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러스크로노스
윤해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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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하루 안에는 읽지 못할 줄 알았다. 근데 읽었다. 흥미진진. 내 독서 목록에 이 작가를 보탠다는 것이 축복이다. 출근해서 아침 일 끝내고 (짱 박혀서) 독후감 쓰고 있는데, 아우, 졸려 돌아가시겠다. 여덟 편의 중단편을 싣고 있는 소설집. 본문만 430쪽(7~437). 판형이 작아도 하루 만에 읽기는 녹록하지 않다. 게다가 스토리 라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민등록초본이나 가족관계증명서 같은 공적인 존재의 사실이 확실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골 때리는 작품들. 그러나 여기저기서 어딘가 봤던 장면들도 심심찮게 등장하기도 하고, 문장의 음악성, 회화성, 그 경계의 깊은 골짜기에서 외줄타기 해야 하는 진퇴양난도 겪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읽기에 제일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결코 쉽지 않은 윤해서의 소설을 읽으며 시간관념 또는 시간의 1차원적 수열에서 작가와 동시에 벗어날 각오가 되어 있어야한다는 점이었다. 작가는 아예 솔직하게, 소설집의 서론 또는 서문격인 첫 단편 <테 포테레케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시간이 사라지자 세계는 일그러진다. 세계는 작은 한 점으로 쪼그라들고 세계는 무한대로 확장하고 세계는 한쪽 면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흐름의 방향을 잃고, 세계는 모든 시간대의 그물에 걸려 사방으로 마구 튀어오른다.
 문장에서 시간이 사라진다.
 문단에서 시간이 사라진다.
 모든 시간이 동시에 출몰한다.
 나는 오직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건너뛴다.
 미지의미이미지의미이미지의미이미지의미이미지의미
 모든 시간이 한꺼번에 흘러간다.)”  <테 포케레케레> 18쪽


 책의 제목 《코러스크로노스》가 코러스(합창)과 크로노스(시간의 신)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시간의 합창"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무식한 나는 크로노스가 시간의 신인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나가면서 위 인용문이 이 소설선집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할 것이란 생각이 번쩍 들었다. 무식한 나도 그랬음에, 이 독후감을 읽는 분들도 《코러스크로노스》의 일독에 머뭇거릴 필요가 없을 듯하다.
 책에서는 “코러스크로노스”가 무엇을 뜻할까. 다음과 같다.


 "코러스크로노스.
 시간합창,
 골목 입구에 눈에 띄는 간판이 걸려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코러스크로노스가 있는 골목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골목 안쪽으로는 곧 재건축에 들어갈 것 같은 4, 5층짜리 빈 건물들이 이어져 있었다." <테 포케레케레> 27쪽.


