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세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0
빅토르 펠레빈 지음, 박혜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술주정뱅이 보리스 옐친 초대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 모스크바 모처에 주둔하던 군대의 탱크 꼭대기에 올라가 극보수에 의하여 저질러진 쿠데타를 저지하자고 호소하던 한국방송공사의 화면을. 이 책은 그 언저리 몇년 모스크바를 무대로 했다. 또 한 장면. 알량한 음식물을 구매하기 위해 하루 온종일 1 킬로미터가 넘는 줄을 서야했던 당시 모스크바 시민들.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지은 높은 건물의 처마에선 몇 미터에 달하는 고드름이 떨어져 보도를 걸어가는 시민의 어깨를 관통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던, 한 때는 위대했고 얼마쯤 더 지나면 다시 위대해질 예정이지만 지금은 결코 그렇지 못한 모스크바의 우울한 초상.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처마 밑의 고드름이 다 녹아버리듯 모스크바 곳곳에 우뚝 서있는 자동판매기에 동전만 집어넣으면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펩시콜라가 기계 밑에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혀있는 배출구로 떨어지는 자본주의가 동토로 비유하는 사회주의 경제의 중심지에도 푸른 싹을 돋아내기 시작했다. 펩시콜라. 길거리를 걷다가 우연하게 주웠다는 핑계, 사실은 으슥한 골목길을 홀로 걷던 아가씨의 핸드백을 날치기해 돈이 생기거나, 양철 깡통 속에 담겨있던 부모님의 손때묻은 동전을 얘기하지도 않고 그냥 들고 나왔거나, 아니면 이蝨같이 쓸모없이 늙어버린 노파의 이마빡을 도끼로 내리쳐 죽이고 침대밑 낡디 낡은 가죽 가방에서 훔쳤거나, 어쨌든지 돈만 있으면 언제나 어디서나 아무렇지도 않게 펩시콜라를 마실 수 있었던 세대. 대마초, 헤로인 또는 코카인을 흡입하느라 코 점막이 거덜이 난 인간들이 앱솔루트 보드카에 펩시콜라를 타 마시며 더러운 욕설, 피즈테츠, 라 하던 세대. 이들을 작가 팔라빈은 'P세대'라고 불렀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본주의 시대를 맞아 변혁기엔 언제나 그랬듯이 더러운 방법을 썼거나 권력에 기댔거나, 권력에 기대 더러운 방법을 썼거나 하여간 졸지에 큰 부자가 된 인간들이 속출하듯, 마야콥스키와 파스테르나크의 시 역시 재빨리 자본주의의 찬란한 시, 광고 카피로 변신하던 시기. 시대를 살아보니 세기말의 러시아를 주물딱거리던 모든 일 또는 음모 역시 광고 카피 안에 이미 다 들어있었다는 놀라운 발견.

 그.러.나.

 이리 훌륭한 텍스트, 이색적이고 말 그대로 시대가 뒤집어지는 변혁기 모습을 왜 나는 그리도 힘들게 읽었을까. 정작 내가 집요하게 기억하고 있던 것은 작가 팔라빈이 이 책을 바치는 헌사.

 "중산층의 영전에 바친다."

 러시아의 중산층은 자본주의의 범위없는boundaryless 침공, 가치의 혼돈, 나름대로 이어지던 질서의 붕괴 등으로 인해 이미 다 죽었다는 얘기. 그들의 묘비 앞에 <P세대>를 올려 놓은 것.

 헌사가 써 있는 페이지에서 한 장을 넘기면 캐나다의 저음 가수 레너드 코언이 노래한 'Democracy'의 가사가 다섯 줄 나온다.

 "당신도 알잖아요, 난 감상적이예요.

 이 나라를 사랑하지만 이런 광경은 견딜 수 없군요.

 난 좌도 우도 아니예요.

 오늘 밤은 그냥 집에서,

 저 희망 없는 작은 화면 속에서 길을 잃겠어요."

 직접 한 번 들어보실려? 난 코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 노래는 음악적으로도 '완전 불감응'의 대표적 노트인데 가사 하나 때문에 인용한 거 같다. 하여간 즐감하시라.

 

 

https://youtu.be/vHI9BTpGkp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