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목소리, 다른 방 트루먼 커포티 선집 1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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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트루먼 커포티 역시 자신이 쓴 첫 번째 장편소설인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은 자신의 유소년 시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의 초년 팔자를 한 번 보자.
  1923년이 저물어가던 시절, 아출러스 퍼슨스라는 이름의 어느 세일즈맨이 뉴올리언스에 왔다가 크리스마스 베이비를 만들어, 24년 9월에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니 트루먼 스트랙퍼스 퍼슨스라는 이름이었는데, 이때 엄마 릴 매 포크가 글쎄 열일곱 살이었다. 그러니 열여섯 또는 갓 열일곱의 청소년을 건드렸다는 말이다. 지금 같으면 미성년 약취 간음으로 수십 년 동안 콩밥을 먹어야 하는 중죄이거늘 그냥 혼인신고 한 장으로 때웠다. 이런 아빠는 결국 사기죄로 큰 집에 들어가 인생교도의 목적 아래 도를 닦는 시간을 보내야 했고, 어린 아내는 당연히 이혼을 해 유년 트루먼은 엄마의 친척집에서 5년가량 지내야 했단다.
  엄마 릴 매 포크는 쿠바 출신 사업가와 새로 결혼을 했고, 이이의 성이 커포티라 이제 정식으로 트루먼 커포티라는 이름을 단다. 이때 나이 아홉 살.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의 주인공 조엘 해리슨 녹스는 열세 살 사내아이로 목요일에 뉴올리언스를 떠나 금요일에 남부의 파라다이스 채플 고속도로변 모닝스타 카페에 혼자 도착해 하루를 묵었다. 오늘 눈시티에 가야 하지만, 눈시티로 가는 어떤 버스나 기차도 없어서 주 6회 우편물 따위를 전해주는 추레리 터펜타인 컴퍼니 소속, 기사 샘 래드클리프가 몰고 다니는 포드 픽업트럭에 얹혀 타고가려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소설은 시작한다.
  조엘과 함께 외출을 했다가 열병에 걸려 그길로 엄마가 숨을 거두자 친절하고 다정한 엘렌 이모가 조카를 거둔다. 하지만 이모 역시 다섯 명의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키우는 처지고, 가정의 유일한 수입원이 신발가게 점원을 하는 이모부 한 명이라 폰차트레인에서 가까운 더러운 2세대 주택에서 그냥저냥 살고 있었다. 조엘이 아주 어려서 부모가 이혼을 한 터라 이제 초년 팔자 걱정이 한창일 때, 저 멀리 눈시티에서 정기 구독하던 신문을 통해 조엘의 엄마가 세상 등진 것을 알게 된 조엘의 생부가 직접 엘렌 이모에게 편지를 써서, 반드시 학교공부를 시키겠다는 것, 크리스마스 휴가는 엘렌 이모와 함께 지내게 해주겠다는 것 등 전혀 지킬 생각 없는 약속을 남발한 채, 그래도 눈시티까지 여행비용에 쓰라고 서명한 수표를 동봉한 거였다. 편지를 받은 엘렌 이모가 한 숨 돌린 건 당연했겠지.
  근데 조엘 해리슨 녹스를 데려가기 위해 그를 부른 아빠의 이름은 에드워드 R. 샌섬. 음. 녹스는 엄마가 재혼한 남자의 성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주민등록에 올라있는 이름이 녹스라서 조엘은 책이 끝날 때까지 녹스라고 불린다. 이쯤 되면 조엘 녹스와 트루먼 커포티의 초년 팔자가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인지 신경 안 쓰고 그냥 읽어나갔더라도 마지막 문단 쯤 오면 저절로 성장소설이란 걸 알게 된다.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쓴 대로 읽으면 제일 먼저 탁, 감잡히는 게, 미국 남부의 고딕소설이라는 것. 누가 생각나느냐 하면 당연히 카슨 매컬러스. 그이의 전매특허인 거친 여자아이 아이다벨이 등장하고, 눈시티로 태워주는 터펜타인 컴퍼니 소속 운전수 샘 래드클리프를 비롯해 다수의 남부 사람들은 거대한 체격에 털이 숭숭난 마초들이며, 식음료 판매점인 ‘R.V. 레이시의 프린시스 플레이스’ 사장 로버타 V. 레이시 양은 거구에다 입 주변에 난 사마귀 근처의 빳빳한 털을 쓰다듬는 취미를 즐기고 있으며, 조엘의 의붓어머니, 어쨌건 간에 호적상 계모인 에이미 스컬리는 분명히 샌섬 씨와 혼인신고를 했건만 여전히 에이미 양이라고 불리는 건 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에이미의 사촌인 랜돌프 스컬리는 천식발작을 가끔 일으키는 허약체질이다.
  이 집안의 마차꾼이면서 젊은 시절엔 거의 집사 일을 했던 지저스 피버 노인은 아흔 살이 넘은 건 확실하고, 아마 백 살도 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게 눈시티 사람들이 의견을 같이 하는 바인데, 이 흑인 노인이 언제 죽을지 몰라 노후를 조금이나마 편히 보내게 해주려고 세인트루이스에서 살던 소녀 미주리를 불러온 것도 벌써 12년 전이다. 에이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주’라고 부르는 미주리는 열네 살 때 케그 브라운이라는 불한당 깡패 같은 작자에게 몸을 망친 것도 모자라 면도칼로 목을 주욱 그었음에도 흉터만 남기고 아직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는 우아한 얼굴과 몸매의 20대 초반 흑인 여성이다.
  이것들 말고도 이 소설을 남부 고딕으로 규정할 요소를 무지하게 많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고딕소설이다, 맞지?