 도심 한 가운데 있는 일종의 화장장이다. 어떤 것이든지 태울 수 있는 장소. 물론 태우지 않고 그냥 구경만 해도 괜찮은데 그때에도 입장료 3만원은 꼭 내야 한다. 그런데 뭘 태워. 당신 마음이다.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도 상관없다. 해진 신발짝도, 구멍 난 양말도, 며칠 동안 갈아입지 않은 지저분한 팬티도. 100년간 여성을 구속해왔던 브래지어도. 별 필요 없는 것 같은 왼쪽 다리 한 짝? 뭐 그것도 괜찮고, 하다못해 완전 비어버린 내 해골도 그냥 태워버릴 수 있다. 앞에서 얘기한, 내 마음, 즉 나의 마음, 염통과 허파 사이에 있다고 믿는 마음도 확 태워버리면 그만이다.
 “코러스크로노스”가 들어있는 단편 <테 포케레케레>는 이 책에 두 번 실려 있다. 맨 처음과 맨 나중. 그러니까 음악으로 얘기하면, 4악장 교향곡을 예로 들어 얘기하자면, 4악장의 끝부분에 1악장 주제선율부터 각 악장의 중요부분을 다시 환기시킨 후 코다(끝 부분)로 치닫는 형식과 유사하다. 시 한 수로 예를 들면 수미쌍관법? 실제로 그렇다. 책의 마지막 <테 포케레케레>는 발표시기가 2011년이지만 앞의 <테 포케레케레>는 미발표.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 단지 제일 앞에서 한 번 얘기했던 것을 마지막에 다시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나? 천만에. 아홉 편의 중단편 가운데 여덟 편을 읽은 다음 제일 마지막 <테 포케레케레>를 보면 책에서 전반적으로 이야기했던 것들하고 조금씩은 다 연결이 된다. 2010년에 등단하여 2017년에 첫 소설집을 낸 이 과작寡作의 작가는 자신이 쓰고자하는 몇 편의 작품들(맨 뒤 작가의 말을 보면 이이가 직장생활을 하는 거 같다. 그러니 장편소설을 쓰기보다 몇몇 주요 주제를 구상해놓고 그것들을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 수도 있다)을 통합하는 작품을 하나 구상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궁금증은 여태 발표하지 않고 이 책에서 비로소 처음 모습을 보인 앞의 <테 포케레케레>. 그걸 먼저 썼을까, 아니면 이 책을 발간하기 위해 앞에서 언급한 ‘문장과 음악과의 경계선에서의 줄타기’를 위해 썼을까, 여기에까지 미쳤던 거다.
 책에서는 아무것도 규정된 것이 없다. 예컨대 중편 <아>를 보면, 사실 제목 “아”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작가가 친절하게 알려줄 리도 없고, 알려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테 포케레케레>에선 시간이 난장판을 벌이더니 <아>에서는 또 인물(들)과 단어 등이 마구 헷갈리는 경지에 이른다. 중편의 등장인물(등장인물이 있기는 있다!) 가운데 ‘말로’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이 나온다. 말로? 난 번쩍 앙드레 말로를 생각했지만 별 말씀을. 물론 앙드레 말로일 수도 있고, 한 여성의 이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쓰는 말, 언어일 수도 있다. 윤해서는 이렇게……


 "말로는 이렇게 썼다. 말로의 말로. 그야. 밤이 시체처럼 팽창한다. 그야. 밤이 시체처럼 팽창해. 말로는 마를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른다. 때로 거칠게 야, 하고 소리쳐 부르고. 그, 라고 조심스럽게 적기도 한다. 말로가 나를 조심스럽게 부를 때 나는 헤롯이거나 다윗이거나 말로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그’에 속해 있고. 그는 아무것도 몰라.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지."   <아> 111~112쪽


 "말로의 말로. 죽은 붕어가 물에 뜬다.
 그래서, 그러므로,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
 모든 접속 부사들 속에 ‘그’
 내가 속해 있어.
 나는 말로의 말로. 문장과 문장을 연결한다. 문단과 문단을 연결한다. 부채와 부채를. 부재와 부재를. 이 도시의 말로. 나는 당신과 당신 사이에.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잇닿아 있다." <아> 187쪽


 말로는 이렇게 썼다. 말로의 말로. 근데 이건 알고 보니까 모든 ‘관계’를 이어주는 접속사 속에 있어서, 문장과 문장 사이, 말과 말 사이, 심지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거나 “있”고 싶은 무엇. 사람일 수도 있고, 언어(말)일 수도 있고, 문장이나 문단일 수도 있는 것. 즉 모든 것을 소통시켜주는 역할을 대표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헷갈리시지? 직접 읽어보시라. 윤해서. 이 젊은 작가의 골 때리는 아홉 편의 중단편들을 (그나마)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내공, 문장과 문단을 만들어내는 공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만일 현대 프랑스 작가가 이 비슷한 작품을 내서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 나왔다면 내가 그걸 읽고 이리 감탄할 수 있을까? 백퍼 아닐 거다. 윤해서의 문장을 읽어보면 독후감의 앞부분에서 얘기한 것처럼 음악성, 문장의 음악성과 문단의 음악성, 즉 문장과 문단에 음정과 박자만 주면 곧바로 음악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리듬을 탄다, 라고 주장할 수도 있으리. 심지어 난 책의 특정 작품은 소설이라고 단언할 수 없기도 하다. 반시反詩, 또는 반시半詩. 역으로 반소설 또는 반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하나 만들어 그 그룹에 집어넣고 싶기도.
 더 할 얘기, "【∞】왜상", "읊" 등등 무지 많은데, 독후감이 너무 늘어지는 거 같아서 이쯤에서 막 내린다. 모쪼록 뜻 있으신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읽고 난 다음 당신의 감동 혹은 동의, 그것도 아니면 감상은 내가 책임지지 않는 거, 그건 아시지?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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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6 1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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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6 1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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