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을유세계문학전집 84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박소연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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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독후감을 쓰기 겁난다. 아니 까짓 소설 하나 읽고 독후감 쓰기 겁난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씀이고…… 말도 안 되는 말씀이라도 선뜻 독후감 쓰기가 꺼려지는 건 사실이다. 첫째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인생의 전반전을 통째로 사유思惟한 소설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시작은 은수저를 입에 물고 미끈덩 빠져나왔으나 작가의 인생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완전히 망가지기 시작해 동료 귀족, 인텔리겐챠, 부르주아 등과 함께 베를린으로 망명한 작가가 인생의 정수essence이자 자신의 예술의 발원지였던 광활한 러시아에 대한 진지한 송가hymn이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200쪽이 넘는 역주+해설을 첨부한 역자 박소연의 진지한 열정과 지극정성에 혹시 흠집을 낼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 서재를 찾는 이가 하루 열명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완전 공개하고 쓰는 것임에야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보코프의 작품은 <롤리타>와 <사형장으로의 초대> 두 개를 읽었는데, 내 독서의 역량이 심각하게 치졸하여 <사형장....>을 읽고는 작가의 러시아어 소설은 읽지 말아야겠다, 라고 섣불리 생각했던 것을 지금 반성한다. 그렇다고 지금 <재능>을 쉽게 읽힌다거나, 쉬운 문장으로 되어 있다거나 하는, 언필칭 친절한 작가라고 얘기하고 있는 건 아니다. (본문만)500쪽도 안 되는 책을 읽느라고 꼬박 사흘을 헌납했다. 내겐 아주 예외적인 현상이다. 한 문장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죽박죽 섞여있어 서너번 읽어야 해독이 가능한 경우가 빈번해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를 느리게 하는 등, 작가는 독자의 가독성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다. 박소연은 이런 문장들의 수열적 배치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지. 아, 이쯤에서 밝혀야겠다. 나, 박소연과 아무 관계 없다(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번역한 책도 이것이 첫경험이다. 근데 이이의 번역이 얼마나 좋았는지 앞으로 팬이 되기로 작정했을 뿐이다.

 주인공 표도르 고두노프 체르딘체프가 망명지 베를린에서 함께 망명한 구 러시아 사람들과의 교류를 중심으로 나보코프의 주특기, 온갖 학문영역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 집단의 과거 러시아에서의 생활,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사는 이방인이 겪어야 하는 이질감과 좌절감, 옛 러시아 문학의 (애정어린)비판과 향수, 사라져버린 아버지(혹은 조국)에 관한 짙은 추억 등을 진하게 그렸다. 그게 얼마나 독자로 하여금 (읽기 지겹게 만드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로 하고) 절절한 공감을 주는지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책의 제목 '재능'은 주인공 표도르 고두노프의 재능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가 쓴 2장과 3장의 체르니솁스키에 관한 비평과 아버지의 작업에 대하여 쓴 전기를 포함하여 표도르의 시 작업 등 일련의 것들을 말하는 거 같은데 원래 똑 소리 나는 걸로 이름이 있는 나보코프였던 만큼 능수능란하게 온갖 것을 뒤섞어 글, 그리고 글을 통한 인식과 의식과 추억과 미감의 만찬을 마련해놓았다.

 어느 특정 장르의 소설로 구분할 수 없는 다양한 재미를 선사하는 책. 독서량이 좀 있는 독자에게 즐겁게 권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읽다가 을유문화사 블로그 <재능> 포스트에 제보했던 내용.

 "제보합니다.
167쪽 '호기심으로 임신부를 해부하고, 어느 추운 아침에 시냇물을 건너는 짐꾼을 보고 그 골수의 상태가 궁금해 그의 종아리를 절단하라 명한 독재자 슈신이 생각났다.'
이에 대해 후주(518쪽)에는 이렇게 써있습니다. '중국의 폭군으로 역사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이 일화는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으로 알고 있습니다. 출처를 기억하고 있지 못해서 유감입니다만. 확인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하군요.
역자 박소연 선생의 번역이 상당히 공을 들인 거 같고 국어 문장도 아주 좋습니다. 저는 이런 책을 두고 '을유스럽다'라고 합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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