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여행이 되다 : 작품이 내게 찾아올 때 소설, 여행이 되다
이시목 외 9인 지음 / 글누림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바로 전에 이어 "소설, 여행이 되다" 시리즈. 이번엔 '작품이 나를 찾아올 때'라는 소제목으로 주요 소설의 무대가 되는 장소로 떠나는 여행 이야기다.

 작가나 작품이 만들어졌던 장소를 향해 떠난 이야기, 저 먼 시절 내가 다니는 회사 사보에 소개한 책이 있다. 2001년 간행한 최내경의 여행기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거기서 최내경은 고흐가 고독 속에서 자신의 해골을 향해 권총을 발사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다락방으로, 고흐의 붓에 의하여 불멸의 교회로 남겨진 오베르 교회로의 여행기를 소개했었다.

 그럼에도 글누림 출판사에 의한 이러한 기획은 사실 참으로 바람직하여 그냥 마음의 치유를 위해 길을 떠나는 것보다는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옛 현장을 답사하는 일이야말로 참 괜찮은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하고, 이 책에서도 어느 작가인지 모르겠지만 역시 말한다. 따뜻한 치유를 위한 여행. 참으로 행복한 상상이다. 여행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그랬으면 좋겠다. 여행은, 환상을 깨서 미안하지만, 잠깐의 일탈이다. 여행을 다녀와도 상처는 여전한 상처고, 아픔도 여전히 아픔이고, 날 버린 그 새끼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집을 나서기 전 소파 위에 휙 던져놓은 브래지어는 여태 그대로 널브러져 있고, 오히려 우체통엔 아파트 관리비 청구서와 공공요금 계산서 쪼가리만 보태져 있을 것이며, 이제 돌아와 피곤한 당신은 미리 짐작했던 바와 같이 심각한 변비로 얼굴만 노오래져 있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떠난다. 심지어 떠나고 싶어 몸부림을 친다. 먹고 사느라 훌훌 떠나지 못함을 기어이 아쉬워 한다. 아무렴.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그래도 기어이 떠날 당신, 이왕이면 길을 나서기 전에 이 책 한 번 읽고 길을 골라보라.

 솔직하게 말하겠다.

 책은 이게 기행문인지 독후감인지 헷갈린다. 열 명의 작가가 경향각지에 흩어져 있는 소위 '명작의 고향'을 찾아 갔는데, 아뿔싸, 문제는 바로 그 명작 이야기도 해야겠고, 명작을 태어나게 한 고장의 모습을 독자의 가슴이 짜르르하게 윤색도 해야겠고. 실제 가 보면 둘 중의 하나. 누추하고 빛 바랜 옛 기억의 한 장면이든지 아니면 야하게 화장한 노파의 얼굴같이 작품과 너무 어울리지 않게 현대화한 모습이던지. 그 둘 중의 한 모습을 독자의 가슴에 진하게 새겨놓기 위해 필수적으로 사용한 문명의 장비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 한 부분만 확 잡아놓았을 때, 진짜 시각으로 바라볼 경우의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극미세한 한 장면으로 축약되어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수 있게 만드는 거. 그게 사진 또는 그림의 마술이다.

 나는 지금 이 책을 폄훼하기 위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얘기했듯이, 이왕 길을 나선다면 한 가지 테마에 집중하는 것이 아주 바람직하기 때문. 이 책의 효용은 그거 하나로도 충분하다.

 책에 수인선. 수원과 인천 사이를 달리던 협궤열차 이야기가 나온다. 오랜 추억. 수십년 전 추웠던 겨울. 어느날 트렌치 코트 속 주머니에 소주 한 병과 노가리 한 쾌를 넣고 동기, 후배아이들을 유혹했다. 협괘열차를 타보자고. 그리하여 멀고 먼, 멀고 멀고 먼 송도역에서 수원까지 유행가 가사처럼 비린내 가득한 열차에 몸을 싣고 수원에 도착. 그러나 할 짓이 없었다. 하지만 청춘은 무엇인가를 저지르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있어서, 나는 청년들을 이끌고 우리나라의 클래식 명화 <애마부인>을 단체관람했고, 안소영의 수박만한 젖가슴을 보고 낄낄거렸으며, 너무 재미가 없어서, 영화가 끝난 후에, 영화를 보자고 선동했던 나는, 하마터면 맞아 죽을 뻔했다. 당연히 송도역에 도착하기 전 우리는 전철로 인천역에 내려 어슬렁거리다가 중국식 음식점이 줄줄이 늘어선, 재수없으면 진흙탕 속에 가짜 나이키 운동화가 푹푹 빠져버리는 거리에 들어서서 이 동네가 오정희가 쓴 '중국인 거리', 거기가 바로 여기야. 어쩌고 저쩌고 잘난 척을 해가며 짜장면 한 그릇씩 받아놓고 어린 놈들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독한 배갈 한 도꾸리 씩을 비워냈던 건 물론이다.

