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지바르 또는 마지막 이유 대산세계문학총서 82
알프레트 안더쉬 지음, 강여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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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지바르. 동 아프리카 케냐 밑에 있는 나라 탄자니아의 한 주州 또는 해당 주의 주도州都. 제목을 왜 이렇게 지었느냐 하면, 등장인물 가운데 열여섯 살 먹은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어부, 그러나 왕년에 공산주의자였고, 지금, 1937년 현재 나치에 완전하게 장악된 독일에서 유대인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핍박을 받아 제대로 걸리기만 하면 다하우 수용소 등지에서 고문 받아 죽거나 굶어죽거나, 아니면 별 이유도 없이 시비 걸려 얻어터져 죽는 걸 하도 많이 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정신건강에 문제가 많은 아내 때문에 숨죽여 살고 있는 성실한 성격의 어선 선장, 크누트센 씨의 조수로 있는데, 이제 자기 딴엔 다 큰 거 같아 소년 특유의 로망, 북해나 대서양 혹은 인도양 등 광활한 바다 건너 잔지바르, 보르네오, 서인도제도 등을 건넌방 가듯 항해하는 꿈, 이름하여 호연지기를 가지고 있다.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면서 세상을 향한 건강한 꿈을 꾸는 소년, 즉 독일의 건강한 미래를 상징할 수도 있는 젊은이의 로망을 작품의 제목으로 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디트란 이름의 아름다운 유대인 아가씨. 성경에서 나오는 유디트처럼 일찍이 몸종 하나 데리고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진영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로 그를 유인, 단칼에 모가지를 뎅겅 잘라 들고 온 용감무쌍한 캐릭터가 아니라, 독일 내 예절과 공손, 겸손, 미덕, 아름다움 등을 상징하는 여성으로, 함부르크로 추정되는 도시에서 스웨덴으로 도망가라는 어머니를 차마 홀로 두고 떠날 수 없어 엄마 말을 듣지 않자, 용감한 엄마가 딸 앞에서 독약을 먹고 죽는 바람에 모친의 유지를 받아 밀항을 위해 북해를 마주한 코딱지만 한 어촌이자 엄마 젊은 시절 잠깐 놀러와 본 적 있는 레리크에 도착. 과연 스웨덴으로의 밀항이 가능할까?
 목사 헬란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두 다리를 몽땅 잘리는 부상을 입어 의족을 단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목회를 이어가다가, 당뇨가 진행되는 바람에 절단 부위에 심각한 부종이 발생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기 시작한 인물. 당뇨 합병증으로 더 자를 다리도 남아있지 않아 이젠 대퇴골에 이은 내장기관의 감염으로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 근데 정작 그의 가장 큰 근심은 나치에 의하여 퇴폐미술로 찍혀버린 조각가가 만든 <책 읽는 수도사>를 교회에서 몰수하겠다는 친위대의 강제 요청이다. 명색이 목사라 수도사 조각상을 끔찍한 범죄 집단인 나치에 넘겨줄 수는 없고, 그렇지 않다면 붙잡혀 악랄한 고문 끝에 생을 끝내야하는 진퇴양난의 지경을 맞는다. 그리하여 배를 가지고 있는 믿음직한, 그러나 사상적으로 종교를 절대 믿지 않는 동네 빨갱이 크누트센 선장에게 조각상을 가지고 스웨덴 교회에 전달해주기를 부탁한다. 이 과정에 자기가 믿는 신은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도저히 스스로 만들었다고 하는 인간에게 관심이 있다고는 볼 수 없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고 확신하는 단계로 치닫는, 몸과 마음과 정치적 상황이 모두 벼랑 끝에 서있는 단계에 이른다.
 이 <책 읽는 수도사>가 어떤 목각품이냐고? 한 번 보시라.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가로 찍힌 에른스트 바를라흐의 <책 읽는 사람>.

 

 

 


