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뒤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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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히 내 스타일. 이 책을 덮자마자 곧바로 애니타 브루크너의 다른 책을 검색해보았다. 한글로 번역한 책은 이거 말고 없다. 있었으면 보관함이고 뭐고 간에 단박에 사버리고 말았을 텐데. 책소개를 보니 1984년 부커상 수상작이란다. 크. 언제 내가 그랬잖은가. 내가 거의 유일하게 신뢰하는 문학상이 맨부커상이고, 그래서 그 상을 받은 한강이 더 좋아보인다고. 맨부커 상의 먼젓번 이름이 부커 상이다.

 이디스 호프. 당찬 이름의 필명으로 로맨스 소설을 쓰는 전업작가. "배들이 호수 위를 스치듯 지나고, 간이 선착장에는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보이고, 노천 시장이 열리고, 십삼 세기에 지은 성채의 쓸쓸한 잔해와 멀리 산의 경계마다 쌓인 흰 눈도 보이는" 스위스의 오래된 호텔. 뒤락. 오랜 호텔답게 완고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장식과 부대시설, 그리고 정찬. 오래되고 충성스런 고객들 중심의 경영방식으로 이름난. 그러나 성수기인 여름이 이미 끝나 객실엔 거액을 상속받은 늙은 퓨지 모녀, 거식증으로 인한 불임증 등의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유배 조치를 받은 모니카. 고부 갈등으로 매년 여름 내내 호텔에 처박히는 귀머거리 노파 브뇌이유 부인이 들어 있을 뿐. 이디스 호프가 이들 사이에 또다른 한 명으로 보태지며 소설은 시작한다. 겨울을 맞아 호텔이 정기 폐장을 하는 시점까지.

 이디스 호프. "세상 물정을 제법 잘 아는 신중한 여자이고 친구들도 분별 없을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이 버지니아 울프와 겉모습이 많이 닮았다고" 하는 이. "집이 있고 납세 의무를 잘 지키고 요리도 꽤 잘하며 마감일이 채 되기도 전에 원고를 보내주는 사람". "어떤 경우라도 내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에 먼저 전화하지 않"으며 "책이 곧잘 나가는 편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어떤 권리 주장도 하지 않"는 이디스 호프는 그러나 호텔 뒤락에서 "자신이 운 나쁘게 저지른 잘못은 잊고 신중하고 착실한 원래의 성품을 뒤찾"기 위하여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기에 집에 있어야" 하지만 "사람도 별로 없는 이곳으로, 잠시동안의 유배생활로 내몰았다". "이디스는 집이라는 곳이, 아니 그보다는 '자신의 집'이라고 해야 할 그곳이 갑자기 자신에게 적대적이 되자 일어난 일에 몹시 겁이" 나서 "친구들이 짧은 휴가를 제안하자 마지못해 따르기" 위해 스위스까지 오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따옴표 속에 나온 건 전부 책의 10~11쪽에 나오는 이른바 도입부의 설명이다. 이것으로 스토리는 독후감을 읽는 분들이 스스로 만들어보시고, 그것이 얼마나 적중할 지는 직접 책을 읽고 알아내시라.

 위에서 이디스는 스스로 버지니아 울프와 비슷하다고 했는데 소설의 등장인물에 대한 외모를 다른 소설가와 비교하는 건 일단 모른 척하고, 그래서 그런가? 하나 확실한 사실은 문체가 버지니아 울프와 비슷하긴 하다. 하지만 울프와 브루크너의 원문을 비교해 읽어본 것이 아니고 (읽어봤자 구별도 못할 거면서 말이라도 이렇게 써놓자) 한글로 번역한 두 이의 문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의식의 흐름? 브루크너도 소설에서 그걸 사용해, 울프를 읽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든다. 울프가 아직도 살아 있는 건 물론이고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면(아이고 징그러!) 바로 이렇게 쓸 거 같다.

 소설의 내용은 진짜 별거 없다. 호텔에 들어 투숙객과 호텔 사장, 종업원, 가끔 보태지는 남자 손님들. 여자들 사이의 미묘하고 섬세하고 아무 쓸모없는 신경전, 남자가 하나 끼어들면 또다시 추가되는 특별한 경쟁. 이런 것들. 인생 사는데 전혀 필요하지 않는 것들. 근데 참, 인생이란 것이 정말 신기한 이유는 진짜 너절하고 쓸모없고 권태스럽고 비정하기도 한 잡스런 일상사에서도 '나'를 찾는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놀라운 진실. 거기다가 애니타 브루크너의 교묘한 문장까지 섞이면 나처럼 이 작가가 쓴 다른 작품이 더 있는지 얼른 검색해보게 만든다니까.

 애니타는 왜 런던을 급하게 떠나 스위스 산골까지 오게 됐을까? 호텔의 장기 투숙객들과는 어떤 심리적, 실제적 갈등을 빚을까? 호텔이라니 혹시 찐한 베드 씬도 나오지 않을까? 애니타는 유배형을 어떻게 극복하게 될까? 퓨지 여사의 진짜 나이는 몇 살이나 될까? 궁금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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