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스트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6
쉬잉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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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세기 전인 기원전 484년, 위나라에서 고단한 몸을 쉬고 있던 공자에게 제나라가 고국인 노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궁지에 몰린 노나라는 신하 염유冉有의 말에 따라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초빙하기에 이른다. 일찍이 포나라에서 공자 일행을 붙잡아 만일 위나라로 가지 않으면 보내드리리라, 하기에 절대 위나라로는 가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그길로 위나라로 내뺀 적이 있는 공자. 이런 선생더러 “맹세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명색이 맹세인데 말입니다.”라고 시비를 붙은 인물이 단목사(책에 따라 端木賜(두산백과, 네이버 검색) 또는 端沐賜(사기열전, 중니 제자 열전. 민음사 2007)) 자공子貢. 이때 공자 가라사대, “강제된 맹세라면 귀신이라도 들어주지 않는 걸, 하물며…” 말을 맺지 못했던 적이 있다. <사기 세가>에 나오는 얘기다. 이것을 보면 천하의 현철이었던 공자 역시 임기응변의 중요성을 인정하였거니와 스스로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주인공이자 스승 공자가 죽고 6년 동안이나 묘의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는 자공의 놀라운 임기응변은 틀림없이 공자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겠다.

  노나라는 춘추시대 중원 한복판에 있었다. 노른자 땅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정학적으로는 매우 불리하다. 동서남북 사방이 다 적으로 둘러싸인 형국. 나라의 덩치가 클 도리가 없고, 크더라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야금야금 주변국에 먹혀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었을 터. 게다가 노나라는 공자의 모국답게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그저 인의예지신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기를 좋아해 외침을 당하면 대적을 하기보다 거의 언제나 주변의 다른 나라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야 했으니 얼마나 피곤했을까. 기원전 484년도 마찬가지였다.

  제나라 대부 전상田常, 원래는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가 또 다른 세력들이 두려워 대신 이들의 군대와 협력해 노나라를 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래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 접경에 와서 진을 펼치고 있었을 때, 국력이 약한 나라의 원로로 눈물을 훔치고 있던 공자는, 많고 많은 제자 가운데 자기로부터 임기응변을 제대로 전수받은 자공을 불러 어떻게 해서라도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라는 특명을 전한다.

  사기열전에 보면, “자공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을 좋아하여 때를 보아서 돈을 잘 굴렸다. 그는 남의 장점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남의 잘못을 덮어 주지는 못하였다. 그는 일찍이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재상을 지냈으며 집안에 천금을 쌓아 두기도 하였다.” 이 내용을 극작가 쉬잉은 주목, 강조한다. 당장 제나라가 쳐들어오는 판국에 자공은 나무 널빤지를 다량으로 사두기 위해 목수에게 가서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일단 침략을 받으면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는 노나라 군사들은 거의 몰살을 당할 터이니, 이들을 매장하려면 무지막지한 수량의 관이 필요하리라는 계산이었다. 이 정도의,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두뇌 회전과 순발력이면 가히 최상의 협상꾼이 되리라는 공자의 생각이 틀리진 않았을 터. 그리하여 자청해 후배 자공의 경마잡이로 나선 거친 성격과 용맹한 자로와 함께 먼저 제나라 전상의 막사로 향한다.

 공자의 제자요, 상인으로 이름을 높인 자공을 맞은 강대국 제나라의 최고 권력자 전상. 그는 자공에게 설득을 당해 노나라 대신 오나라를 치기로 계획을 바꾼다.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공으로부터 노나라에서 만든 관 짜는 판자를 도매가격으로 넘겨받기로 한다. 그리고 하나 더, 언제나 공격보다 수비에 치중해왔던 노나라는 다른 어떤 곳보다 높은 품질의 방패를 생산했다. 그리하여 어떤 창으로도 뚫을 수 없는 방패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겠다고 제의하고, 전상 역시 이를 받아들인다.

  이후 오나라로 길을 떠난 자공. 그는 오나라 국무총리 격인 태재이자 간신인 백비에게 뇌물을 주고 합려의 아들 부차를 만나, 월나라 구천을 꺾어 기세가 올라 이제 중원을 도모할 시기를 노리고 있던 부차에게 제나라를 물리치고 이어 내친김에 진晉나라까지 점령하여 패자霸者에 오르라고 쑤석거린다. 부차는, 사기열전엔 단 한 번도 출연하지 않는 경색지국의 아내 서시와 천하의 간신인 백비의 꼬임에 넘어가 선왕부터 왕실에 충실해, 먼저 월나라 구천을 멸망시키라고 간하는 참모 오원五員, 즉 오자서伍子胥에게 보검 촉루蜀鏤를 내려 자살하게 해버린다. <로비스트>는 현대문학 작품이다. 그리하여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스스로 자기 목을 찔러 죽어가면서 오자서는 비통하게 오나라와 부차를 저주한다.

  “내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왕의 관을 짤 목재로 쓰도록 하라. 아울러 내 눈을 빼내 오나라 동문에 매달아 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라.”

  그러나 오자서를 주살하는 일은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기 1년 전, 기원전 485년에 있었다. 쉬잉은 극을 더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오자서와 서시를 작품에 끌어들였을 것이다. 게다가 간신 백비에게 자공은 노나라에서 만든 최고 품질의, 어떤 방패라도 막지 못하는 창을 염가에 판매하겠다고 제의한다. 제나라 전상에게 방패, 오나라 백비한텐 창을 팔아먹는 자공. 쉬잉은 처음부터 극을 비장하게 끌고 가려 하지 않았다. 이건 유명한 모순矛盾 이야기. 아직 시기가 도래하지 않은 전국시대에 초나라 상인이 한 자리에서 방패도 팔고 창도 팔다가 생긴 일인데 이걸 공자의 제자 자공이 써먹었다.

  <로비스트>의 원래 제목은 세객(說客). 능란한 말솜씨로 각지를 유세하고 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이 책에선 당연히 자공을 말한다. 자공은 노나라를 구하기 위해 오나라와 제나라, 오나라와 진晉나라,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을 발발시켜야 했고, 결과, 목적으로 한 노나라는 멸망하지도 않았고, 전쟁의 참화를 겪지도 않았다. 그러나 당시 시각으로 중국이 전 세계였으니, 자공의 세 치 혀로 세계대전을 발발시켜 수많은 군사, 농민들이 죽어갔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자공은 한 번 나서서 노나라를 보존시키고 제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진晉나라를 강국이 되게 하였으며, 월나라를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다. 즉 자공이 한 번 뛰어다니더니 각국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10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기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쉬잉이 만든 자공은, 자신 때문에 생긴 거대전쟁과 중원을 불길로 인해 자책에 휩싸인다. 그리하여 스스로 나는 개자식이다, 라는 회한 또는 자의식에 젖어 있으며, 이건 당연히 2천5백 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만든 의식의 차이이리라. 춘추시대 역사를 재미있어하는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다. 당신이 사기 열전의 오자서 열전과 중니 제자 열전까지 읽었더라면 더욱 재미있는 독서가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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