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르타의 태양 - 제101회 공쿠르 상 수상작
로랑 고데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1890년 남부 이탈리아 몬테푸치오 마을로 가는 가르가노 고원의 오후 두 시. 땅은 태양에 의하여 화형에 처해지고 있었다. 한 조각의 그늘을 찾을 생각도 않고 당나귀 등에 앉아 묵묵하게 태양을 견디는 사십대 사내 루치아노 마스칼조네. 이미 노인처럼 홀쭉하게 팬 두 뺌. 완전히 예전과 딴 판이 된 얼굴로 쉽게 이이를 알아볼 사람이 설마 있겠는가만, 15년 전, 가르가노 고원을 중심으로 악행을 일삼았던 도둑이자 건달 불량배. 그가 시에스타 시간을 맞추어 잔잔한 바다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다닥다닥 하얀 집들이 붙어 있는 조그만 마을 몬테푸치오의 가리발디 거리에 들어서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마스칼조네는 곧바로 비스코티 씨의 집으로 향했고, 당나귀에서 내려 문에 노크를 한다. 그의 앞에 등장하는 잠옷 차림의 여인. 사랑도 미움도 담지 않은 시선. 이미 그녀는 그의 것. 무엇이든 다 주리라고 다짐한 듯한 여인이 그를 집 안으로 들이고 긴 주랑을 걸어가다 남자를 향해 뒤돌아선다. 마스칼조네는 서슴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가 잠옷을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게 한 다음 깊게, 깊게 포옹하며 속삭인다. “필로메나!”
  15년의 감옥 생활 동안 마스칼조네가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동경이 되었던 여자. 단 한 번의 바라봄을 통해 평생 한 여자의 노예가 되었으며 오직 그녀를 취할 일념으로 호흡도 했고, 심장도 뛰었던 악당 마스칼조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몬테푸치오 마을에 들어와 사람들의 눈에 띄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감옥을 나오자마자 선택한 길이었고, 필생의 여인을 안았으며, 이제 평생소원이던 필생의 여인을 안아봤기 때문에, 차분하게 죽음의 길로 향한다. 다시 당나귀를 타고 마을 바깥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선 마스칼조네를, 사람들은 드문드문 알아보았고 어느덧 큰 무리를 지어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을 어귀에 당도하자 누군가가 마스칼조네에게 큼지막한 돌을 던져 관자놀이에 피가 흐르고, 피를 본 주민들은 더욱 흥분하여 또다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뒤늦게 뛰어 도착한 성당의 돈 조르지오 신부가 루치아노의 머리를 가슴에 안은 채 주민들에게 호통을 치며 꾸짖었지만, 마스칼조네는 마지막 숨을 내쉬기 위한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주민들 속에서 들려온 호통소리.
  “임마콜라타가 네가 능욕한 마지막 여자가 될 거다!”
  아, 자신이 품었던 여인은 꿈에도 잊지 못한 필로메나가 아니라 필로메나의 동생 임마콜라타였던 거다. 언니에게 추근대던 루치아노를 생각할 때마다 야릇한 쾌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던 동생. 차라리 죽음이 조금만 더 빨리 찾아와주었다면. 그리하여 필로메나를 안았었다고, 그렇게 알고 죽었더라면, 돌을 맞아 숨을 거두더라도 행복했을 것을. 루치아노 마스칼조네는, 이렇게 운명이 한 인간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니 뭐 어쩌겠어. 이게 인생이지. 루치아노는 그렇게 인생을 깨우치고 죽음 속으로 깊이깊이 파 들어간다.
  늦은 나이까지 처녀로 지내던 임마콜라타는 한 번의 떨리는 사랑으로 아들 로코를 낳고는, 노산의 충격으로 출산의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루치아노의 뒤를 따른다. 임마콜라타를 묻고 온 날, 동네의 나이 든 아낙이 신부에게 묻는다.
  “신부님이 해주실 거지요?”
  “자매님, 무엇을 말씀입니까?”
  “루치아노 마스칼조네의 악의 씨를 없애는 일 말입니다.”
