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꽃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이용악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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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악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볼 거리가 있다. 1914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경성이 청진 바로 아래에 있긴 하지만 심지어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삼수, 갑산보다 높은 위도에 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 정도의 위도라면 고구려-당-거란-여진-원-고려-조선이 땅 주인 노릇을 했을 터.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내 귀로 듣기엔 참 독특한 방언을 쓰는 지역이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를 보면 이용악의 집안이 대대로 두만강변에 터를 잡고 소금 밀수를 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용악이 어린 시절에 부친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극심한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그래 고학으로 경성고보, 지금 이름으로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부터 역시 극도의 궁핍 속에서 동경의 상지대 신문학과를 다녔는데, 22세인 1935년에 “신인문학”이라는 잡지를 통해 식민지 경성에서 등단했고 36년엔 도쿄에서 김종한과 동인지 “이인二人”을 간행, 37년에 역시 도쿄의 출판사에서 첫 시집 《분수령》, 38년에도 같은 출판사에서 《낡은 집》을 출간하고 39년에 귀국하니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이었다.
  34년에서 38년까지를 온통 도쿄에서 있었다는 것은 이용악이 당시 경성의 문학판을 흔들던 카프에서 자유로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기, 특히 1935년에 경성에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카프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임화처럼 고문 끝에 죽음의 위협을 견디지 못해 조선문인보국회에라도 가입해 명을 이어갔을까? 이 질문은 1942년 이용악이 아예 붓을 꺾어버린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얻어터지고 서대문에 다녀왔어도 문인보국회에는 들어가지 않았을 거 같다. 대신 1942년에 그렇듯 함경북도 경성의 고향집에 틀어박혀 조용히, 언제 올지 모르는, 결코 올 것 같지 않은 해방을 기다렸겠지.
  그런데 극심한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는데 어떻게 경성고보에 진학할 수 있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대단히 총명했던 거 같다. 어디서 읽을 듯한데 이이를 우리나라 3대던가 5대던가, 하여간 몇대 천재 가운데 한 명으로 꼽는 것 같다. 함께 꼽힌 사람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천재 수준이 아니면 째지게 가난한 집에서 아이가 노동을 해 먹을 것을 벌어야지 어떻게 학교엘 다닐 수 있었겠나. 1930년대에.
  이이는 대학에 다닐 때 방학이면 집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만주, 아라사, ‘우라지오’라고 부르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여러 곳을 답사하며 식민지 조선의 인민들이 겪는 고초를 많이 경험했다고 한다. 이때 직접 보고 느낀 것이 시집 《오랑캐꽃》에서 여러 편 시화되고 있으며 동시에 깊은 호소력을 확보한다. 나는 이용악의 시를 처음 읽는 바, 애초에 공산주의자로 알고 있던 이용악이 아무런 운동의 메시지 없이 간도에 흘러든 조선의 유민들을 이리 노래할 수 있었는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어쩌다가 이제야 이 사람의 시를 읽게 됐는지 한탄을 할 수밖에. 그리하여 인용하기엔 조금 길지만 전문을 옮긴다.



  전라도 가시내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승냥이 또는 범)도 인젠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 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궈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전문)



  그냥 시를 읽으면 시인이 어떤 노래를 하고 있는지 그대로 알 수 있다.
  문제는 4연인데, ‘불술기’는 “기차를 뜻하는 함경도 사투리”라고 한다. 옛 시를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가 모르는 단어가 속출하면 그게 어떤 뜻인지 일일이 사전을 찾아가며 새롭게 배우는 거다. (참고: 3연의 ‘방자’는 “남이 못되거나 재앙을 받도록 귀신에게 빌어 저주하거나 그런 방술을 쓰는 일”) 시를 읽으면 그냥 사정이 눈에 그려지니 새삼스레 내가 읽은 감상을 쓸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한 마디만 하자면, 저 먼 북국에서 마주친 동포 처녀를 바라보는 시, 이런 건 처음 봤다.
  총 50편의 시가 실려 있다. 내 정서엔 위에 인용한 <전라도 가시내> 같은 간도 땅 혹은 러시아 지역까지 널리 퍼져 있던 조선인들을 그린 시가 제일 좋았다. 이용악 자신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 성장해 그런지 없는 사람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는 장면을 스케치 한 시편들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 전부 다는 아니지만 거의 다는 슬픈 사람들이다. 그들이 불가에 모였다.



  슬픈 사람들끼리


  다시 만나면 알아 못 볼
  사람들끼리
  비웃이 타는 데서
  타래곱과 도루모기와
  피 터진 닭의 볏 찌르르 타는
  아스라한 연기 속에서
  목이랑 껴안고
  웃음으로 웃음으로 헤어져야
  마음 편쿠나
  슬픈 사람들끼리  (전문)


  비웃은 겨울에 제철인 생선 청어, 타래곱은 곱창의 함경도 사투리고, 도루모기는 도루묵이다. 가난해 슬픈 사람들이 조그맣게 피운 불 주위에 모여 싸구려 생선인 청어와 도루묵, 곱창과 닭 머리를 구워 먹는다. 이 밤에 또는 날이 새자마자 서로 갈 길 떠나야 할 사람들이. 시를 읽는 독자마저 슬프고 쓸쓸한 웃음 웃게 만드는 시.
  그러나 해방을 맞아, 오랜 절필을 끝내고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해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시들은 오직 혁명을 위하여 복무할 뿐이라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자신의 신념에 의한 시작詩作이었겠으나 작게는 이용악의, 크게는 우리 국문학을 위해 작지 않은 손실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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