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풀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7
박용래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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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의 일곱 번째 시집 《강아지풀》을 출간한 1975년에 박용래 나이 만 오십. 이때부터 20년 전, 그는 잡지 『현대문학』에 시 <가을의 노래>가 박두진의 추천을 받았고 이듬해인 56년에 <황톳길>, <땅>으로 추천을 완료해 정식 시인이 된다. 이 20년 동안 박용래가 쓴 시를 다 모아봐야 겨우 백 편이 넘는다고 한다.
  충남에서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왔을 정도로 부유했던 물산 교역의 중심지 강경에서 태어난 시인은 조선은행에 근무하다 해방과 더불어 그만 두고 이후 잠깐 중학교 교사를 지냈다고만 연표에 적혀 있을 뿐, 생활을 위해 어떤 직업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시인들 가운데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 하는 이들이 평균보다 많은 것 같다. 혹시 박용래도 이 부류가 아니었을까. 해방 전 조선은행이면 지금의 한국은행 전신으로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곳 아닌가. 짧은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곧바로 시 쓰기를 위한 삶으로 접어들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20년 동안 백 편의 시를 썼으면, 한 해에 겨우 다섯 편 남짓이란 말인데, 가히 과작寡作이다.
  내가 알고 있는 과작의 이름난 시인은 서정춘이다. 시인으로 등단한 후 28년 만인 예순두 살의 나이에 겨우 마흔 편도 되지 않는 시를 실은 첫 시집 《죽편》을 낸 이다. 우연이랄까. 박용래나 아홉 살 아래인 서정춘이나, 시가 참 간결하다. 고르고 고른 시어들 몇 개를 나열하여 그것들만 가지고 산문이나 단편소설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소곤거릴 수 있는 시를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컨대 서정춘의 <죽편 1 - 여행> 전문을 감상해보자.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전문)


  대나무 한 마디가 기차 한 칸이 되어 시인은 대나무라는 푸른 기차를 타고 전라도 순천 자신의 고향까지 간다는데 그 길이 백년이 걸린다는 시. 구차한 이야기 한 마디 없는 순백의 스케치 한 장이다.
  서정춘은 원래부터 시(에 대하여) 구두쇠라고 호가 났으나 박용래는 이보다 더한 시어의 구두쇠라서 과감하게 동사, 형용사 같은 것도 생략해버린다. 《강아지풀》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시 한 수 읊어보겠다.



  뜨락


  모과나무, 구름
  소금항아리
  삽살개
  개비름
  주인은 부재
  손만이 기다리는 시간
  흐르는 그늘
  그들은 서로 말을 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족과 같이 어울려 있다  (전문)

  시인이 주인 없는 집의 툇마루에 앉아 본 뜨락의 정경. 시 한 수 읽는 것으로 한갓진 저 옛 그림 속의 마당 있는 집이 환등기처럼 그려진다.
  박용래의 이런 생략은 물론 처음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생래적으로 향토시인. 1950년대의 농촌 풍경에서 시작했다. 그의 데뷔작인 <가을의 노래>를 보자.


  깊은 밤 풀벌레 소리와 나뿐이로다
  시냇물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
  어두움을 저어 시냇물처럼 저렇게 떨며


  흐느끼는 풀벌레 소리……
  쓸쓸한 마음을 몰고 간다
  빗방울처럼 이었는 슬픔의 나라
  후원을 돌아가며 잦아지게 운다
  오로지 하나의 길 위
  뉘가 밤을 절망이라 하였나
  말긋 말긋 푸른 별들의 눈짓
  풀잎에 바람
  살아 있기에
  밤이 오고
  통이 트고
  하루가 오가는 다시 가을밤
  외로운 그림자는 서성거린다
  찬 이슬밭엔 찬 이슬에 젖고
  언덕에 오르면 언덕
  허전한 수풀 그늘에 앉는다
  그리고 등불을 죽이고 침실에 누워
  호젓한 꿈 태양처럼 지닌다
  허술한
  허술한
  풀벌레와 그림자와 가을밤  (전문. 2연 3행 “이었는”의 정체에 대해서는 좀 더 궁리가 필요하다.)

  광경은 농촌이로되 심상은 쓸쓸함, 외로움 등의 멜랑콜리. 전쟁 후 극빈했던 농촌/향토가 동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슬픔의 정서로 시작한 박용래. 시는 시간이 지나며 <뜨락>처럼 간략해지다가, 이후엔 또 어린 시절, 소년, 유년기의 회상으로 변신한다. 어려서 본 장면들을 별 수사 없이 묘사하는 간결한 시로. <꽃물>을 읽어보자.


  수수밭
  수수밭 사이로
  기우는
  고향
  가까운
  산자락
  보릿재
  내는
  사람들
  귀향열차
  뒤칸에
  매달린
  노을,
  맨드라미 꽃물  (전문)


  말 그대로 이런 시 구두쇠가 있나 그래. 더 붙여봤자 조금이라도 구적거리는 단어는 품사를 막론하고 면도칼로 싹 잘라버린 시. 나, 너, 그대 같은 대명사는 물론이고 수식어 한 마디 없다. 그래도 탁, 읽으면 단박에 이해가 간다.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함 자체.
  조금 더 오래 살지. 이 시집을 내고 5년 후인 1980년, 갑작스럽게 닥친 심장마비로 겨우 55세에 생을 마치고 만다. 아까운 인물.

일찍 상했구나. 많아봐야 쉰다섯일 텐데 일흔 너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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