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돌리노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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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우돌리노, 사람 이름이다. 예전에 어떤 짓을 당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선 한 성인聖人의 이름이기도 하고 이 소설의 눈부신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근데, 이름이 하필이면 '바우'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경우 이 인간을 생각할 때 기운찬 돌대가리 천하장사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 일단 언어에 관한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 어느 종족 속에서도 한두 달만 같이 지내면 마치 모국어인 양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하고, 예상 외로 평화를 사랑하는 인류 가운데 한 명이며, 무엇보다 여태까지 내가 읽은 모든 책 가운데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거짓말장이다. 난 선의의 거짓말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거짓은 '더러운 거짓말'이라고 알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이제 조금은 생각을 바꾸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대단하지? 평생 품고 있던 신념을 바꾸게 만든 책이라니. 원래 그런겨. 책의 힘이란 것이. 하긴 여태 살아온 걸 뒤돌아보면 사소한 거짓말도 하기 싫어 솔직하게 얘기해 얻어 터진 경우가 부지기수이긴 하다.

 두 권 850여 쪽의 장편소설. 근데 읽다보면, 나처럼 저녁때 술만 마시지 않으면 이틀이면 독파할 수 있다. 난 나흘 걸렸다. 그놈의 술 때문에. 아직 본격적인 여름도 안 됐는데 어이하여 벌써부터 개고기 전골이 그리도 맛나단 말인가.

 바우돌리노로 말할 거 같으면 장화 닮은 이탈리아 반도 저 위쪽으로 알프스 가까이 있는 노바라(이 도시 이름은 아직도 '노바라'다) 부근에서 나고 자랐다. 깡촌 시골구석에서도 바우는 천부적인 재능인 언어에 눈을 떠 라틴어, 독일어 등을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면서 읽고 쓸 줄 알았다. 이거 대단한 거. 무대가 12세기 말 13세기 초. 당시에도 물론 종이가 있었으나 워낙 비싸 양피지를 사용했으며 거기다가 고려에서 세계최초로 1234년에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를 이용해 찍어내기 전이어서 누군가가 깃펜에 잉크를 묻혀 필사를 했던 걸 읽어볼 수 있었다는 건데 노바라, 아직까지도 시골구석인 그 동네 사는 평민의 아들이 글을 익혔다는 거, 기적 비슷한 일이었다.

 근데 참, 인간이란. 글을 익혀 읽고 쓰기 시작하자 인간본성 가운데 하나인 '구라 만들기'를 시작한다. 이 작업은 모든 인간들이 할 수 있으나 수다한 사람은 관심이 없거나 시도하지 않는 반면, 오직 유전자 사슬에 거짓말을 만들어내는데 흥미가 있어서 심지어는 목숨을 걸고라도 거짓말을 진짜처럼 꾸며내는 종족들이 간혹 나타나 죽기살기로 마치 진실인 것처럼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참경에 이른다. 이런 인간들의 가장 앞쪽에서 광배를 두르고 우뚝 선 자, 바우돌리노.

 인류 역사를 보면 힘 있는 자의 집에 객식구로 얹혀살며 뻔한 거짓말을 함부로 노래로 지어 부르다 혀가 잘리고 눈이 뽑힌 인간이 어디 한둘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가 다 거짓말인줄 아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애먼 PC 자판만 열라 두르리고 있는 청춘들이 어디 하나 둘인가 말이지. 이거 누가 시켜서 하는 짓이 아니다. 다 그 염병할 유전자사슬 DNA라고 불리는 두 줄의 나선 구조에 의해 결정될 뿐. 유명한 두 줄의 나선구조가 명령하는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는 걸 우리는 뭐라 불러? 예, 맞습니다. 본능이라고 한답니다. 유전자를 배열하는 레시피에 의한 것.

 그리하여 바우돌리노 역시 아주 능숙한 솜씨로 거짓말을 지어내는데, 문제는 바우의 거짓말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아니, 모든 경우가 만인의 행복을 위하여 작용하...... 아 참, 뭐라 써야 해, "작용한다"라고 쓸까? 아니면 "작용하지 않는다"라고 쓸까.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작용을 하건 하지 않건 간에 더욱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바우 스스로가 자신이 만든 구라를 진실로 인식한다는 점. 평생 충성을 다하고 의부로 모신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황제를 만나게 된 것 역시 노바라 근방의 한 숲에서 황제를 몰라보고 구라를 친 덕분이다. 이렇게 거짓말의 위대함을 차츰 알아가는 바우돌리노. 그의 좌충우돌 모험담. 파란만장하고 파노라마스러운 환상적 모험. 그 속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지는 바우의 찬란한 거짓말, 거짓말, 그리고 또 거짓말. 동시에 진실이며 어느 것보다도 더 진실이며, 결코 변경할 수 없는 진실이자 진리. 진리를 찾아 떠나는 모험.

 여기까지.

 책 내용에 관해선 한 마디도 안 했지? 그럼 성공했네.

 의심하지 말고 한 번 읽어보셔. 재미나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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