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눈
잘릴라 바카르 지음, 유효숙 옮김 / 연극과인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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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유행하는 난해한 시집을 읽다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으면 자주 책 뒤에 실린 해설을 먼저 읽었다. 그러면 시를 읽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나는 지금 무릎을 치고 있다. 역자 유효숙의 작품 해설을 먼저 읽을 것을.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무척 도움이 되었을 텐데.
  <주눈>은 원작이 있다고 한다. 튀니지의 여성 신경정신과 의사 네쟈 잠니가 쓴 <정신분열증 환자의 이야기>. 이것을 각색해 극작품으로 만든 이가 잘릴라 바카리. 내가 지금 ‘희곡’이란 말 대신 ‘극작품’이라고 표현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드라마투르기, 또는 드라마터지, 라는 직업이 있다. 희곡을 연극으로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개입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연출자. 그럼 연출자는 희곡을 그대로 연극으로 전환시킬까? 요즘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드라마터지가 있어서 희곡을 연극으로 올리기에 적절한 대본으로 만드는 것을 필두로, 극 전반에 걸쳐 해석하고, 희곡이 아닌 대본을 다시 편집하는 등 예전엔 연출이 담당했던 것들의 일부를 수행함으로써 연출자를 보좌하는 일을 한다.
  잘릴라 바카르는 1952년에 튀니지에서 태어나 불문학을 전공한 극작가, 드라마터지 그리고 배우로 활약했다. 남편 파델 쟈이비가 유명한 연출자라서 자신도 연출을 하기보다는 연출을 보좌하는 드라마터지에 만족했을 수도 있고, 그러다보니 <정신분열증 환자의 이야기>를 <주눈>이라는, 희곡 말고, 연극의 대본으로 고쳐 썼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유효숙은 작품해설에서 “잘릴라 바카르는 문학적으로 뛰어난 희곡을 완성시키려는 목적이 아닌 정확하고 진실된 말, 등장인물들이 꼭 하고 싶은 말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글에 집착하지” 않았다고 하며, “남편 파델 쟈이비의 연출로 극단 단원들과 함께 즉흥을 통한 집단창작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썼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즉흥을 통한 집단창작’이 대충의 스토리를 갖고 무대에 오른 연기자들이 즉흥적으로 소위 애드립을 쳐가며 연극을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 대본을 만들기 위해 연출자, 배우, 그리고 드라마터지가 각 부분을 연기해보고 토의를 거쳐 최종 대본을 확정지었다는 의미다.
  아직 재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이 나온 2007년에 우석대학의 연극영화학과 (지금은 미디어영상학과가 있고 연극영화학과는 없어졌다. 문창과를 포함한 교수진 명단에 이름이 없는 걸로 봐서 이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교수였던 역자는 책이 담고 있는 소기의 목적, “제대로 된 연극 문법과 언어”로 만들기 위해 연극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리딩reading을 시켜 문학적 언어가 연극적 언어로 잘 바뀌었는지 의견을 물었다고 밝히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설마 마음만 표했을까. 자장면, 짬뽕 말고 탕수육, 양장피에다가 고량주도 시켜줬겠지? 아니면 인간도 아니다. 그지?
  <주눈>은 2005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주눈의 눈>이란 제목으로 아랍어 공연을 했고, 이때 유효숙이 자막 번역을 위해 작가 잘릴라 바카르가 직접 옮긴 프랑스어 판본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튀니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으니 거의 불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할 정도였을 것. 번역 때문에 의미가 어긋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제목 “주눈Junun”은 우리말로 정신착란 상태, 광기, 광란이란 의미란다. 게다가 주인공의 이름이 “눈”이다. 그래서 첫 장을 넘기자마자 눈이 등장해 여성을 혐오하는 내용의 독백을 하면, 분명히 미친놈인 건 알겠는데 조금 헷갈린다. 역자는 “원래 제목의 강렬한 의미가 제목의 번역으로 살려지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제목은 번역하지 않고 원작의 아랍어 <주눈>으로 표기”했다고 하지만 <주눈>이라고 해서 오히려 독자를 헤매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생각을 해보기 바란다. 우리들 가운데 불어 단어 다섯 개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나는 심통나면 회사 서류 서명 란에 “Merde”라고 쓰기도 했는데, 아직까지 해고 안 당하고 있다. 며칠 남지 않았지만.

 

  눈이란 이름의 정신분열증 환자와 이이를 치료하는 전문의 ‘그녀’가 주인공이다. 지독하게 가부장적인 아랍과 이슬람 문화 속에서 살아야 하는 남자의 스트레스. 남자라면 이래야 하고, 남자라면 저래야 한다는 사회적, 가정의 요구. 폭력적인 아버지와 장남만 사랑하고 나머지는 내가 미쳤지, 저런 딸들과 아들을 또 낳았다니, 하는 눈치를 끊임없이 던지는 어머니. 아버지가 죽자 또 다른 폭력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맏형.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독일로 가버린 수치를 집안의 동생들에게 배설해버리는 형, 11명의 형제자매 속에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실어증에 걸리고 급기야 분열증까지 생겨 열두 살에 가출, 열네 살에 소년원, 열일곱에 감옥, 열여덟에 군대, 스물네 살에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눈. 모두 11명의 형제자매 가운데 둘은 어려서 죽고, 맏형 ‘카’는 감옥에 수감 중인데 극 중에 출감한다. 맏딸은 외국인하고 결혼해 집에 없다. 형제 하나는 소년원에 있고 두 명은 이탈리아로 도망갔으면 지금 집구석에는 네 명의 자녀, 세 딸 ‘사’, ‘와우’, ‘카프’와 눈만 어머니와 살고 있다.
  콩가루 집안도 이런 콩가루가 없어서 맏아들 카는 술과 약을 사기 위해 돈을 받고 셋 남은 여동생을 시간제로 나누어주는 이른바 포주도 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여동생들을 두드려 패고, 남동생 눈은 좀 더 심각한 수준으로 두드려 패는 걸 취미생활로 여긴다. 눈의 착란증세에 가세했던 건, 그가 최악의 것으로 여기는 여자의 몸에 한 번 가까이 했다가 냉큼 걸려버린 매독도 한 몫을 했을 것. 눈의 분열증은 병원에서도 수시로 탈출하기에 이르러 마치 자식처럼 회복을 바라던 그녀 말고는 눈의 증세를 치료하기 위해 어떤 의사도 협력하지 않는다. 그녀는 병원 안에서 말고 눈의 집, 눈이 지정하는 장소에서 계속해 치료를 멈추지 않는데, 무시무시한 여성 혐오가 그녀의 헌신적인 치료의지를 조금씩 사랑하며 완쾌…… 되면 연극이 아니겠지? 그렇다. 20세기도 아니고 21세기 현대극에서 조건 없이 해피엔드를 줄 수는 없다.
  아랍과 이슬람 사회에서도 갈등을 겪는다. 결국 사람 사는 일은 그것이 천국이나 지옥이 아니라면 다 거기서 거기구나. 무슬림도 그들의 계율이 정하는 바에 따라 행위하고 사고하지만 맹목적인 계율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해 머리가 헤까닥 돌기도 하는구나. 결국 종교는 이거나 저거나 어차피 다 아편이라는, 망치를 든 철학자의 이야기가 맞는 말이었구나. 뭐 이런 걸 배울 수 있다고? 아니다. 한 불쌍한 영혼이 겪는 격렬한 갈등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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