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삶 클래식 라이브러리 2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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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에 쓰고 44년에 출판한 작품이다. 서른여덟 살의 뒤라스. 나치가 점령한 파리에서 갓 낳은 첫아이를 잃고, 작은 오빠 폴도 사이공에서 병들어 죽고, 새 연인이 생겼던 해. 이후 16년이 더 흐르면 뒤라스는 그의 작가 인생에 분수령이 될 <모데라토 칸타빌레>를 쓴다. 뒤라스의 많은 작품을 독자들은 <모데라토 칸타빌레>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싶어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한때 김치수, 김화영, 최현무 등을 우리나라 불문학계의 신세대, 프로방스 대학 출신들이라 프로방스 학파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이 가운데 한 명인 최현무, 필명 최윤의 번역으로 나온 <부영사>가 내가 처음 읽은 뒤라스인데, 난생 처음 읽은 누보 로망 작품으로, 당시가 아마 20대 초중반, 기껏해야 스물서너 살 정도였던 미성숙 청년이 겁 없이 읽었다가, 정말 뇌가 뒤집히는 줄 알았었다. 이후에 이용숙 선생의 번역본도 나왔지만 이하동문이었다. 단칼에 말하자면, <모데라토 칸타빌레>부터 시작해 이후 작품들은 재미없지만 하여튼 뭔가를 읽은 느낌이 난다. 그리고 속으로, “이런 문장으로 단편소설 쓰면 폼 나겠는데.” 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러나 극도로 건조한 문장의 나열은 작품에 몰두는 할지언정 마음에 들지 못하게 해서, 뒤라스의 책을 읽은 뒤엔 께름칙한 감상을 적게 만들고는 했다. 누보 로망 작품답게 서사가 부족하거나 심지어 어떤 경우엔 아예 없어서 그랬을지 모르고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뒤라스의 후기 작을 읽은 것이 하도 오래 전이라 지금은 “하여튼 뭔가” 또는 “다른 이유” 같이 슬그머니/비겁하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러다가 2년 전에 덜컥 읽은 것이 <태평양을 가로막는 제방>. 1950년에 출판한 작품으로 공쿠르상 후보에 올랐으나 장렬하게 미역국을 마시고 만다. 이후 34년이 지난 1984년 이 작품의 자매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애인>으로 공쿠르 상을 받는데, <애인>(또는 “연인”)은 뒤라스의 후기 작품으로는 의외랄 정도로 쉽게 읽힌다.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여태까지 읽은 뒤라스 가운데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책을 꼽으라면 바로 <태평양을 가로막는 제방>을 들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뒤라스의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별 다섯, 만점을 준 책이 <태평양…>이다. 하지만, 나더러 뒤라스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여전히 골치 아프지 않고는 읽기 힘든 <부영사>를 꼽게 만드는 작가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긴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이이의 전기와 후기 작품이 (내가 경험하기로)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평온한 삶>은 전기작품이다. 주제는 권태? 사랑? 하여간 그렇다. 아예 작품 속에서 노골적인 단어 “권태”를 약 아흔여덟 번 정도를 사용하고 있으니 주요 주제 가운데 권태를 빼놓을 수는 없을 듯하다. 사랑도 마찬가지. <태평양…>에서 오빠 조제프에 대한 쉬잔의 감정 정도를 <평온한 삶>의 화자 ‘나’ 프랑신 베르나트가 동생 니콜라를 향하고 있다. 책을 열면 아직 해가 뜰 기미가 없는 신새벽. 철로 옆 작은 공터에서 니콜라가 외삼촌 제롬과 심하게 주먹다짐을 한 다음이다. 늙은 제롬은 베르나트 씨의 뷔그 농장에 얹혀 살면서 꾸준하게 운동을 해 젊은 외모를 유지하려 애쓰지만 농장의 모든 남자들과 달리 일을 하지 않는 뺀질이다. 마치 베짱이 같다 할까?

  베르나트 씨는 19년 전까지 만 해도 벨기에의 작은 R시에서 10여 년 동안 시장을 지낸 시골 명사였다. 아내 아나와 나름대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며, 쉰 살이 거의 다가왔을 때, 아나가 마흔이 넘은 나이로 주인공 프랑신을 낳음으로 해서 부부의 행복이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즈음, 부부 앞에 외삼촌 제롬이 등장했다. 제롬은 아빠 루이 베르나트 씨를 주식 투자에 끌어들였고, 이것 때문에 빚을 갚아야 하는 신세가 된 베르나트는 시의 자선기금에 손을 대고 만다. 베르나트 씨가 주식투자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롬이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를 했기 때문이었다. 요구도 요구 나름이지, 미친 사람처럼 날뛰면서 얼마나 난리를 치는지 대가 세지 못한 매부는 견디다 못해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해버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회계가 엄격해야 하는 자선기금을. 비위 사실은 곧바로 들통이 나버렸으며, 순식간에 작은 R시의 거의 모든 시민들도 알게 되어 베르나트 씨는 시민들의 싸늘하고 경멸에 찬 시선을 받으면서 프랑스로 이주를 해야 했다. 심지어 아내 아나와 프랑신은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시민들의 해코지를 피하기 위해 밤기차를 타야 했다.

