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촌 - 이기영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8
이기영 지음, 조남현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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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네 편의 단편소설을 엮은 책. 앞뒤 따지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게을러서 다 늦게 대표작 이기영의 <고향>을 읽어보고 언젠가 단편집도 꼭 찾아보겠다, 결심했다가 이번에 읽었다. 열네 편 어느 하나 빠짐없이 말 그대로 카프 문학이다. 크게 나누어 소작을 짓는 빈농, 도시 소시민 가운데서 억지로라도 먹고는 사는 쁘띠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공장 노동자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이렇게 세 부류의 주인공이 등장해 소작쟁의를 일으키거나 도모하고, 도시 소시민의 삶을 자조하고, 파업을 준비한다.
  물론 시대가 바뀌어 더 이상 진한 감흥은 없지만 1920년대, 30년대에 읽었다면 짜릿한 의식화 교재로 사용했을 수도 있겠다. 카프 문학이 흔히 그렇듯이 무산자와 동경유학을 다녀온 인텔리겐치아는 거의 조건 없이 선하고, 부르주아 가운데 인텔리겐치아를 제외한 모든 족속들은 무산자들이 생산한 것을 수탈해 배를 불린다. 배만 불리는 것을 넘어 무산자의 딸과 유부녀의 성을 착취하기도 한다. 카프 문학 자체가 사회주의적 시각으로 봐서 다분히 계몽적인 성격을 띠어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런 단순한 이분법은 책 읽기를 식상하게 만들 수도 있다.
  소작인 가운데 주인공을 맡은 이는, 경성유학을 한(이상도 하지, 경성유학생은 악랄한 아비 지주보다 한 술 더 뜨는 악독한 세습지주인 반면, 동경유학생은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준 혁명가 같다. 이이가 동경유학을 해서 그런지는 물어보지 않아 모르겠다.) 지주 아들하고 같은 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지주의 아들보다 더 총명했으며, 시류에 밝고, 무엇보다 체격과 체력이 걸출하고 생각하는 바가 애초부터 정의파다. 정의파로 말할 거 같으면 첫 번째로 실린 <농부 정도룡>의 주인공 정도룡이 특히 그런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새 세상을 만든다는 정감록의 정도령이라도 되는 듯이, 소작이 떼인 이웃에게 자신의 소작논을 짓게 하고 지주에게 쫓아가 새 땅을 내놓으라고 닦달을 할 정도의 뱃심이 있는 자다.
  많은 주인공들이 지주에 대항해 그들이 저지른 비행을 탄핵하거나 소작쟁의를 선동하지만 어쨌든 당시의 율법과 법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폭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장리쌀 두 섬에 동생을 지주의 첩으로 보내야 할 수밖에 없기도 하고(<민촌>), 가뜩이나 병든 몸이 먹지를 못해 굶어죽기도 한다(<아사>).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이 어떤 내용인지는 짐작하실 수 있을 것. 소작쟁의든 공장 파업이든, 그것들이 발생하는 과정과 굳건한 단결의 필요를 이야기하는 것들. 지주와 도시 부르주아들에 의한 노동자, 농민의 노예화 현상을 스케치한 작품들, 사회주의자를 등장시킨 운동 소설, 그리고 생계 능력에 관한 한 별 볼일 없는 인텔리 이야기로 구분할 수 있겠다.  물론 읽으면 안 읽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이기영이 그리도 소원했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70년의 생명을 끝내고 안녕을 고한 지금, 설마 이 책을 아직도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의 책이라 주장할 사람은 없겠지? 식민지 시절의 국민의 노예화 과정과 현상, 도시에서 지식인들의 좌절을 알고 싶다면 좋을 듯하다.
  이기영의 시각도 좀 문제가 있다. 무대가 1920년대 이후라고 한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소작인들이 좋았던 시대라고 여러 작품에서 자주 언급하는 시절이 구한말이다. 비록 무너지고는 있었지만 봉건 양반들과 지배계급에 의한 수탈이 저질러지던 신분사회를 그리워하는 것도 의아스럽다. 아무리 검열 때문이라고 해도 그렇지 농민들이 최악의 환경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인 식민지 현상에 관해서도 입도 벙긋하지 않는 건 유감스러울 뿐이다.
  어쨌든 <고향>과 단편집을 읽었으니 이것으로 이기영 졸업장을 받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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