  격노한 돈 조르지오 신부는 그길로 성당 문을 닫아걸고 주민들을 꾸짖은 다음, 로코를 몬테푸치오에게 적대적인 마을인 산 지오콘도의 스코르타 씨에게 위탁해 키운다. 이후 로코의 이름이 로코 스코르타 마스칼조네가 되는 것.
  루치아노 마스칼조네가 그냥 일개의 도둑이자 건달이라고 한다면, 로코는 남부 이탈리아를 벌벌 떨게 만드는 진정한 악당, 강도, 강간범, 살인마, 방화범의 반열에 오른다. 세상의 모든 악을 집대성한 로코가 어느 날, 귀머거리 여인과 함께 몬테푸치오 성당의 돈 조르지오 신부 앞에 서서 혼인미사를 올린다. 이날 이후 몬테푸치오 사람들은 적어도 로코로부터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고, 로코는 미친 듯이 돈과 귀금속과 보물을 자루로 실어 오면서 두 아들과 딸을 낳아 기른다. 돈, 재물에 경배한 주민들. 어느새 주민들은 로코를 경외하기 시작하지만 아무도 자신의 아이들이 로코의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라파엘이라는 사내아이는 유달리 이들을 좋아해 해가 질 때까지 함께 어울려 놀다가 해가 지면 집에 가서 부모한테 두드려 맞는다. 나중엔 부모가 포기할 때까지. 로코의 아이들은 순서대로 ‘미미’ 도메니코, ‘페페’ 주세페, ‘미우치아’ 카르멜라.
  어느 날, 로코가 다시 돈 조르지오 신부에게 들러 밤새도록 자신이 살면서 저지른 죄악을 고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성당에 헌납하기를 제의하지만 거절당한다. 로코는 말한다.
  “로코가 몬테푸치오 주민에게 재산을 나눠주면 더러운 돈을 주는 겁니다. 성당과 돈 조르지오 신부의 손을 거치면 선한 돈이 되는 겁니다.”
  돈 조르지오 신부는 거절할 방법이 없다. 로코는 조건을 건다. 대신 스코르다들이 죽을 때는 가장 성대한 장례식을 지내주기로. 승낙한 돈 조르지오 신부, 문서 두 부를 만들어 서명을 하고 한 부를 로코에게 전한다. 새벽에 집에 도착한 로코는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막내 카르멜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그날 밤에 자연사한다. 이제 남은 건 가난한 유가족, 벙어리 여인과 도메니코, 주세페, 그리고 카르멜라.
  로코가 전 재산을 헌납한 행위. 이건 주민들로 하여금 로코의 피붙이에 내려진 저주, 미치광이 사생아의 피를 타고 물려받아야 하는 저주를 전 재산으로 해소하는 의식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이제 가난뱅이, 그것도 최악의 가난뱅이가 된 유가족을 위해 돈 조르지오 신부는 시내 오래된 골목길에 작은 집을 한 채 구해 벙어리 여인을 살게 하고, 남매를 위해서는 나폴리를 출발해 뉴욕으로 가는 정기선 배표 석 장을 건네준다. 몬테푸치오 마을에서 최초로 배를 타고 이국의 땅으로 향하게 된 삼 남매. 남부 이탈리아 사람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정열, 우애, 극진한 대접, 복수. 태양을 닮은 기질을 물려받은 남매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카르멜라는 엘리아와 도나토를 낳고, 엘리아는 또 안나를 낳아, 안나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이렇게 건조하게 스토리를 이야기하니까, 한 거친 집안 내력에 관한 소설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것. 빠른 이야기 전개와 달리, 독자로 하여금 괜스레 가슴이 찡하게 공감하게끔 만드는 것이 또 하나가 있다. 바로 문장. 원래 로랑 고데의 문장이 이런 것인지, 아니면 우리말로 바꾼 김민정이 남부 이탈리아 지방의 태양처럼 뜨거운 이야기를 쓸쓸하기 짝이 없게 바꾸어 쓴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 책을 단 한 번의 마음 저림도 없이 읽어치울 수 있는 사람은 심장이 없는 인간일 수도 있다. 공쿠르 상이 아무 작품에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101회 공쿠르 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걸려 있어 그냥 ‘읽어본 것’이지만 마음에 들었다. 얼마나 많은 좋은 작품들이 이 책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흘러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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