 

  고딕소설, 카슨 매컬러스를 이야기하면 작품 속의 동성애 코드도 꼭 거론한다. 트루먼 커포티의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저 위에 작가의 초년팔자 얘기할 때 커포티라는 이름을 준 쿠바 출신의 계부를 언급한 적 있다. 이 책에서 쿠바가 한 번 나온다.
  스페인에 그림공부를 하러 간 에이미 양의 사촌 랜돌프는 스페인 박물관에서 대가의 그림만 죽자사자 모사하고 있다가 미모의 돌로레스를 만난다. 당연히 연애 시작. 이들은 마음먹고 쿠바로 가서 열대와 해변을 만끽하는데, 거기서 멕시코 출신 권투선수 페페 알바레스와 안면을 튼다. 근데 가만 보니까, 돌로레스, 이 촌스런 이름의 아가씨가 페페 알바레스, 건장하고 힘세고, 돈도 잘 벌고, 인기도 많은데다가 생기기도 잘 생긴 권투선수하고 연애를 하는 거였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나. 페페 알바레스하고 맞장을 뜨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정도의 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불쌍한 사촌 랜돌프. 그러나 안심하시라. 랜돌프의 질투는 돌로레스를 향한 것이 아니라 페페 알바레스를 향해 있던 거니까. 이렇게 드러나는 동성애적 취향. 물론 동성애에 대한 관심은 조엘의 뉴올리언스 시절에 친구들과의 탐정놀이에서 언뜻 내비치기도 하지만. 이 와중에 여기까지 와서야 알게 되는 거. 권투선수 페페 알바레스의 매니저가 바로 조엘 녹스의 친아빠 에드워드 샌섬.
  근데 이 네 명 사이에서 어떻게 계모 에이미가 등장할까. 랜돌프, 돌로레스, 페페, 에드워드가 난마처럼 엉겨버린 가운데 돈 많고 철없는 젊은이들이 항용 그렇듯 (뉴올리언스로 자리를 옮겨) 방탕한 생활을 영유하다가 하루는 페페가 술을 잔뜩 먹고 숙소에 들어와 온갖 기물을 다 때려 부수고 불쌍한 랜돌프의 코뼈를 부러뜨린 다음 쫓아내버린다. 열을 받은 랜돌프는 위험한 장난감 권총을 들고 이들에게 다시 접근해 술을 마셔 어질어질한 상태에서 페페인줄 알고 총을 두 방 쐈는데, 에그머니, 에드워드가 맞아버렸다. 자기 혼자는 문제해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베이비 보이 랜돌프는 급하게 눈시티 스컬리시 랜딩으로 전보를 쳐 사촌 누이 에이미와 그 집에서 오래 집사생활을 하는 지저스 피버 노인을 부른다.
  한 눈에 상황을 정리한 에이미. 이이는 지극정성으로 에드워드 샌섬 씨를 간호하는 한편 즉각 돌로레스와 페페를 떨쳐버리고 목사를 초빙해 샌섬 씨와 혼인을 해버린다. 이어 새신랑과 함께 스컬리시 랜딩으로 돌아와 새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이후 몇 년이 지나 샌섬의 전 아내가 죽어 이제 천애고아가 된 조엘의 팔자를 신문에서 읽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것.

 

  성장소설이라니까 조엘이 눈시티에 올 때 시작해 떠나면서 작품이 끝나나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소년기가 어떤 기점으로 끝난다는 것을 모르고 어영부영 살다보니 청소년이 되고, 성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늙어가는 것을 느끼지만 한 소설 작품의 주인공이 되려면 적어도 자신의 소년시절이 이것으로 끝났다는 자각이 있어야 하는가보다. 조엘도 마찬가지. 자기가 그런 마음이 들 때를 딱 짚어서 땅 위에다 줄을 긋고 이렇게 말하면서 끝난다.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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