  모든 재산을 탕진해버린 베르나트 씨는 프랑스의 시골에서 크지 않은 농장을 사서 직접 농사를 짓고 소 몇 마리를 길렀다. 프랑신과 5년 터울로 아들 니콜라를 두었지만, 자식 둘 다 학교를 보낼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명색이 전직 시장이라 할지라도. 결코 평온하지 않은 <평온한 삶>의 주인공 프랑신은 스물다섯 살. 니콜라가 그러면 스물. 니콜라는 키가 크고 생기기도 곧잘 생겨 근방에서 인기를 독차지했을 정도라고 했는데, 이게 유별나게 동생을 좋아하는 프랑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정말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하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프랑신이 한 번도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는 고백으로 미루어 누나 혼자 생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름대로 조금은 분방하게 지낸 니콜라는 못생기고 멍청한 하녀 클레망스를 임신시켰고, 당시 프랑스 시골 분위기로는 그렇다고 해서 꼭 결혼을 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었음에도, 굳이 제롬 외삼촌이 클레망스가 언니한테 돌아가 지내는 도시 페리괴에까지 직접 가서 데려와 결혼을 하게 만들었다. 그후 아들 노엘을 낳는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사람 사는 일이.

 그렇다. 그럴 수 있다. 몇 달 전, 먼 도시에서 니콜라를 아는 청년 티엔이 뷔그 농장으로 찾아왔다. 얼마간 시골에서 하숙을 하며 쉬고 싶다고. 다음은 프랑신의 눈에 보이는 티엔의 모습.

  “어쩌자고 저렇게 아름다워서 지금처럼 화가 난 상태에서도 내가 쳐다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가. 어쩌자고 저렇게 매력적이이서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가. 어쩌자고 저리도 침묵으로 가득 차서 그 앞에서 하는 모든 말이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가.”

  프랑신은 3층 다락방에서 하숙을 하는 티엔이 2층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는 상상을 하며 밤을 하얗게 밝힌다. 그러나 옆방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극도로 속삭이는 공기의 파장들. 아무리 조심해도 웅얼거리거나, 가구가 움직이거나, 숨죽인 발자국 소리를 프랑신은 들을 수 있었고, 티엔이 혹시라도 올지 모른다는 조바심은 작은 소리들 때문에 거품처럼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으며, 몇 달 째 계속되는 행위의 소리들이 외삼촌 제롬과 올케 클레망스가 내는 것임을 벌써 알고 있던 ‘나’는, 집안 사람들도 이젠 좀 없어져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제롬을 어떻게 정말로 없애 버릴 수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생각해낸다. 니콜라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것.

  스무 살 니콜라는 권리가 생긴다. 외삼촌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와 정을 통한 연적을 벌하고, 그 벌로 살해할 수 있는 권리. 물론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다. 한밤, 그는 제롬에게 따라오라고 해서 철길 근처의 공터로 간다. 그들의 뒤를 프랑신이 쫓아가고, 둘은 격투를 벌인다. 아무리 운동을 했다 해도 젊디젊은 니콜라의 상대가 될까. “제롬은 허리가 거의 꺾이다시피 몸을 굽힌 채로 다시 뷔그 쪽으로 걸어갔다.” 이게 작품의 첫 문장이다. 극한의 고통에 신음하면서 제롬은 그래도 자신에게 오직 하나뿐인 피난처인 뷔그 농장으로 힘들게 걸어가면서 결코 평온하지 않은 <평온한 삶>은 시작한다.

 

  위의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뒤라스의 섬세한 감각이 절묘한 작품이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묘사를 할 수 있을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이 넘쳐 흐른다. 게다가 번역한 사람이 윤진이다. 가끔 ‘윤진’이란 역자의 이름을 검색해서 책을 사기도 하는 사람. 작가의 원래 문장이 그렇겠지만 그걸 외국의 언어로 다시 만들어내는 솜씨 또한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것들. 그것을 읽는 독자의 즐거움도 크다.

  읽다가 뒤라스의 생년을 확인한 적도 몇 번 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몇 살 때 쓴 것인데 세상과 인생을 이리도 잘 아는 거야?

  내가 읽은 뒤라스의 작품들은 서로 조금씩 연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프랑신-니콜라는 이야기했고, 2부를 읽으면서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장면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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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8-25 05: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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