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제안들 8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정보라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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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톨트 곰브로비치가 1904년에 폴란드 작은 마을의 대단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건 확실한데, 인터넷 두산백과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이이를 유대계 폴란드 사람이라 하고, 정보라의 곰브로비치 연표에는 하급 귀족가문 4남매 가운데 막내라고 한다. 나도 전에 독후감 쓸 때, 부르노 슐츠,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예비치와 더불어 비톨트 곰브로비치를 폴란드 문학 3인방이라고 조금 과장한 적이 있으며, 이들 세 명이 모두 유대계라고 알았다. 19세기말, 20세기초에 폴란드에서는 유대인에게도 (하급)귀족 작위를 주었던 걸까? 아니면 곰브로비치 가문이 절묘하게 자신들의 유대 정체성을 숨겨온 걸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1939년에 우연히 폴란드에서 만든 여객선의 출항을 취재하기 위하여 탑승했다가 다시는 폴란드로 돌아오지 못한 속내 가운데 하나가, 만일 유대계라면 조국에 남아 있던 가족들이 나치와 폴란드 정부에 의하여 몰살을 당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서. 그럼에도 곰브로비치는 폴란드에 대한 지극한 애정으로 평생 폴란드 언어로 글을 쓴 것이 참 대단한 것일 테고, 아니면 외국어로 작품을 쓸 수 없는 언어의 지옥이 끔찍했을까, 생각의 갈피가 왔다 갔다 한다. 곰브로비치의 히트작인 <페르디두르케>가 나치 치하에서 금서로 찍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불태워진 것도 그러하고.

  이 극작품집을 읽음으로 해서 나는 우리나라에 번역해 출간된 모든 곰브로비치를 다 읽었다. <페르디두르케>, <코스모스>, <포르노그라피아>는 소설이다. 이 세 편의 소설은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말하건대 읽기도 참 힘들게 읽었고, 헉헉거리며 끝내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다 읽었음에도, 물론 읽고 8년에서 10년 정도 시간이 흘러서 그런 것도 있지만, 누가 줄거리를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아주 짤막한 단편斷片, 조각 정도만 생각이 나며, 그것도 어느 작품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도무지 기억할 수 없다. 세계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작가를 두고 이렇게 말하면 가방끈 짧은 걸 광고하는 거 밖에 되지 않겠지만, 같은 간전기(1920~30년대,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눈썹이 휘날리는 활약을 했던 동료들인 슐츠, 비트키예비치의 작품과 비교하면, 표현의 방법이나 작품 속의 폭발력이 아무래도 얌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애초에 이 희곡집을 구입할 때부터 오늘 다 읽은 시점까지 내가 내 돈 내고 또다시 자발적인 “고난의 행군”을 하기로 했다는 점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다. 출판사 워크룸프레스의 “제안들” 시리즈에 유독 독자가 힘들어할 만한 텍스트를 소개하고 있어서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첫 페이지를 넘길 때도 각오를 단단히 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야기엘로인스키 대학의 예쥐 야젱브스키 교수가 쓴 서문이 실려 있다. 원래 이런 거 잘 안 읽는다. 근데 이번엔 다른 작가도 아니고 비톨트 곰브로비치. 세 번 읽었다가 세 번 코피 난 작가라서 처음부터 쫄아 있었던 건 고백해도 부끄럽지 않다. 그리하여, 후딱 읽어봤더니, 저 하늘 위에 먹구름이 조금 개기 시작해 활짝은 아닐지언정 구름 사이로 군데군데 햇살이 비치는 거였다. 그것도 모자라 본문을 건너뛰고 뒤로 가서 엽기토끼의 작가이자 이 책을 번역한 정보라의 해설을 읽은 후에 드디어 본문을 펼쳤더니, 아이고, 훨씬 수월하다. 다음은 서문의 요약이다.


