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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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세기에 나희덕의 시집 《뿌리에게》와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를 읽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나희덕의 천생 시인 기질을.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중략)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  (후략) <어린 것> 부분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산보하다 만난 새끼 다람쥐를 보고 젖이 팽 도는 여인을 우리가 시인이란 말 말고 도대체 뭐라 불러야 하나. 전적으로 게으름 탓이다. 이후로 나희덕이 어떤 시를 썼는지, 지금 뭘 해서 먹고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2021년 현재 나희덕은 서울과학기술대학의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는 《사라진 손바닥》이 나온 시점인 2004년에는 조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였다. 시집을 읽고 짐작해보면 서울의 전세보증금을 탈탈 털어 광주로 짐작되는 곳으로 하향을 해 아이들 둘을 데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시에는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일원을 무대로 하고 있는 것들이 제법 된다. 첫 번째로 실은 시가 표제시이기도 한 <사라진 손바닥>이다. 전문을 읽어보자.



  처음엔 흰 연꽃 열어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짝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전문)



  1연은 연꽃의 한 살이. 처음엔 연꽃이 피고, 꽃 진 다음 넓은 꽃잎만 연못 가득하다가, 가을이 오니 가는 연꽃 대 위에 연꽃의 씨가 가득한 씨방이 고개를 든 모습. 그리고 연밥을 다 채취한 다음 물이 빠진 진흙 위에 꽂힌 꽃대를 수많은 창이라 노래하고 있다. 이하는 진흙 속에서 연밥을 줍기도 하고, 연근을 캐는 노동을 그린 2연, 시인의 감상이 3연, 연꽃이 핀 무안의 회산 백련지라는 지명을 밝히고 있다. 나는 연꽃으로 유명한 중국의 옛 월나라 회계 부근의 지명이 회산인줄 알고 찾아보니 전라남도 무안의 유명한 연꽃 연못이 있는 곳이다. 한 20년 전 쯤에 나도 가본 적이 있었으나 거기 지명이 회산인지는 몰랐다. 이번 시집의 장소는 처음이 직장인 조선대가 있는 광주와 전남 지역이고, 그 외로 오스트리아 알프스 지방, 북한 땅이 바라다보이는 중국 연길시 일대와 젊은 시절을 보낸 서울 서대문구 정도다.

  그러나 나희덕하면 저 위에 인용한 <어린 것>에서 볼 수 있는 ‘모성’이다. 새끼 다람쥐를 보고 젖이 팽 도는 것처럼, 모성의 근본은 가여운 것들에게 밥 한 그릇을 주고 싶어 하는 심정 아닐까 싶다. 이번 시집에서도 이런 성향의 시가 몇 편 보인다. 예컨대 이런 시.



  조찬朝餐



  깃인가 꽃인가 밥인가

  저 희디흰 눈은

  누구의 허기를 채우려고

  내리고 또 내리나

 

  뱃속에 들기도 전에 스러져버릴

  양식을, 그러나 손을 펴서

  오늘은 받으라 한다


  흰 밥을 받고 있는 언 손들

  목튤립 마른 열매들도

  꽃봉오리 같은 제 속을 다 비워서

  송이송이 고봉밥을 받고 있다


  박새들이 사흘은 쪼아먹고 가겠다 (전문)


 

  이번엔 새끼 다람쥐 대신 박새들이다. 탐스럽게 생겨 숭실대학의 교화로 지정되기도 한, 목튤립 꽃의 열매를 다 비운 마른 꽃봉오리 속에도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것을 보고 시인은 고봉밥이라고 했다. 시가 정말 쉽다. 이렇게 쉽게 써도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나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 이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김진수는 나희덕의 시쓰기는 “누에나 거미가 실을 자아 고치를 짓거나 거미줄을 짜는 일과 꼭 마찬가지로 일종의 직조술로 인식된다.”고 말하면서 해설을 시작하기 전에 데뷔시집 《뿌리에게》의 <시> 전문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누에나 거미와 비교해서 그렇지 시를 짓는 일, 나아가 산문을 쓰는 일을 포함한 모든 문학적 행위를 일종의 직조하는 행위와 비교한 건 드물지 않은 거 같다. 비슷하게 내가 잘 쓰는 표현으로는 벽돌 쌓는 일인데 이것도 직조술과 매우 가깝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시집에도 누에고치에 관한 시가 들어 있다.



  검은 점이 있는 누에



  잠실蠶室에서 가장 두려운 적은 파리다

  문을 단단히 닫으라던 어른들의 잔소리도

  행여 파리가 들어갈까 싶어서였다


  누에들이 뽕잎을 파도처럼

  솨아솨아 베어 먹고 잠이 든 사이

  파리가 등에 앉았다 날아가면

  그 자리에 검은 점이 찍히고,

  점이 점점 퍼져 몸이 썩기 시작한 누에는

  잠실 밖으로 던져지고 마는 것이다


  네 번의 잠을 채우지 못하고

  쫓겨난 누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허물어지는 몸을 이끌고 마른 흙에 뒹굴고 있던,

  끝내 섶에 올라 우화羽化도 못하고

  한 올의 명주실도 풀어낼 수 없게 된 그들이

  어린 내 눈에는 왜

  잠실의 누에들보다 더 오래 머물렀을까


  어느 날 내 등에도

  검은 점이 있다는 것을, 그 점지點指

  삶을 여기까지 끌고 오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낯선 골목에서 저녁을 맞고 있었다  (전문)



  시를 쓰는 일이 누에가 고치를 짓는 것과 같다면, 등에 파리똥이 찍혀 뽕잎을 파도처럼 솨아솨아 베어 먹을 뿐 고치를 만들지도 못하고 밖으로 버려진 누에들은, 자신이 교수로 있는 문예창작과 학생들 가운데 글 쓰는 일에 실패한 제자들일까? 스승 입장에서 그런 제자들이 더 마음에 짠할 수 있을 터이니. 세상을 사는 일이 다 그렇다. 전부 다 성공하면 그게 성공인가. 관건은 성공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온기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이걸 제일 잘 하는 시인이 나희덕이고.

 믿고 읽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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