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명 앗아가주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
앙헬레스 마스트레타 지음, 강성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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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사만큼 서로 비슷하고 복잡한 건 별로 없으리. 숱하게 싸우고, 암살하고, 인민들을 학살하고, 쿠데타 벌어지고 등등. 하긴 라틴 아메리카에 국한할 것 없이 20세기 들어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에서 벌어진 공통적 정치 현상이다. 유럽의 영향을 받아 조금 일찍 깬 라틴 아메리카에 이어 한국, 필리핀 등 신생국들, 그리고 중부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들까지.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대가리 터지게 쌈박질하고 죽이다가 드디어 권력을 잡은 인간들이 댓가로 조금 편하게 사는 건 크게 인심 써서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고래 싸움에 동시다발적으로 굶어 죽고, 학살당하고, 태 묻은 고향을 등지고 할 수밖에 없던 인민들은 어쩌냐고. 책을 읽으며 나라는 다르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자와 권력 투쟁을 다룬 많은 작품들, 아스투리아스의 <대통령 각하>, 요사의 <염소의 축제>, 아옌데의 <영혼의 집> 같은 것이 떠올랐고, 심지어 멕시코 북부 농민 학살을 연상시키는 대목에선 요사의 <세상 종말 전쟁> 까지 같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 참 태생이 중요하다. 인간 사이에 차별은 절대 있어서 아니된다고, 태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리 주장해봤자, 콩고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소년병사로 태어나는 거 보다 노르웨이 중산층에서 태어나는 것이 훨씬 좋을 거 같은데? 이 책의 무대인 멕시코라도 열다섯 살에 장군의 아내가 되는 것이 아이 아홉을 낳았지만 낼 모레 정부군 또는 혁명군의 총알이 왼쪽 허파를 관통할 예정인 여인보다 훨씬 더 좋은 거 같은데? 평등? 여보, 세상에 평등이 어딨어.

 책을 읽고 생전 안 하는 버릇이 책의 뒤편에 있는 역자 서평 읽는 거. 어떻게 시간이 좀 남아서 이 책에 달린 역자 서평은 읽었다. 다분히 통속소설 같은데 좋은 평을 받아 여기저기서 상을 받고 베스트 셀러의 계관까지 썼다는 취지. 그건 역자의 평이고, 이게 어디 통속 또는 대중소설이야. 그리고 통속 또는 대중 소설이 뭐 어때서. 순소설과 대중소설을 가르는 경계를 당신이 알아? 순소설이건 대중소설이건 읽어서 나 좋으면 그만이다. 칼라스가 좋을 때도 있고 이미자가 좋을 때가 있는 거 같이.

 그렇다. 열다섯 살 먹은 애가 자기보다 나이가 스무 살도 넘게 차이가 나는 중년의 사내를 끔찍하게는 아니고 그냥 어딘지도 모르게 끌려서 따라가 딱지를 뗏다. 여자에 관해 워낙 내공이 깊은 사내라 딱지를 떼도 아프진 않았는데 정말 뭔지는 모르지만 좋을 거 같기도 하다가 말았다. 다음날 아무리 생각해도 '좋을 거 같았다가 만 느낌'이 어떻게 해서 생기는지 궁금해 견디지 못하겠는 거다. 그래서 찾아간 사람이 점쟁이 집시 여인. 열다섯 살 카탈리나가 집시 여인에게 궁금증을 털어 놓고 어떻게 하면 '느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한다. 점쟁이 집시 여인이 카탈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잠시 후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옷을 훌렁 벗어버린다. 그리고 정확하진 않지만 이 비슷하게 말한다.

 "여자는 다리 사이에 초인종이 달려 있어요, 아가씨. 사랑을 나눌 때는 머리도 없고, 팔 다리도 없고, 내 온 몸 다 없다고 치고 오직 그 초인종 하나에 집중해야 한답니다. 어떻게 하면 초인종을 잘 누를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하세요. 그럼 느낌이 올거랍니다."

 이 말을 듣고 긴가민가 하는 카탈리나. 집시 점쟁이가 어쨌든 도움의 말을 해주었으니 댓가로 돈을 내밀었다. 집시 여인이 다시 이야기한다.

 "필요 없어요. 받을 수 없답니다. 난 거짓말을 해준 댓가로 돈을 받는 여자랍니다. 거짓말이 아닌 진실을 얘기하고는 절대 받을 수 없어요."

 이쯤되면 이거 철학책 아냐?

 그리하여 열다섯 살, 우리 기준으로 중학교 3학년의 카탈리나는 삼십대 후반의 장군 안드레스 아센시오한테 시집가고 그 후 과부가 되기까지의 인생을 쓴 소설.

 그럼 남편 안드레스 아센시오가 어떤 작자일까?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다. 어떠한 것일지라도, 선한 목적이 아니라 악마나 상상할 수 있는 목적이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살인, 협박, 사기, 도둑질 등 방법의 회피를 절대 하지 않는 인물. 젊은 아내와 눈이 맞은 것처럼 보이는 청년을 가비얍게 죽여버릴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공장을 얻으려면 걸리적거리는 공장주에게 너 죽을래? 아니, 아니,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죽겠느냐고, 라면서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협박할 수 있는 작자. 이런 인간하고 같이 살면서 두 아이를 생산했으나 전처들 소생으로 다섯 명이 더 들어오고, 걔네들 말고도 멕시코 방방곡곡 각처에 현지처와 사생아들이 부지기수로 있어서 소생을 다 합하면 수십명의 '법적인 어머니 예정자'. 카탈리나는 남편 안드레스와는 달리 정상적인 뇌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불행해지는 건 당연한데, 멕시코 현대사의 급변하는 순간순간이 여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재미있는 책이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여인의 시각으로 본 격변기에 대한 묘사 측면에선 아옌데의 연작들에 (전혀)미치지 못하고, 독재자 혹은 독재의 언저리의 권력자에 의하여 저질러진 야만에 관해선 요사의 작품들에 (절대로)미치지 못한다.

 근데, 제목 <내 생명 앗아가주오>가 뭐게? 책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질문.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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