 책의 초판을 가지고 있느냐가 만일 자랑이라면 나도 초판 몇권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한강이 쓴 <여수의 사랑>. 하지만 더 깊숙한 여수의 추억. 180 센티미터의 키에 남진과 변웅전을 합한 모습의 미남 아버지는 왠일인지 아들 둘을 앞세우고 전국일주에 나섰다. 여수에 들러 당시 최고 좋은 여관에 짐을 풀자 주인 마담인 듯한 아주머니가 눈웃음을 살살 치며 반겨주었다. 오동도에 들러 난생 처음 주먹덩이 만한 소라(그렇게 큰 소라는 처음이란 뜻입네다)와 전복, 홍삼(붉은 해삼) 등을 초고추장 듬뿍 묻혀 실컷 먹고, 아, 과식의 심각한 절망이여, 밤새 심각한 설사와 탈수증에 시달렸으나, 분명히 내 옆에서 베개 위에 머리를 뉘셨던 아버지는, 방에 안 계셨다. 쾌속정을 타고 부산을 거쳐 며칠만에 집에 도착한 나와 형, 두 아들새끼들은, 꼴에 남자라고 하필 설사병으로 밤새 고생해마지않던 그날 밤 아버지가 방에 없었다는 걸 결코 정여사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뭐 이런 재미난 에피소드 없어? 없다.

 왜 이런 단어를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요새 '힐링'이란 말이 붐이다. 그러기 위해 웃음이 아닌 가슴이 쌉싸름해지는 가을 빛 정서를 듬뿍 담아내기 위해 온 힘을 들여 자판을 두드리는 열 명의 작가들이 눈에 선하다. 가슴이 저릿저릿한 아름다움. 선운사 앞을 흐르는 도솔천의 맑은 소리? 진하게 화장한 시에미처럼 변한 선운사 입구의 선운사 관광호텔에서 일박을 하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절에 들면 입장료 받는 직원이 출근 전이라 돈 안 들이고 들어갈 수 있다는 팁은? 가을날 물 마른 도솔천보다는 선운사에 들자마자 눈에 확 들어오는 무슨 각이더라, 하여간 누각의 엉뚱한 기둥이 엉뚱하게 주장하는 미감은 또 얼마나 푸근한지, 왜 이런 건 안 보이지? 정말 다행인 건 일종의 관습이 된 선운사 동백, 목이 툭 꺾여 통째로 떨어지는 동백꽃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거. 동백꽃이 후지다는 말씀이 아니라 심하게 식상해서 누구나 다 아는 것이라 피하기 잘했다는 대목.

 여행을 준비하는 분들. 이 책을 읽고, 책에 나온 소설들을 먼저 읽으시라. 다행스럽게 단편소설을 훨 많이 배치해놓았다. 단편 하나를 읽기 위해 책을 사기 뭐하다면 좋은 방법이 있으니, 동네 도서관에 가시라. 에어컨 바람 시원한 곳에 가서 책 속의 소설을 하나씩 읽고 그곳으로 방향을 잡으면 이 여름, 어느 때보다 기특한 휴가를 즐기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글이 제일 좋았느냐고? 정말 얘기해야 해? 에이, 관두겠어.

 근데 책 속의 식당 소개는, 아 참, 요새 큰 경향 가운데 하나지만, 흐흐흐, 웃고 만다.





++++++++++  부록  ++++++++++


2001년 밥 빌어먹던 회사 사보에 기고한 글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최내경, 2001. 오늘의 책, 1만원

 

 

 어느새 가을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외롭지 않습니까. 당신 가슴 속 깊숙한 고독의 빈자리로 문득 황황한 바람이 불어오지는 않습니까. 어려운 시절, 거친 생활을 살아내느라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고 함부로 관계들을 만들어가면서도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사막을 바라보지는 않나요. 부모와 배우자, 그리고 정겨운 살붙이들이 아주 가끔은 전혀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겠군요.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가을에.
 가끔은 길을 떠나고 싶습니다. 지구라는 별자리에 오직 당신만이 혼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 당신은 헤진 배낭을 메고 그저 길을 나서고싶어질 것입니다.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지친 발걸음을 쉬고싶겠지요. 당신은 신발끈을 풀고 고단한 발바닥을 두드립니다. 그러다가 무거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려봅니다. 저런, 그러고보니 외로운 당신을 품고있는 공기 속에서 위대했으나 고독했던 영혼들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군요.
 당신은 행복합니다. 위대한 예술품을 만들어낸 고독한 영혼들이 당신과 함께하니까요.
 그러나 정말로 자리를 박차고 길을 나설 수 있으면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거나 부모를 잘 만난 사람이겠지요. 보통의 당신은 길 떠날 생각조차 못할 확률이 많습니다. 시간이 없고, 돈이 없는.... 하지만 언젠가 길을 떠나리라, 마치 비밀스런 에로스의 약속인 양 마음 한 쪽엔 그런 갈증을 이 가을에도 당신은 품고 있겠지요. 그 희망, 사실은 조금은 덧없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뒤 돌아보지 않고 베낭을 멜 희망이 있는 당신은 지금 불행하고, 그럴 희망을 갖지 않은 당신은 언제나 불행합니다.

