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연인
우르스 비트머 지음, 이노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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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시작하는 ‘오늘’은 뛰어난 지휘자로 평소에 한 30년 선배이자 거장 브루노 발터와 20년 정도 선배인 오토 클렘페러와 동등하게 비교 받기를 원했고, 원하는 바를 이루었던 지휘자이면서 스위스에서 가장 큰 콘쩨른의 대주주로 막대한 부를 향유하고 있던 에트빈이, 보면대 위에 놓인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 원본 악보를 넘기다 악보의 오른쪽 페이지 아랫부분을 손가락으로 잡고 있는 상태로 넘어지면서 90세를 훌쩍 넘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언젠가 이이가 ‘나’의 어머니 클라라에게 이 G단조 교향곡이야말로 여태까지 인류가 만든 음악 가운데 최고의 것이라고 했단다. 41개의 모차르트의 교향곡 가운데 단조가 딱 두 곡 있는데 둘 다 G단조다. 25번과 40번. 작가는 당연히 40번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만, 25번 역시 ‘발랄한 우수의 아름다움’으로 40번과 비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같은 사단조인 25번 교향곡의 매력에 관해서 한 마디라도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왕 모차르트 얘기가 나와서 조금만 더 해보자면, 모차르트 음악 가운데 단조 음악에 좋은 작품이 많다. 매우 다양한 양식으로 작곡을 했으나, 하이든은 교향곡과 현악사중주, 베토벤 하면 교향곡, 슈베르트는 가곡, 바그너나 베르디는 오페라, 이런 식으로 분류를 꼭 해야 한다면 모차르트는 오페라와 피아노 협주곡, 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치고, 그의 피아노 협주곡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20번은 근데 G가 아니라 D, 라단조다. 다양한 음반 가운데 이고르 마르케비치가 지휘하고 클라라 하스킬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판을 소위 명반이라고 할 수 있을 듯. 또 애청곡인 현악오중주 K. 516이 사단조다. 아마데우스 콰르텟의 연주가 내가 자주 즐기는 레퍼토리 가운데서도 상당히 앞 순위에 올라 있다. 아무쪼록 기회가 닿는다면 들어보시기 바란다.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사단조, K.550. 3악장. 미뉴에트.

이이의 40번 교향곡은 미뉴에트마저 혁신적인 낭만성으로 넘실거린다.


  이 에트빈이라는 키 큰 작자의 죽음으로 첫 페이지가 열렸다. 결말은, 그의 장례식이다. 그러니까 죽음과 장례식날까지의 며칠 동안 ‘나’는 ‘나’의 어머니 클라라가 평생 사랑했던, 사랑도 사랑 나름인데, 심장과 애간장이 곰삭은 곤쟁이젓처럼 푹 절여져버렸을 정도로 간직했던 사랑에 관하여 쓴 것이라고 보면 된다. 작가는 작품의 첫 문장마저 이렇게 적었다.

  “오늘 내 어머니의 연인이 죽었다.”


  저 먼 시절, 적도 아래 아비시니아의 산간지대에서 개를 신으로 섬기는 부족과 사자를 섬기는 레오니 부족이 굶주림으로 인한 결투를 벌였다. 싸움에 진 레오니 족의 키가 크고 마른 청년은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몰라도 극도의 기아와 갈증 상태에서 베르가모의 도모도솔라 근처 알프스 어느 골짜기 마을 입구까지 이르러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그를 발견한 동네 여인이 탈진한 그의 발목을 끌어 돌로 만든 움막집에 들인 다음, 깨끗하게 씻기고 갈증을 풀어주고, 함께 잠들었는데, 검둥이가 마을에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여인의 집에 들어와 보니, 여인은 발가벗은 채 잠에 빠져 있고, 검둥이는 이미 죽어 있었단다. 9개월이 흐른 후에 여인은 아들을 낳아 ‘도메니코’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연히 짙은 갈색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나귀를 몰고 떡갈나무 포도주 통을 산을 넘어 운반해 먹고 살던 짐꾼 도메니코는 열두명의 아들을 두었다. 물론 딸도 있다. 하여간 마지막 아들이 울티모. 많은 아들이 도메니코보다 먼저 세상을 떴더라도 여전히 아들이 많아 굳이 막내 울티모까지 험한 짐꾼 일을 시키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울티모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시골 교구신부가 그의 재주를 알아채고 브릭 예수회 기숙학교의 사생으로 보내, 신성한 학교 덕분에 평생 모든 종교적인 것에 대하여 극도의 거부감을 지니게 된 울티모는 그곳에서도 실력을 발휘해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스위스 국립공업전문대학에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장학금 수혜를 입어 학비 없이 졸업한다. 기계전문기사 자격증을 따 갓 24세에 기계공장에 입사했고,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대기업으로 변모한 회사에서 부사장단의 일원으로 굉장한 부자가 된다. 자주색 피아트 오픈카를 들여놓았는데 그건 도시에서 처음으로 승용차를 구입한 사람들의 일원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이후 아내가 죽었고, 어려서부터 이상한 기질로 외가 친척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한 딸 클라라는 예상치 못한 미인으로 성장했으며, 본인은 목석 같은 인간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다가 다가온 1929년 10월 26일, 검은 금요일의 다음날 아침, 울티모는 조간신문을 통해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전 재산이 날아가버렸다는 소식을 읽고 뇌졸중을 일으켜 그날 아침에 파리에서 돌아온 클라라의 품에 안겨 숨을 멈춘다. 이탈리아의 알프스 산골짜기 출신 울티모는 구릿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검은 피부의 증조부, 갈색 피부의 조부, 구릿빛 아버지에 이어 태양의 아이와 같은 피부색을 지닌 클라라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빛나는 미모를 갖게 된다. 말년 팔자가 험해서 그렇지 세상에 날 때는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 이이의 나이 스물 근처에 이르자 늘씬한 다리, 검은 두 눈동자, 도톰한 입술을 하이힐, 모피, 자동차 바퀴만 한 커다란 모자로 치장한 채 아버지와 함께 오케스트라의 정기연주회를 관람하곤 했다. 아니, 주인공인 클라라보다는 이이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연인이라고 여겼던 지휘자 에트빈에 관해 말해보자.