  곰브로비치는 자신의 희곡작품을 공연하는 걸 “보는” 일에 그리 열정적이지 않았다. 그에게 희곡이란 근본적으로 공연을 위한 대본이 아니다. “연극성”이란 그의 심리적인 특성이었으며 내면에서는 줄곧 가면을 쓴 여러 버전의 고유한 “나”들이 있어 다수의 “나”들이 끝없이 다툰다. 그리하여 이이의 희곡은 공연이라기보다 낭만주의 이전의 오래된 레제드라마Lesedrama, 즉 읽는 희곡에 속하고, 읽기에도 적합하다.

  곰브로비치의 희곡들은 무엇보다 20세기 역사에 대한 해석이며, 작품의 주요 주제는 20세기의 인간과 현대의 사회와 체제들, 정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변화를 포착한다. 우선 옛 질서에 대한 투쟁을 시도하고, 시도의 패배와 관습적인 존재 방식으로 회귀하고, 질서를 의식적으로 파괴해, 존재의 자발성으로 돌아가든지, 형식을 파괴하든지, 이것저것 섞어찌개를 끓이든지 한다.


  위 두 문단의 요약을 미리 염두에 두고 곰브로비치의 부조리극을 읽으면 그나마 조금 수월하다. 아, 지금 “수월하다”라 했다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로 수월하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하여간 작품은 부조리극이다. 몇 년간 프랑스 희곡을 중심으로 일반독자 치고는 부조리극을 열심히 읽은 편이라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를 그리 어렵지 않게 읽었으며, 어라, 아들이 부왕을 폐위시켜 지하 감옥에 가둔 후에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건 알프레드 쟈리의 부조리극 <위비 왕>하고 유사한 걸? 뭐 이렇게 주접을 떨어가며 나름대로 즐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결혼식>과 <오페레타>를 연이어 정독을 하려니 머리속에서는 냉장고 신선실에 두고 온 삼겹살과 삭힌 홍어회가 삼삼하고, 머리, 어깨, 무릎, 발이 욱신욱신 쑤시기도 했다. 그러니 권하옵기를 하루에 한 편 씩만 감상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대신, 집중, 집중 또 집중해서. 하, 젊어서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이 책의 매력이 하나 더 있다. 부조리극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사무엘 베케트가 쓴 <고도를 기다리며>인데, 사실 고도를 찾는 게 내가 읽어본 부조리극 가운데 제일 재미있고 쉽다. 당연히 무슨 뜻이고, 뭘 주장하는지 딱 한 마디로 이야기할 재주는 없으나 하여간 고도 빼고 나머지 출연진이 자기 잘난 맛으로 신발도 벗었다가 다시 신고, 혓바닥에 제트엔진을 달고 속사포 쏘듯 별 거 아닌 거 가지고 떠들어 대는 재미라도 있다. 결코 돌아오지 않는 고도 씨, 물론 돌아오는 고도 씨도 있다, 나는 봤다, 이 고도를 부조리극의 평균이라고 여겼다가는 정말 코피난다. 쌍코피. 내가 읽은 프랑스 부조리극들도 역자나 출판사에서 희곡을 감상하는 포인트를 이 책만큼 설명을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조리극은 곧잘 줄거리가 지금 어떻게 꼬여가는지 읽으면서 헤매는 경우가 숱하다. 엽기토끼 정보라는 친절하게도 희곡 세 편 들어가기 바로 앞에 각 막마다 줄거리를 요약해놓았다. 줄거리 요약을 스포일러라고 치부해서 읽지 않고 그냥 작품으로 직진하지 마시라. 드라마 장면이 어떤 과정이고 무슨 장면을 위한 예비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요약. 내가 읽은 순서. 서문 – 역자 해설 – (각 희곡마다) 해설 및/또는 줄거리 – 본문.

  역자 해설은 책의 순서에 입각해 다 읽은 후로 돌려도 좋겠지만 ‘서문’과 ‘작품해설 및/또는 줄거리’는 반드시 읽고 본문으로 진입하시기 권한다. 만일 정말 이 책을 읽으시겠다면 말이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얄밉겠지?

  정말로 읽으실 분들에게,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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