 그날을 기다리나요? 그렇다면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일탈의 그날을 위해 이 책을 소개합니다.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프랑스.... 혹은 불란서를 소리내 발음해보십시오. 그것은 이미 당신에게 어떤 동경으로서의 보통명사입니다. 유럽의 중심, 세계 2위의 농산물 수출국이라는 지리부도적인 지식보다도 당신의 가슴 속에서 프랑스는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앙드레 말로 같은 작가, <암흑가의 두 사람>에서의 쟝 가뱅과 알랭 들롱의 우수 깊은 눈동자, 장-폴 고띠에,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의 패션 디자이너... 이런 소프트가 먼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아니죠, 당신을 포함한 많은 우리 보통의 사람들은 의당 그러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몽마르트 언덕의 노천 카페에 몰려앉아있는 혁명가 레닌과 바쿠닌 같은 망명 이방인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프랑스의 무수한 소프트 중에 프랑스를 프랑스답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소프트는 무엇일까요. 루브르 박물관의 눈썹 없는 여인 <모나리자>를 위시한 미술품을 제일 윗자리에 놓지 않으면 많이 서운하리라 생각합니다.
 책《고흐의 집을 아시나요?》는 그러나 고흐의 작품에 대한 설명서나 입문서가 아닙니다.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에서 고흐를 발견할 수 있는 페이지는 얼마 되지 않는군요. 그의 그림도 여섯 컷의 사진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책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앞에서 얘기했듯, 어느날 갑자기 단행할 당신의 일탈, 그 여행길에 당신의 헤진 베낭 속에 담아갈 안내서입니다. 당신은 이 책과 함께 지난 세기와 지지난 세기에 가장 고독했고 우울했던 영혼들의 흔적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즉, 고흐의 작품을 보러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흐가 자신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던 무서운 고독과 절망의 시절을 온전히 담아낸 다락방으로 당신의 발길을 옮길 수 있게하는 책이지요. 낡은 침대가 놓인 그 좁은 다락방에서 밤새도록 신음을 하던 고흐를 당신은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비뚤배뚤하게 원색으로 불안하게 그려놓은 오베르 교회, 위대한 그 그림을 볼 수 있게 안내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천재에 의하여 불멸의 명화로 그려진 교회 건물을 당신은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시간의 마모는 직접 고흐의 집을 찾아나선 나그네의 발길에 쓸쓸한 회한 만을 선사하기 십상입니다만, 고독했던 천재의 숨결마저 어느 한 구석에서 발견하기 기대난망이겠지만 굳이 그 집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신의 외로운 영혼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작가 최내경은 고흐가 최후를 보냈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셋집을 비롯해서 베르디 오페라 <돈 카를로> 1막의 무대가 되는 퐁텐블로 숲 가의 밀레의 집과 아틀리에, 거장 다 빈치가 만년을 보낸 클로 뤼세, 프랑스 회화의 다른 큰 축을 이룬 남프랑스 지방, 그리고 파리를 대단원으로 해서 간결하게, 그렇습니다, 우리가 섣부른 기행문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허접한 감상을 첨가하지 않고 담담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최내경의 글은 이렇듯 조금은 건조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까운 지면을 빌어 소개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백에 대한 매력이지요. 작가는 고흐의 집으로 가는 길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어느어느 것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 다음의 지면은 당신의 순서입니다. 최내경의 책을 헌 베낭에 넣고 남프랑스에서 다시 파리로 향하는 밤 열차를 탄 당신은 열차 객실에서 이방의 문자로 인쇄된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를 꺼내 그 빈 여백에 당신의 감상을 적어놓을 수 있습니다. 최내경은 남부에까지 가서 왜 엑상 프로방스의 세잔의 집엔 들러보지 않았을까...를 빈 자리에 쓸 수도 있고, 끝없이 펼쳐지는 남 프랑스의 들녘을 밤기차에서는 볼 수 없었다고 써놓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건 당신의 몫이니까요.
 당신 속의 외로운 영혼을 위하여, 어느날 문득 저질러질 일탈을 위하여 기쁘게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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