟아 1990년 페루 대통령 선거에 출마에 결선투표까지 갔다가 결승전에서 일본 이민 출신 알베르토 후지모리와 대결해 38%의 득표로 아깝게 준우승에 그친 경력이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책에서 나쁜 소녀의 돈 많고 힘 있는 애인들 가운데 그녀를 가장 악랄하게 착취한 지독한 가학성 변태로 일본 야쿠자 두목이라고 소개되는 후쿠다로 설정해 나쁜 소녀에게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성적 폭력을 가하게 만들었다. 왜 일본인으로 했을까? 백인이 아니라. 혹시 후지모리, 일본인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 아니었을까? 그냥 이딴 생각 해봤다.
 이렇게 자신을 칠레 소녀라고 사기치고 다녔던 페루를 탈출한 나쁜 소녀는 이후 게릴라였다가, 마담 아르누였다가, 또 누구였다가, 다시 누구였다가, 또다시 누구였다가 막 이렇게 진화하며 심신이 고갈되는 다분히 교양소설의 경지에 달하는데, 언제나 그녀를 받아주고 절망하고 후회하고 또다시 받아주던 좋은 소년 로베르토를 나쁜 소녀는 사랑했을까?
 혹시 당신이 이해파가 아니라 지탄파라면, 그래서 이 책을 재미있게 읽지 못할 확률이 있다면 하나만 마음에 새겨두시라. 즐거움과 아름다움은, 특별한 경우에는 그걸 즐거움과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다가온다는 거. 이렇게 얘기하니까 근사하지? 쉬운 말로 다시 쓰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재미있게 읽으시라는 뜻.
 이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렇다는 말씀은 아니고, 가끔가다가 적절하게, 물론 내 수준에서 적절하다는 뜻인데, 야한 베드 씬, 제법 나온다. 작가가 요사 선생이니까 당연하다. 혹시 이런 장면 싫어하시면 일독을 피하시고, 관심이 있으시면, 당연히 꼭 읽으셔야지. 선택은 당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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