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의 대가 열린책들 세계문학 78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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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 작가 아르투로 페레스 로베르테의 스릴러 소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을 참 재미없게 읽었는 바, 장안의 숱한 독서가들의 평가와 내 생각이 많이 달라 언젠가 이이의 책을 딱 한 권만 더 읽고 다신 읽지 않던지 좀 더 읽던지 결정을 하겠다고, 즉 보류 작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가 이번에 독파했다.

 글쎄, 이 정도면 로베르테를 스릴러 소설가라고, 장르문학의 범주에 가두어 두어도 괜찮을 거 같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주장하는데, 순문학하고 장르문학하고 굳이 분류하는 건 절대로 순문학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특정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이 책을 선택할 때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순문학이 우월해? 개똥 밟아 미끄러져 뇌진탕 걸릴 얘기.

 이 책, 재밌다. 비록 내가 스릴러 소설을 그리 즐기지 않지만 하여간 재미나게 읽었다. 19세기 중후반,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세계인이 스페인 역사에 관심이 없던 시대. 뭔 말씀이냐 하면, 인류 역사상 드라마틱하게 사회, 군사, 사상, 문학 등이 변혁하고 있는 무대에 전시대적인 절대왕조가 아직도 숨통을 이어가 그 결과로 당대 유럽의 모든 방면에 너댓 발자국 뒤쳐졌던 시기. 당시 스페인은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던 모양이다. 이게 다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가 가문의 번영에만 관심이 있고 세계의 흐름을 나 몰라라 하는 바람에 이미 전 유럽에선 지독하게 겪어서 이젠 슬슬 이력이 쌓이고 있는 중인 산업혁명의 부작용을 제대로 겪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으로 새롭게 대두된 건 부르주아 계급만이 아니라서 비록 스페인 부르봉 왕가를 21세기인 지금까지 무너뜨리진 못했지만 왕가와 귀족, 부르주아들에게 위협적으로 성장해버린 도시빈민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그러나 다수가 항상 승리하는 건 아니다. 이들을 등에 업고 적어도 공화정이나 그것도 아니면 정권을 스스로 탈취할 수 있다고 믿는 장군들이 등장했으며, 왕가와 반역의 세력 사이에서 언제라도 승자의 편에 가담할 준비를 완전히 마친 그룹들은 왕가에도, 반역자에게도 금품을 비롯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다 보험이지, 보험. 세상 다 그런 거다. 새삼스럽지도 않고 스페인스럽지도 않은 현상. 시저와 브루투스 사이에도 이런 작자들 없었을 거 같아? 장도영과 박정희 사이에, 장태완과 전두환 사이에서 간보기에 바빴던 장군들은 없었을 거 같아? 다 그런 거다.

 얘네들의 공통점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는 거. 기꺼이 양편에서 얻은 정보를 또다른 편에게 전해주기도 하며 누가 더 센지 가늠하기에 눈알이 사팔뜨기가 될지언정 왕가와 반군의 공통적 지지자, 증거없는 지지자로 존재하기 바라지만, 간혹가다가 자신들의 이중첩자짓이 들통이 나거나, 누군가에게 발각됐지만 누군가가 입을 다물고 있거나,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상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겠다. 1860년대의 스페인. 아직도 가톨릭의 성전에서 자신의 죄의 보속과 영생과 천국의 유혹에 국민 절대다수가 함몰되어 있던 시기, 이사벨 여왕이던가, 하여간 철딱서니 없는 여왕 치세 때 공화정의 기치를 내건 장군이 등장해 결과적으론 여왕을 왕좌에서 내리는 데는 성공하지만 왕정을 종식시키진 못한다. 바로 이 앞 시기. 반역이 도처에서 왕권과의 전투에 승리하기 시작할 때가 책의 시대적 배경이다.

 여기에 멋있게 등장하는 검술의 대가 돈 하이메. 일찌기 프랑스 검술협회 정회원이자, 프랑스 내 가장 위대한 검사劍士를 사사한 검의 대가. 그러나 세월은 흘러흘러, 이젠 검술로 다져진 육체이지만 시간을 이기지 못해 은발을 휘날리는 신사. 낡은 프록코트와 넥타이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신사의 면모를 결코 잃지 않는 노 검객. 한때는 무수한 신공을 자랑했던 숱한 검사를 전부 무릎꿇렸든지 세상을 뜨게하고 중원을 평정했으나 이젠 생활의 방편으로 귀족이나 부르주아 자제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며 호구지책을 삼고 있다. 여기에 새로이 두 명의 젊은 제자를 받으면서 얽히고 설킨 스릴러 드라마는 시작한다. 무지막지한 재산을 물려받아 도박과 여자로 날새는지 모르지만 당대 그룹 가운데 최고의 검술을 자랑하는 백작 돈 루이스. 경천의 미모를 자랑하는데다가 입술 옆에 난 흉터가 마치 한때 열풍을 일으켰던 미인점처럼 결정적으로 미모의 액센트를 주는 돈나 아델라. 돈나 아델라 역시 기본이 아주 탄탄한 검술의 보유자이며 늙은 검사 돈 하이메로부터 필사의, 무적의 검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접근하는데, 이 문학작품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소설. 돈 하이메는 근 30년 이상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돈나 아델라를 사랑하게 되지만 세상에 그리 쉽게 사랑이 맺어지는 소설이란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돈나 아델라는 부자 백작 젊은이 돈 루이스와 진한 사랑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해버리고 만다. 원래 그런 거다. 늙은이의 사랑은 슬픈 법.

 자, 여기까지.

 스릴러 소설의 줄거리를 몽땅 알려주는 건 무참하다. 시중에 이 재미난 소설의 결말까지 몽땅 다 소개한 글들이 있기 때문에 만일 이 책을 읽고자 마음 먹으신 분이 계시는데 지금 이 독후감을 먼저 읽었다면 내게 고마워하셔도 된다. 독자가 책을 읽어가면서 나름대로 추리해가며 그게 맞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재미, 그게 스릴러 소설을 읽는 진짜 재미니까.

 다시 한 번 강조. 이 책을 진짜 읽어보실 요량이라면 다른 독후감이나 서평같은 거 읽지 않으시기 바람. (잘난 척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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