  가난한 야심가 에트빈. 젊었을 때까지 지독하게 가난했다. 음악에 관해 굉장한 관심이 있었지만 하다못해 임윤찬처럼 아파트 상가에서 피아노를 배울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못한 에트빈은 지방 작곡가에게 간곡하게 요청해 무료로 개인 레슨을 받는 기회를 잡는다. 그러다 작곡보다는 지휘에 천재가 있다는 걸 발견한 스승의 권유로 지휘법을 공부하게 되고, 천부적으로 비즈니스 마인드가 충만했던 젊은 에트빈은 음악학교의 남녀 학생들을 모집해 자신의 교향악단인 “청년교향악단”을 창단하기에 이른다. 에트빈의 마케팅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청년향’을 특화해 히트 상품을 만들기 위해 전통적인 레퍼토리가 아니라 교향악단이 연주를 기피하는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첫 연주회의 레퍼토리로 버르토크, 젬린스키, 그리고 지방 작곡가의 곡을 선정하고, 앞쪽에 앉은 연주자의 친인척과 친구들의 갈채와 뒷자리에 앉은 청중들의 야유를 동시에 얻어내, 어쨌든 장안의 화제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이때 나중에 베를린에서 연주자로 성공하고 부헨발트에서 살해당할 운명인 여성 첼리스트의 친구 자격으로 앞자리에 앉았던 클라라와 에트빈의 첫 눈길, 서로 눈이 마주쳤는지도 모른 채 교환된 첫 눈길을 주고 받는다.

  천재를 가지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이기적인 품성을 에트빈 역시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겠다. 쉽게 말해서 그냥 인간으로의 에트빈은 그가 좋아했던 리하르트 씨들처럼 재수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얼마 후 클라라에게 교향악단의 행정과 회계, 그리고 정기권제도, 초청공연, 솔리스트 접대, 단원 복지를 총괄하는 “무급” 총무직을 제안하고, 클라라는 이를 받아들인다. 평생 부유하게 살았던 스무 살 남짓의 클라라는 청년향의 업무를 위해 아버지한테 받은 돈과 아버지 집의 방을 사용하는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른다. 에트빈에 대한 선의, 호감 때문이었겠지. 클라라의 무급봉사, 금전적 지원을 에트빈이 몰랐다고 볼 수 없지만,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클라라를 자신의 충실한 수하처럼 부리는 에트빈은, 청년향의 첫번째 출장공연인, 제 3회 현대음악 주간의 파리 연주에서 자신의 곡을 연주한 라벨로부터 격찬을 받는 대성공을 이루고, 이에 감격한 파티 끝에 클라라의 방에 들어 기어이 자빠뜨린다.

  클라라는 에트빈을 사랑했겠지. 근데 에트빈은? 천만의 말씀. 아니올시다. 위에서 이미 얘기했듯, 파리 공연을 마치고 다음날부터 1박 2일로 끝난 기차여행 끝에 돌아온 1929년 10월 26일 아침, 클라라는 돈 한 푼 지니지 못한 가난뱅이 고아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여기까지만 하자. 이후 드라마는 전형적인 신파극으로 접어든다. 물론 클라라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에트빈은 그가 겪은 숱한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을 뿐이지 애초부터 사랑은 무슨 사랑. 그럼에도 어려서부터 특이한 기질로 적지 않은 말을 들어온 클라라는 세월이 흘러도 자신의 사랑을 버리지 못한다. 당연하지. 그게 버린다고 버려지는 건가. 난 책을 읽는 도중에 클라라는 자신이 선택을 해서 하여간 평생 품을 수 있는 사랑이라도 한 번 해봤지만, 클라라의 남편과 아들은 무슨 죄가 있기에 남편은 자신의 죽음이 아내와 갈라놓기 전까지 변변한 정 한 번 받아보지 못했고, 아들은, 책을 읽어보시라, 하여튼 이 두 명의 남자들이 안타깝기 한이 없었다.

  감각적으로 돋보이는 문장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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