 이 외딴 어촌 레리크에 지독하게 평범한 외모와 입성과 행동거지를 갖고 있는 공산당 핵심, 일찍이 모스크바 코민테른에 유학한 전력까지 갖춘 그레고어.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난 후 흑해 주변에서 백군과의 전쟁에도 참여한 투사이지만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연인이 정치투쟁으로 죽임을 당했고, 나치에 의하여 뿌리까지 잘린 독일 내 공산주의 운동에 숨이 막히는 상태. 공산당원에게 가장 유용한 접선 장소로 교회당을 선택하여 크누트센 선장을 만났으나 서로 번하게 알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행동을 할 것이며 무슨 전략을 사용할 것인가. 그러다가 <책 읽는 수도사> 조각상이 눈에 띄고 목사와 유대인 유디트 아가씨와 조각상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알게 된 그레고어. 이 공산당 핵심세포는 한 유대인과 기독교를 위해 과연 행동과 전략을 마련할까?
 이런 이야기. 총 여섯 명의 등장인물을 소개했다. 소년, 크누트센 선장, 유디트, 헬란더 목사, 그레고어, 책 읽는 수도사. 책의 주제는 도망치는 일이다. 소년은 지루하고 염증 나는 작은 어촌 레리크에서 대양으로, 크누트센 선장은 현재의 질서에서 숨죽여 살아남아 어떻게 해서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도래를 기다리기 위하여, 유대인 유디트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독일을 떠나기 위하여, 목사는 이젠 기대해볼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의 손과 관심으로부터, 그레고어 역시 완전한 불모지 독일 내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을 벗어나기 위하여, 책 읽는 수도사는 기어이 자신을 유폐시키거나 폐기시키기 위해 눈알이 벌건 나치의 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들은 도망친다. 그리하여 나치 치하의 독일은 내일의 희망(소년)도, 미덕과 예의(유디트)도, 종교(헬란더 목사)도, 평온한 삶(크누트센 선장)도, 평등(그레고어)도, 지식 또는 지식의 유지(조각상)도 모두 독일로부터 벗어나는 꿈을 꾸는 것이다.
 올해 들어 나치 치하의 독일을 그린 소설을 많이 읽는다. 왜 젊은 시절엔 이런 책을 읽을 수 없었을까? <잔지바르…>도 1957년 작품이다. 세월이 이리 많이 흐른 다음에야 번역이 되고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거다. 1957년부터 참 오랜 세월, 이리 좋은 작품을 단 한 가지 이유, 공산주의자가 선한 역을 한다는 진짜 별 거 아닌 이유로 국민의 읽을 권리를 모른 척해온 대한민국의 입법부와 행정부. 참으로 딱하다. 그들 때문에 나 역시 나치 치하의 독일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집단최면에 걸려 나치에 동조하고 열광한 줄로 오해해왔다. 심지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1970년대와 80년대엔 금서였을 정도. 알고 보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 독재에 저항하고, 투쟁하고, 그래서 고문 받고 수용소에 갇혀 거의 짐승 수준의 고통을 받다가 유대인처럼, 유대인들과 함께 죽어갔다. 그걸 왜 몰랐을까. 미국과 유럽의 1차대전 전승국들이 독일 히틀러 집단의 전비확장을 눈감아 준 이유도 여태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말이지.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전집이 좋은 것이, <잔지바르…>가 190쪽 정도라 웬만하면 이것만으로 한 권의 책을 내겠는데, 아무래도 한 권의 책으로는 마땅하지 않겠는지 안더쉬의 단편집 <프로비던스에서의 나의 실종 - 9편의 이야기>를 통째로 뒤에 붙여 기어이 400쪽을 넘겼다. <프로비던스…>는 1968년부터 1971년 사이에 쓴 9편의 중단편을 싣고 있는데, 우연인지 처음부터 구성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서로 연관이 있는 듯, 없는 듯, 아니, 분명히 조금씩 연결고리가 있는 작품들로 이루어졌다. 안더쉬가 47그룹, 우라질 47그룹의 멤버이기도 하다던데, 내가 아는 어느 47그룹 멤버들(물론 귄터 그라스도 포함해서)보다 참 글이 좋다. 공산당 전력이 있어 프롤레타리아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간결한 서술을 사용해서 그런가 참 쉽게 읽히고 마음에도 와 닿는 작품이다. 책 뒤표지에 “독일에서는 고등학교의 독일어 교과과정에 포함되어 현대소설을 읽고 분석하는 능력을 키우기 휘한 모범적 작품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고 하는데, 읽어보시라, 그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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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2022-12-09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6년에 박영사에서 최후의 이유라는 제목으로 지명렬 역, 82년에 주우에서 마지막 이유라는 제목으로 안더쉬의 두번째 장편 레드(빨강머리 여인)과 묶어서 곽복록 역, 85년에 학원사에서 곽복록 역 재간했고 대산세계문학총서는 3번째 번역입니다. 유신시절이랑 5공시절에 번역이 나왔네요. 3번째 소설 에프라임도 83년에 번역이 나왔으니 오히려 군사정권시절에 번역이 더 활발했군요.

번역이 없던 단편집과 묶어내서 오늘날 독자들에게 깔끔한 새번역으로 찾아온 의의는 크지만 대한민국 입법부가 금서로 묶어놓은 적은 없습니다. 시장성이 문제였을뿐이죠.

Falstaff 2022-12-09 15:19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알지 못하고 그랬거니, 짐작으로 쓴 거였군요. 그저 책방 재고 여부만 가지고 판단했으니 제가 잘못한 겁니다.
전 흥미롭게 읽은 책인데 잘 팔리지 않는 게 아쉽습니다.
좋은 댓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