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없다 대산세계문학총서 183
응우옌후이티엡 지음, 김주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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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소설은 처음 읽는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읽는 것일지도 모른다.


​  작가 응우옌후이티엡은 1950년 4월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태어났다. 이이의 출생시기와 장소,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생각해보면 도무지 응우옌후이티엡이 《왕은 없다》 같은 소설집을 냈다는 게 의아할 수 있다. 1950년 하노이 출생. 유년시대에는 프랑스 군의 잔인한 학살 전쟁을 거쳤고, 이어서 미국과 베트남 전쟁이 끝난 1975년엔 스물다섯 살의 혈기방장한 청년이었을 텐데, 놀랍게도 근세 베트남의 가장 곤고하고 처절한 시기를 관통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집 《왕은 없다》 안에서 독자는 전쟁의 참화와 후유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찾아볼 수 없다. 베트남 현대사에 베트남 전쟁이 마지막 전쟁은 아니었다. 베트남 통일이 정식으로 이루어진 1976년의 바로 다음 해인 1977년엔 캄보디아와의 국경 전쟁이, 1978년부터는 캄보디아와 동맹을 맺은 중국과도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이이가 소설가로 등단한 시기가 1986년임에도 소설은 격변하는 시대상을 산문에 담기 위하여는 일정한 숙성기가 필요하다. 반면에 시는 시인의 감상과 감정이 즉각적으로 터져나올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전쟁 시기에 유년시절을 보낸 소설가들은 심지어 70년대까지도 줄기차게 전쟁과 관련한 작품을 쏟아냈다. 21세기에 와서도 5공화국의 독재와 폭력, 그리고 광주항쟁을 소재, 주제로 소설가들은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이런 폭력에 노출된 유년, 소년, 청년기를 거친 작가들은 자신의 기억 속에 자신도 모르게 음각된 상처를 여전히 문자화 할 수밖에 없어서, 베트남에서 딱 이런 시기를 거친 응우옌후이티엡의 작품집에 자신이 겪은 현대사의 상처가 드러나지 않은 것과, 현대사에 관한 숱하게 많을 작품과 작가를 뒤로 하고 딱 이 작가를 선택해 세계문학총서 시리즈의 한 자리를 내준 문학과지성사의 선택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이런 현상이 바람직하다 아니다를 떠나 감탄과 찬사를 표할 수밖에 없다.

  베트남이라고 해서 모든 작가가 항 프랑스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모티브로 하는 작품만 쓰라는 법은 없다. 지금은 없다. 하지만 응우옌후이티엡이 등단할 무렵인 1986년엔 여전히 소비에트가 건재할 당시라서 성문법은 아니더라도 혁명과 공산주의 체제에 복무하지 않는 문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랄 것은 연이은 전쟁의 참화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미국 등의 고립정책, 그리고 자연재해까지 삼중고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그나마 현명했던) 베트남의 지도부는 응우옌후이티엡이 등단한 1986년에 드디어 개혁개방을 통한 발전을 목표로 도이머우 정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작가의 등단시점이 절묘하게 이때와 맞물려 있는 것이 우연일까, 작가의 의도(서른여섯 살의 늦은 나이에 등단한 것이 혹시 기다림)일까? 어떤 경우라도 일단 《왕은 없다》 안에 실존주의, 리얼리즘, 그것도 아니라면 전쟁문학이 끼어들지 않았던 것은 독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  작품은 상당 부분 중국의 현대소설과 많이 다르고, 적게는 비슷하다. 작가는 전쟁중이던 1970년에 하노이 사범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한 하노이 출생, 그러니까 대도시인 하노이 토박이다. 그러나 유년 시절엔 프랑스 식민군대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와 함께 북부 평야 지대의 농촌 마을에 유랑을 하며 살았고, 외조부로부터 한학과 한시를 배웠으며, 이때 천주교 마을에서 지내면서 천주교 교리와 성경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작품집 《왕은 없다》의 무대는 하노이를 비롯해 대도시, 중소도시, 시골, 산골, 소수민족이 거주지인 고산지대, 강변 등 거침이 없고 등장인물 역시 인텔리, 부자, 지주, 퇴역군인, 거지, 사냥꾼, 농부, 어부, 소수민족, 벌목꾼, 사기꾼 등을 망라할 수 있었다. 역자 김주영은 해설에서 “심지어”라는 부사까지 보태 말하기를 똥 시장 주인까지 등장시킨다고 했다. 똥 시장은 정말로 사람의 똥, 인분, 발효하지 않아서 “생 인분”이라 표시한 막 눈 똥을 거름용으로 판매하는 시장을 일컬으며, 똥 시장의 주인 혹은 매니저 또는 지배인은 아무리 자신이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쉽게 자신의 직업을 밝히지 못하는 일종의 열등감이랄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을 터, 이런 직업인까지 통틀어 집합시켰다. 불과 열다섯 편의 단편 소설을 실은 책 한 권에. 등장하는 종교도 베트남의 토속신앙, 불교, 유교, 천주교, 심지어 샤머니즘까지 뭐 하나 더 보탤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사람 사는 맛이 나고 사람 냄새가 난다. 중국 소설처럼 악착같고 복수 같은 거 좋아하는 점도 있지만 그들처럼 과하지 않으며, 한 사건이 있으면 그것이 어차피 그렇게 마감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저 흘러가는 물처럼, 다 그런 것이지, 라는 식으로 맺어지는 것이 많다. 굴곡 많은 시절을 누구 하나 징글징글하게 살지 않은 이가 있었겠는가만 응우옌후이티엡은 “사는 건 참 쉽지.”라고 말해버리고 만다. 지금, 21세기의 우리나라 독자들이 읽기엔 작품이 세련되었다고는 도저히 할 수 없지만 세상의 모든 소설이 세련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세련 대신에 뭔가 독자에게 전해주는 것이 세련보다 더 바람직할 수도 있는 바, 읽어보시라. 간혹 이이의 작품은 따듯하기도 하다. 따듯해서 해피엔드? 천만의 말씀. 전도연과 최민식 커플의 영화 <헤피 엔드>가 정말 해피했나? 해피하게 끝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따듯할 수도 있고, 해탈할 수도 있고, 초월할 수도 있다.

  “투박한 온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은 다만 조심하시라고 얘기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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